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전 세계 여성·소녀 10분에 1명꼴로 연인·가족에 의해 살해돼'
세계 곳곳에서 10분마다 1명의 여성 혹은 소녀가 자신의 연인(partner), 남편 혹은 가족 구성원에게 살해되고 있다는 유엔(UN) 보고서가 나왔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와 유엔 여성기구(UN Women)는 이로 인해 하루 137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며, 전 세계 모든 지역이 영향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4년에는 약 5만 명의 여성과 소녀들이 연인 혹은 가족 구성원에게 살해됐고, 이는 전 세계 여성과 소녀 대상 고의적 살인의 60%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이 보고서는 25일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을 맞아 공개됐으며 유엔은 여전히 집이 여성에게 가장 치명적인 장소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페미사이드(femicides: 여성살해)는 집 외의 장소에서도 발생하지만, 이에 대한 데이터는 여전히 제한적이라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사라 헨드릭스 UN 여성기구 정책국장은 "페미사이드는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라며 "통제적 행동, 협박, 온라인을 포함한 괴롭힘에서 시작해 폭력의 연속 선상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 역시 2022년 27세 남성 조현진이 전 연인을 집에서 흉기로 살해한 사건과 지난 3월 30대 남성이 집에서 아내를 목졸라 살해한 사건 등의 범죄가 이어졌다.
한국 경찰청이 발간한 '2024 사회적 약자 보호 주요 경찰 활동' 보고에 따르면, 2024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 죄종 사건(살인·살인미수 등) 피해자의 30% 이상이 범행 전 가해자로부터 가정폭력, 교제폭력 등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피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피해자의 경우 9.7%에 머물렀다.
세계적 위기
아프리카는 친밀한 연인이나 가족에 의한 페미사이드가 10만 명당 3명 꼴로 발생해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으며, 이어 아메리카 대륙(1.5명), 오세아니아(1.4명), 아시아(0.7명) 그리고 유럽(0.5명)이 그 뒤를 따랐다.
존 브란돌리노 UNODC 사무총장 직무대행은 "전 세계에서 너무 많은 여성과 소녀들에게 가정은 여전히 위험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장소로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2024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페미사이드 대부분이 가족보다는 연인에 의해 일어났으며, 이런 형태는 유럽이 64%, 아메리카 대륙이 69%를 차지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이러한 살인은 수년간의 학대 끝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알바니아에서는 페미사이드 피해자의 90%가 이전에 가해자로부터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으며, 일부는 보호명령 등 보호조치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출소한 지 며칠 만에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많은 사건이 총기, 날카로운 도구, 둔기 또는 물리적 폭력을 동반했다.
보고서는 질투, 이별 거부, 경찰 신고에 따른 보복, 이별 후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가 살인의 주요 동기였다고 밝혔다. 페미사이드로 인해 35명의 아이들이 어머니를 잃었다.
레소토에서는 15~49세 여성의 44%가 연인으로부터 신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경험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보고서는 신뢰할 만한 데이터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페미사이드가 연인 또는 가족 구성원과 관련되어 있고 가정폭력, 음주, 갈등이 흔한 촉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총기와 기술
보고서는 총기와 기술(technology)이 페미사이드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집 가능한 증거에 따르면, 친밀한 파트너 폭력 가해자가 총기를 소지할 경우 살인 발생 가능성이 현저히 증가하며, 사적 공간에서 발생하는 살인에서 다중 피해자 위험도 70%가 증가하는 걸로 나타났다"고 보고서는 짚었다.
기술도 통제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보고서는 온라인 스토킹, 독싱(동의 없이 개인 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행위), 이미지 기반 학대 등 기술을 활용한 폭력이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에서 2011~2014년 사이 발표된 41건의 가정폭력 살인을 분석한 결과 58.5%의 사건에서 피해자가 살해되기 전 기술이 강압적 통제와 감시에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강압·감시·스토킹 등의 폭력이 오프라인에서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증거도 증가하고 있다.
언론인, 활동가, 정치인 등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들은 이런 기술 기반 폭력의 위험이 더 크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보고서는 관련 정책과 더불어 "알맞은 시점에 적절한 개입"이 이뤄진다면 페미사이드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마무리한다. 총기 접근성, 스토킹, 관계 파탄, 약물 남용 등이 위험 요인에 포함됐다. 보고서는 이러한 살인을 막기 위해 더 강력한 법 제정과 보호명령 집행, 데이터 수집을 촉구한다.
피해자들
- 레베카 쳅테게이(Rebecca Cheptegei, 33): 우간다 출신 올림픽 육상 선수였던 그는 케냐 서부트랜스 은조이아 카운티의 자택에서 전 연인 딕슨 은디에마(Dickson Ndiema)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쳅테게이에게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고, 며칠 뒤 부상으로 사망했다. 은디에마도 공격 당시 입은 심각한 화상으로 며칠 뒤 숨을 거뒀다. 두 사람은 토지 문제로 다투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루이즈 헌트(Louise Hunt, 25)와 그의 언니 한나 헌트(Hannah Hunt, 28): 루이즈의 전 파트너인 카일 클리포드(Kyle Clifford)는 영국 허트퍼드셔 부시에 있는 가족의 집에서 61세인 그들의 어머니 캐롤(Carol)을 찌르고 치명적인 중상을 입힌 뒤 두 자매를 살해했다. 클리포드는 2024년 7월, 루이즈가 연인 관계를 끝내자 그를 성폭행하고 석궁을 사용해 그와 그의 언니를 쐈다. 클리포드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 3회를 선고받았다. 이들은 BBC 경마 중계 해설자 존 헌트(John Hunt)의 아내와 딸이었다.
- 크리스티나 요크시모비치(Kristina Joksimovic, 38): 전직 모델이자 미스 스위스 결선 진출자였던 그는 2024년 2월 바젤 근처 자택에서 살해됐다. 두 자녀의 아버지인 요크시모비치의 남편은 그를 살해했다고 인정했다. 스위스 언론에 따르면, 경찰은 이전에도 신체적 폭력 신고로 이 집에 출동한 바 있다.
- 노르마 안드라데(Norma Andrade)의 딸은 멕시코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페미사이드로 희생됐다. 릴리아 알레한드라(Lilia Alejandra)는 납치, 고문 뒤 살해당했으며 안드라데는 멕시코에서 '우리 딸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협회(May Our Daughters Return Home, Civil Association)'를 설립했다.
"어느 날, 내 딸 릴리아 알레한드라 가르시아 안드라데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일 딸은 집에 오지 않았고, 나중에야 저는 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순간 제 세상은 무너졌습니다. 릴리아 알레한드라는 납치됐고, 고문당하고 살해됐습니다. 이 사건 이후 우리는 딸의 사건이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서로 연대해서 슬픔을 정의를 향한 투쟁으로, 페미사이드 폭력을 끝내기 위해 싸우는 결의로 바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