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버텨줘'...홍콩 화재 후 실종자 가족의 고통스러운 기다림
"조금만 더 버텨줘."
홍콩 타이포 지역의 고층 공공주택 단지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직후, 정(Chung) 씨가 아내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지난 26일 오후 3시쯤, 정 씨(45)는 공포에 질린 아내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내는 고양이와 함께 집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급히 직장에서 집으로 달려갔지만, 31층짜리 건물은 이미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홍콩 소방관들은 7개 동을 집어삼킨 불길을 잡는 데 거의 24시간이 걸렸다. 이 화재로 지금까지 최소 128명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 정확한 집계가 진행 중이지만, 당초 200여 명이 실종됐다고 알려졌다. 정 씨의 아내도 그중 한 명이다.
BBC는 당시 집에 없었거나 가까스로 대피한 몇몇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정 씨처럼 희망을 놓지 않은 채 건물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가 BBC에 화재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 씨와 그의 형제는 화재 당일 밤 내내 거리에서 소방관들에게 수십 차례 상황을 물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을 줄 수 없었다.
그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아내와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아내는 연기가 점점 더 짙어지자 곧 기절할 것 같다고 했다.
27일, 정 씨는 붉어진 눈으로 BBC에 "아내가 기절했을 것"이라며 "더는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내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후 몇 시간이 지나자,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고양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화재 당시 집에 있던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정 씨 가족은 10년 전, '왕 청 하우스(Wang Cheong House)'에 입주했다. 불길이 번진 7개 동 중 첫 번째 동이다. 화재가 시작되자 불과 10분 만에 그들이 살던 23층이 연기로 가득 찼고, 아내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고 정 씨는 말했다.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국은 리모델링 공사 과정에서 사용된 가연성 자재와 비계가 불길을 번지게 만든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번 화재는 홍콩에서 지난 60년간 발생한 화재 중 가장 치명적인 화재가 됐다.
1983년에 홍콩섬 북쪽의 부유층 거주 지역에 준공된 이 공공주택 단지 '웡 푹 코트(Wang Fuk Court)'는 약 1800세대로, 8개 건물 중 7동이 불길에 휩싸였다.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주민의 약 40%가 65세 이상이다.
이는 많은 주민들이 갇혔을 것으로 우려되는 이유 중 하나다. 고령층이 많아 신속히 대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40대 여성 펑(Fung) 씨도 아직 어머니를 찾지 못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지난해 이 단지로 이사했다. 바다 전망이 좋아서였다. 불이 났을 때 그와 아버지는 직장에 있었다.
펑 씨는 이웃에게 전화를 받았다. 펑 씨의 어머니와 함께 화장실에 숨어있다고 했다. 화재 당일 자정 무렵 그들과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며 "어머니가 돌아오면 그때 다음 상황을 생각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이 다시 전화가 와서 혹시 어머니가 이미 탈출했을 가능성이 있냐고 묻자 분노를 느꼈다고 설명했다.
그는 "'왕 청 하우스'가 얼마나 심하게 탔는지 당신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지 않냐"라고 되물었다고 말했다.
SNS에는 실종된 노인, 아이 그리고 반려동물을 찾는 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한 절박한 어머니는 "아직 저의 딸아이를 찾지 못 했다"라며 "벌써 30시간이 지났는데 소방 당국에서는 아무런 업데이트도 없다"라고 썼다.
이후 그녀는 "이제 희망이 없는 것 같아 두렵다"라고 글을 올렸다.
이번 참사 이후 '웡 푹 코트'에서 진행된 논란이 많았던 비싼 리모델링 공사가 주목을 받았다. 공사 비용은 약 3억3000만 홍콩달러(약 621억8000만원)였으며, 각 세대는 16만~18만 홍콩달러(약 3000만~3400만 원)를 부담해야 했다.
많은 주민이 비용 때문에 반대했지만, 공사는 진행됐다. 당국은 현재 시공사 경영진 3명을 과실치사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은 비계에 사용된 망과 플라스틱 자재가 기준 미달이었고, 창문이 고도로 가연성인 스티로폼으로 감싸져 있었다고 밝혔다.
오래된 주민인 72세 여성 찬(Chan) 씨는 가끔 타는 냄새도 맡았다며 리모델링이 시작된 이후 공사 규모 때문에 계속 불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딸에게 "집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거 아니야?"라고 물은 적도 있다.
그는 화재 당시 혼자 집에 있었지만, 한국 여행 중이던 딸이 전화로 화재 사실을 알려줬고 무사히 대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82세 여성 우(Wu) 씨도 같은 상황이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그는 이웃들과 마작을 하고 있었는데, 경보가 아닌 남편들의 전화로 화재 상황을 알았다.
하지만 처음 불이 난 '왕 청 하우스'와 그의 건물 사이에는 세 동이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고도 계속 마작을 이어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전화를 받았고, 그가 있는 건물에 불길이 옮겨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대피했다.
타고 있는 건물들 사이로 타는 냄새가 자욱했고, 우 씨는 단지 내 건물들이 불타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사했지만, 도우미와 함께 밤새 밖에 머물렀다. 아들이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이 아파트에 42년을 살았습니다. 저는 어디도 가지 않을 거라고, 아들에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앉아서 상황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불이 꺼져야 제 마음이 조금이라도 놓일 것 같습니다."
불길이 잡히면, 평생 모은 돈으로 이 집을 산 많은 주민에게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다.
32세 남성 카일 호(Kyle Ho) 씨는 은퇴한 부모님과 함께 3년 전 이 단지로 이사했다. 보조금이 적용된 공공주택이었지만, 집을 마련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이제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홍콩 당국은 이재민 가구에 1만 홍콩달러(약 190만 원)의 현금 지원과 3억 홍콩달러(약 566억원) 규모의 지원 기금을 발표했다. 호 씨 가족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집을 잃은 겁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 가족 모두 무사하다는 거죠. 우리는 다른 가족들보다 운이 좋았습니다."
당국이 구조 작업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밝힘에 따라 정 씨 같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기다림이 계속되고 있다.
정 씨 역시 아내를 찾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살아있든 아니든, 반드시 아내를 구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