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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묻히고 싶다'...비전향장기수의 2차 북송 가능할까?

1일 전
북한 인공기를 들고 통일대교에 서 있는 안학섭 씨와 안학섭선생송환추진단
BBC/최정민

한국에서 42년 넘게 복역 후 출소해 최장기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안학섭 씨가 북한 인공기를 펼치고 판문점(공동경비구역)으로 가기 위한 길목인 통일대교를 찾았다. 올해 95세인 그는 "북한에서 묻히는 것"이 소원이다.

20일 오전, 고령의 안 씨는 시민단체 안학섭선생송환추진단(이하 송환추진단)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 있는 임진강역을 방문했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수도권 전철역이다. 이곳에서 30분 정도를 걸어가면 남북을 잇는 몇 안 되는 다리 중 하나인 통일대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약 8km 거리에 판문점이 있다.

앞서 지난 13일 송환추진단은 안 씨의 판문점 방문을 예고한 바 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 포로로 잡혀와 오랜 시간 비전향장기수로 지낸 안 씨가 북한 송환을 주장하며 "걸어서라도" 판문점에 가겠다는 것이다.

안 씨는 출입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이날 일정을 강행했다. 통일대교 검문소를 통과하려면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하고, 판문점에 방문하려면 유엔군사령군(유엔사)의 허가도 필요하다.

최근 건강 악화로 차를 타고 온 안 씨는 임진강역 앞에서 짧은 집회 후 통일대교로 이동했다. 다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통일대교 남단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안 씨는 검문소까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걸어갔다. 검문소로 향한 지 몇 분이 지나 되돌아온 안 씨 손에는 북한 인공기가 쥐어져 있었다.

"2000년에 우리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옥중 동지들이 북으로 갔는데, 그놈들이 있는 그곳이 참을 수 없이 그립더라고. 그리고 내가 죽어서까지 식민지 땅에 묻히는 게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 죽어서 시체나마 자주 독립국가에 묻히고 싶었습니다…그래서 북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말을 마친 후 그는 구급차에 올라타 현장을 떠났다.

통일대교를 향해 가는 안학섭 씨 뒷모습
BBC/최정민

'비전향장기수'

"고문 당하잖아요. 정신 잃었다가 깨어나면 손부터 봤어요. 손에 인주가 묻었나 보려고요. 안 묻었으면 '너희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겼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쾌감을 느꼈죠...당시에 때려서 의식을 잃으면 손에 인주를 뭍혀서 전향신청서에 손 도장을 찍었거든요."

지난달, BBC 코리아는 서울 모처의 병원에서 안 씨를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송환추진단이 정부에 안 씨의 북송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직후였다.

안학섭 씨처럼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오랜 시간 복역을 택한 빨치산이나 조선인민군 포로, 남파 간첩 등을 '비전향장기수' 또는 '장기구금양심수'라고 부른다.

한때 사상 전향서 작성 여부에 따라 '비전향장기수'와 '전향장기수'를 구분했으나, 1998년 사상전향제도가 폐지되고 2000년대 들어 일부 전향 과정이 강제적으로 이뤄졌으며 가혹행위를 동반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따로 구분하지 않고 있다.

안 씨는 그가 사상 전향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에 40년 넘게 수감돼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몸의 상처를 보여주며 "20대 초에 틀니를 했다, 여기 왼쪽 늑막도 우그러들었다"라며 그가 받은 고문을 설명했다.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가 이 얘기하면서도 그게 머리에 떠올라서 아주 괴롭습니다…지금도 자다가 꿈을 꿔요."

안 씨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말기에 탈영한 작은형과 강화도 마니산 자락에 있는 이모 집에서 숨어 살다가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미제로의 이양"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이후 그는 공산주의 계열 청년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7년부터는 8·15 광복 행사를 준비하다가 경찰에 쫓겨 개성에 있는 친척집으로 도피해 생활하기 시작했다. 개성에서 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해 연락원 등으로 일하다가 1952년 8월 대남 무장 공작 부대로 알려진 북한군 제526군 소속 941부대에 배치돼 남으로 보내졌다.

결국 안 씨는 1953년 4월 체포돼 국방경비법(이적죄)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995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나기 전까지 42년간 복역했다. 현재 생존 장기수 중에는 최장 기간 복역했다.

'2차 북송' 가능할까?

안 씨는 최근 자신들을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정부에 공식 요청한 생존 비전향장기수 6명 중 한 명이다. 아직 공식 요청 인원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북송을 원하는 이들도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안 씨는 다른 여러 장기수와 마찬가지로 출소 이후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제대로 된 일을 구하지 못하고 막노동 등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그러던 중,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같은 해 9월 63명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됐다.

당시 '비전향' 장기수였던 안 씨도 송환 대상이었지만, 그는 송환 신청을 하지 않았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북한으로 돌아가면) 미국에 안방을 비워주고 나간다는 거잖아요. 사람으로서 내 양심이 허락을 안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우리가 정세를 너무 낙관적으로 봤어요. 이렇게 정치가 발전하면 적어도 4년 이내에 (남북 간) 자유 왕래가 될 것이라고 봤고 그렇게 돼야 한다고 본 거지. 그래서 나는 '2차 (송환) 기회가 있으면 나는 그때 가겠다' 한 거예요."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남북 관계는 금방 경색됐고, 지금까지도 '2차 송환'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후 북한에 줄곧 유화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북한의 반응은 크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이 2023년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통일' 및 '민족' 개념 지우기에 나서면서 관계 회복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원곤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장은 비전향장기수 송환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다른 사안과는 다르게 한국의 접촉 시도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비전향장기수의 경우 북한에 가면 영웅이다. 인민 영웅 칭호를 받고, 굉장히 큰 군중집회에서 (체제) 선전용으로도 활용된다"라며 "그만큼 대한민국이라는 적성국에서 고생한 영웅을 대접한다는 게 북한 체제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북한이 응답을 하지 않기는 굉장히 어려운 사안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박 교수는 비전향장기수가 송환되더라도 북한이 상호주의에 따라 국군포로를 돌려보낼 가능성이 작다고 봤다. 근본적인 남북 관계 개선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통일부는 비전향장기수들의 북송 요구에 대한 입장을 묻는 BBC의 질문에 "안 씨를 포함해 비전향장기수 문제 등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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