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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간' 재정의하고 의제강간 연령 상향으로 획기적 개혁

2023.06.16
2019년 일본 전국에서 시작된 성폭력 반대 '플라워 데모' 캠페인
Getty Images
2019년 일본 전국에서 시작된 성폭력 반대 '플라워 데모' 캠페인

일본이 성범죄 관련 법에서 강간을 재정의하고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하는 기념비적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강간의 정의가 "강제적 성관계"에서 "비합의적 성관계"로 확대되어 다른 국가들의 법적 정의와 보조를 맞추게 됐다.

법적 의제강간 연령 기준도 기존 13세에서 16세로 상향 조정됐다.

기존 법률은 성관계를 강요당한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사건 신고도 주저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법원 판결에 일관성이 없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새로운 법안은 9일 일본 참의원을 통과했다. 개정안에는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형성, 표현, 이행"하기 어려운 8가지 시나리오가 명시적으로 규정됐다.

여기에는 피해자가 술이나 약물에 취한 상태, 폭력이나 위협에 노출된 상태, "겁에 질리거나 놀란 상태"가 포함된다. 그밖에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힐 때 불이익을 "우려"하게 되는 권력 남용 관련 시나리오도 있다.

해당 법이 1907년 제정된 이후 의제강간 연령이 변경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까지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의제강간 연령이 가장 낮은 국가에 속했다. 다만, 13~15세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진 자는 해당 미성년자보다 5세 이상 연상인 경우에만 처벌을 받게 된다.

한편, 강간 신고의 공소시효가 10년에서 15년으로 연장되어 생존자들이 신고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진다.

또한 이번 개정안에서는 치마 속이나 성행위를 몰래 촬영하는 행위를 비롯해 "불법 촬영"을 금지한다.

이번 개혁안이 추진되기 전 2019년에는 강간 사건에서 연달아 무죄 판결이 선고된 적이 있었다. 이 판결들은 전국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성폭력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플라워 데모' 캠페인에 불을 붙였다. 활동가들은 2019년 4월부터 매월 11일 일본 전역에 모여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성폭력 생존자들과의 연대를 표했다.

그러나 BBC와 인터뷰한 몇몇 활동가들은 이번 개혁도 문제 중 일부만 건드렸다고 말한다.

도쿄에 본부를 둔 '휴먼라이츠나우'의 부대표 이토 카즈코는 여러 세대에 만연했던 '성'과 '성적 동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폭행 피해 사실을 공개한 생존자들은 온라인에서 협박이나 불쾌한 댓글을 받는 경우가 많다.

활동가들은 개혁안이 시행되더라도, 생존자들이 피해를 신고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변호사이자 인권 운동가인 가미타니 사쿠라는 BBC에 일본이 성폭행 생존자들을 위해 더 많은 재정적, 심리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가해자에게도 재범 방지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성적 동의를 둘러싼 투쟁

테사 웡, BBC News

이번 개정안의 가장 크고 중요한 변화는 강간을 "강제적 성관계"에서 "비합의적 성관계"로 재정의한 것이다. 이로써 강간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일본 사회에서 성적 동의의 개념을 법적으로 명시하게 된다.

활동가들은 일본법에서 정의하는 강간의 범위가 협소한 상태에서 검사와 판사가 법을 더 좁게 해석하여 사법 판단에서 적용되는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생존자들이 피해 사실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회의주의를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2014년 도쿄에서 한 남성이 15세 소녀를 벽에 밀어붙이고 저항을 무시한 채 성교를 행한 사건이 있었다. 법원은 남성의 행동이 소녀의 저항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판결하며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10대 소녀는 성인처럼 다뤄진 것이다.

성폭행 생존자 지원단체 '봄'(Spring)의 대변인 다도코로 유우는 "실제 재판 과정과 판결은 다양하다. 일부 피고인은 동의되지 않은 행위가 입증되더라도 '폭행 또는 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또한, 개혁은 문제의 일부분만 다루고 있으며, 법정 밖에서도 광범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활동가들의 주장이다.

일본에서 성폭행은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다. 최근에야 이토 시오리의 법정 투쟁, 전 자위대원이자 성폭행 생존자인 고노이 리나의 공개 발언, 연예계 거물 조니 키타가와에 대한 폭로 등 유명 사건으로 인해 국민들의 관심이 모였다.

일본이 마침내 성폭행법을 개정한 배경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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