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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 별세

4시간 전
지난 3월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
AFP/Getty Images

'페페 무히카'라는 애칭으로도 잘 알려진 호세 알베르토 무히카 코르다노 전 우루과이 대통령이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게릴라 단체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2010~2015년 재임한 그는 검소한 생활 방식 덕에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대통령으로서 보여준 소박한 삶,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 사회 개혁 추진(예를 들어 세계 최초로 기호용 마리화나 사용을 합법화했다) 등 여러모로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인구 340만 명에 불과한 우루과이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인 글로벌 인기였으나, 그의 유산은 자국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히카를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보곤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수도 몬테비데오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그는 정치뿐 아니라 독서 및 농사 등에 대한 열정 모두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무히카는 우루과이의 전통적인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국민당'의 당원이었는데, 이 정당은 훗날 무히카 정부에 맞서는 중도우파 야당이 되었다.

1960년대 무히카는 '국민해방운동(MLN-T, 투파마로스)'의 설립에 참여했다. 폭행, 납치, 처형 등을 저지른 좌파 성향의 도시 게릴라 조직으로, 그는 평생 자신은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쿠바 혁명과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MLN-T는 당시 헌법과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으나 좌파 진영으로부터 점점 더 권위주의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던 우루과이 당시 정부를 상대로 비밀리에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 동안 무히카는 4차례 체포되었으며, 1970년에는 6차례 총상을 입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2010년 5월 몬테비데오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무히카 전 대통령
Getty Images
무히카 전 대통령이 정치계 안팎에서 보여준 검소한 생활 방식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MLN-T 관련 수감자 105명과 함께 터널을 통해 탈옥(우루과이 역사상 최대 규모의 탈옥 사건으로 손꼽힌다)하는 등 그는 2차례 탈옥하기도 했다.

1973년, 우루과이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며 무히카를 포함해 이른바 '9명의 인질'을 잡고 게릴라들의 공격이 계속되면 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1970, 80년대에 걸쳐 14년 넘게 수감되었던 그는 고문을 당하는 등 열악하고 고립된 환경에서 지냈다. 그러던 1985년, 우루과이가 민주주의로 복귀하면서 자유의 몸이 된다.

수감 생활에 대해 그는 망상에 시달리고, 개미와 대화하는 등 정신이 이상해지는 경험이었다고 회고했다.

무히카는 석방되던 날이 생애 가장 행복한 기억이라며, "대통령이 된 것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5년 3월 몬테비데오에서 석방되는 전 국민해방운동(MLN-T, 투파마로스) 게릴라 조직의 구성원이었던 호세 무히카(왼쪽), 마우리시오 로센코프(오른쪽), 아돌포 바센 주니어
AGENCIA CAMARATRES/AFP via Getty Images
1985년 3월 석방되던 날의 무지카(왼쪽) 전 대통령

게릴라 대원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석방된 지 몇 년 후, 무히카는 하원 및 상원 모두에서 의원직을 지냈다.

2005년에는 좌파 연합 '프렌테 암플리오(FA)'의 첫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았으며, 2010년에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74세로, 국제 사회에서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당선은 당시 이미 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남미 좌파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무히카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함께 남미 좌파 지도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정치 평론가들은 무히카는 여러 차례 실용적이고 대담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루과이를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의 집권 기간 우루과이 경제는 상당히 우호적인 국제 정세 속에서 연평균 5.4%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빈곤율도 감소했으며 실업률도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아울러 낙태 합법화, 동성 결혼 인정, 마리화나 규제 완화 등을 끌어내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무히카는 재직 중에도 대통령 관저에서 살기 거부했다. 대신 마찬가지로 게릴라 대원 출신 정치인이었던 아내 루시아 토폴란스키와 함께 수도 외곽에 있는 소박한 집에서 가사도우미도, 보안요원도 거의 없이 살았다.

이에 더해 항상 캐주얼한 옷차림에 1987년형 하늘색 폭스바겐 비틀 차량을 몰고 다니는 모습, 월급의 상당 부분을 기부하며 일부 언론에서는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히카는 "저들은 내가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라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하곤 했다.

지난 2012년 자택에서 진행된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가난한 자란 무엇을 더 원하는 사람을 말한다 … 왜냐하면 끝없는 경쟁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언제나 검소함을 강조한 그였으나, 무히카 정부는 공공지출을 크게 늘려 재정 적자가 키웠는데, 이에 대해 정적들은 그가 낭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무히카는 교육을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해지는 자국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이 지역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부정부패나 자국의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비난에서만큼은 자유로웠다.

임기 말에서 약 70%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으며,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기도 했다.

퇴임을 앞두고 무히카는 "전 세계 사람들이 왜 나를 주목하는가. 내가 가진 게 별로 없고, 소박한 집에 살고, 낡은 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상한 곳이다. 평범한 것에 놀라다니"라고 말한 바 있다.

2024년 4월 선거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무히카 전 대통령과 좌파 연합 ‘프렌테 암플리오(FA)’ 소속 야만두 오르시 대선 후보
Getty Images
무히카 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로 손꼽히는 '프렌테 암플리오(FA)' 소속 야만두 오르시 후보는 지난해 11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퇴임 후에도 우루과이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무히카는 202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그의 정치적 후계자로 손꼽히는 야만두 오르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그가 속한 '프렌테 암플리오(FA)'는 우루과이가 민주주의로 복귀한 이래 최다 의석을 확보했다.

무히카는 지난해 암 투병 소식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나이와 가까워지는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며 덤덤했다.

11월 BBC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안다. 어쩌면 삶의 소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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