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가 트럼프: APEC 참석차 한국 오는 김에 김정은 만날까?

전 세계의 시선이 한반도로 모여들고 있다. 오는 31일부터 이틀간 한국 경주에서 개최되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문이다.
사실 APEC도 APEC인데, 여기에 참석하는 한 인물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가 한국을 찾는 것은 2019년 6월 군사분계선(MDL)에서 가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 이후 6년 4개월 만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한국에 들러 김 위원장과 만났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APEC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때마침 미중 무역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미중 정상회담까지 예고된 상황. APEC 개최 그 자체보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중회담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그 정도로 현재 미중 무역 갈등 및 여파는 혼돈 그 자체다.
그렇다면 지근거리에 있는 김정은 위원장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 트럼프 대통령이 또다시 한국에 오는 이 순간을 말이다. 평양에서 경주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50km. 평양에서 미국 백악관까지 약 1만 1000km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450km쯤이야 눈감고 마실 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지난 2018년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급만남'을 제안한다면 김 위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화답할까? 경주에서 보자고 한다면 과연 한국으로 올까? 천안문 망루에서처럼 이번에는 혹시나 경주 불국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 그리고 김 위원장 셋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연출될 수 있을까? '쇼맨십의 귀재'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시진핑-푸틴에 이어 트럼프까지?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21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연설 도중 뜻밖의 언급을 했다. 미국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며 북미대화 재개 의향을 피력한 것인데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물론 조건이 있었다. 미국이 허황된 비핵화 집념을 버리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핵 포기 의지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는, 즉 핵 보유국 지위 인정을 원한다는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직접 북미대화 관련 언급을 한 만큼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온 김에 김 위원장과 다시금 만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북한정보분석국장을 지낸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원은 BBC에 "김정은과 트럼프 모두 서로를 만나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측 모두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달 중국에서 시진핑과 푸틴을 만났고 만약 트럼프까지 만난다면 이제 단기간에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 강대국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김정은으로서는 실질적인 이익을 떠나서 그림 자체를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만날 생각이 있지 않겠나 싶다"고 했다.
지난 9월 3일 중국 전승절 참석으로 다자 외교무대에 첫 발을 들이고 천안문 망루에 당당히 올라 세를 과시한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오는 이번 상황이 대내외적으로 체제를 선전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
장 연구원은 트럼프 입장에서도 최근 노벨평화상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북한 핵 문제는 어쨌거나 트럼프 자신의 치적을 쌓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누가 될 일은 아니라며 "실질적인 성과와 무관하게 대중적 쇼맨십이 강한 트럼프 입장에서도 김정은과 만나 상황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국제 평화에 대한 자신의 기여로 선전할 수 있는 좋은 그림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2018년과 같이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에 이르는, 비핵화 목표를 향해 몇 걸음 나아갔던 그 전례를 다시금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남는다며, 북한이 비핵화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고 미국 역시 기본적으로 비핵화 목표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북미 간 실질적인 협상 또는 의미있는 대화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일단은 분위기를 만든다는 차원에서의 만남 정도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면서 어쨌거나 "그런 그림이 있어야 실질적인 대화로 나아가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남'이 이뤄졌으면 하는 기대감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울러 "그럴 경우 한국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이 불가피할 수 있는 만큼 북미 협상에 한국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의제들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부연했다.
미 백악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어떤 전제 조건 없이 대화하는 것에 여전히 열려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유엔군사령부와 한국 통일부는 APEC 정상회의에 즈음해 판문점 특별견학을 중단한다고 20일 밝혔다. 북미대화 가능성을 대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조치는 유엔사 주도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와 관련해 한국 대통령실은 '북미대화를 지지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수는 있지만 관건은 중국과의 통상 분쟁이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결국 중국과의 무역 갈등이 심화하면서 트럼프에게 북한 문제가 후순위로 밀렸다는 것인데, 익명을 요구한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분야 고위 관료는 "미중 통상 문제가 잘 전개되지 않을 경우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이 급하게 북한으로 화제를 돌릴 가능성은 여전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과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당시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북한에 만남을 제안해 판문점 깜짝 회동이 이뤄졌듯이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트럼프 입장에서도 미리 철저히 준비하기보다는 즉흥적인 만남을 가져야 관련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서 "사실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을 향해 허황된 비핵화 집념을 버리라고 주문한 만큼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여건 속에 북미 회동이 이뤄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너무나도 달라진 북한의 위상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방한을 계기로 한 북미회동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는 김정은 위원장의 몸값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었다. 국제정세 및 여건이 2018년 당시와는 너무나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실제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는 김 위원장의 첫 다자 외교 무대였고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과 함께 망루에 올라 북중러 연대를 과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다소 멀어진 듯 보였던 북중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로도 평가되면서, 향후 북한 경제가 빠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듯 성공적인 방중 후 금의환향한 김 위원장은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을 맞아 국제사회를 향해 대대적으로 자신과 북한 체제를 선전했다.
게다가 그즈음 러시아 집권 정당은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먼저 '안러경중'(군사안보는 러시아, 경제는 중국)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대화 재개를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다.
김대중 정권 통일부 장관을 지낸 강인덕 경남대 석좌교수는 "북한 정권이 안정기에 들어갔다"며 이같이 말했다. 북중러 3국 관계가 끈끈해지면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여유와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
그는 특히 "미중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날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정상 간 만남이 이뤄지려면 양쪽 모두 만날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북한의 정치·경제·군사 분야가 다 안정되면서 오히려 김정은이 트럼프를 만날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내년 1월 초로 예상되는 제9차 당대회"라며 "그 이후 북한에서 어떠한 전략적인 안이 나올지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재 해제' 더이상 안 먹혀
그 연장선상에서 대북제재 해제가 절실했던 과거와 달리 현재 북한의 상황이 크게 개선됐고 김정은의 몸값 또한 꽤나 높아졌기에 북미대화가 쉽게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는 2018년 싱가포르 제1차 북미회담 때보다 훨씬 비싼 값을 받아내야 하는데 굳이 서둘거나 허들을 낮춰서 트럼프를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2018~2019년 당시 국제 여건 및 지역 환경 속에서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라며 "그렇다고 거꾸로 트럼프 대통령이 궁색하게 김정은 위원장에 맞춰 양보를 할 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가자지구 해법도 실행이 불투명하고 하마스 무장해제 또한 이뤄지지 않았고 한미 관세 협상 또한 지지부지한 상황"이라며 "북미협상이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무리 예측불가한 인물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협상을 위해 '예측 불가성'을 보이는 것이라며 "트럼프의 '깜짝 쇼' 역시 어디까지나 예측 가능한 트럼프 스타일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그가 단지 '쇼'를 위해 불필요한 돌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제재 해제'가 이제는 북한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상품이 아닌데다 북한의 핵 능력 역시 2018년 당시와는 달리 현저하게 증가했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 '값'까지 지불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형중 한국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한미일의 북핵 공동 대응 능력도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신장됐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무언가 바꾸려 한다면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 내 정치적으로도 확실하게 만족시켜야 하는 부분이 있어야 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과거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회담 당시 '영변을 포기하는 대신 대북제재의 중요한 부분을 해제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려면 그 목적이 비핵화인지, 아니면 핵 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인지를 정치적으로 먼저 처리해야 한다"며 "이러한 구조적 문제 때문에 북미 정상이 만난다 하더라도 생산적인 합의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보인다"고 했다.
아울러 "김정은 위원장이 만약 트럼프와 또 만나게 된다면 내부적으로 통치 정당성을 고양시키는 것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앞에서 보란듯이 큰 소리 칠 수 있는 '호재'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박 연구위원은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