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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참아가며 시신 수습'… 과학수사대의 눈에 비친 그 날의 무안공항

2025.03.18
지난해 12월 29일 무안공항에서 일어난 제주항공 비행기 사고로 181명의 탑승자 중 179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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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9일 무안공항에서 일어난 제주항공 비행기 사고로 181명의 탑승자 중 179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로 구급차 200대가 들어왔었어요. 그런데 거의 다 빈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대신 임시 안치소가 급하게 꾸려졌습니다."

무안공항 사고 현장에서 만난 차운(57) 경감은 당시를 회고하며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29일 오전 9시경, 무안국제공항에 승객 등 181명을 태운 제주항공 7C2216편 여객기가 동체착륙 중 활주로 외벽에 충돌한 뒤 화재가 발생해 179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는 1997년 228명의 사망자가 나온 대한항공 801편 괌 추락 사고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다.

참사 현장을 수습하며 고인이 된 희생자들의 마지막 길을 지킨 이들이 있다.

수습 작업에 투입된 전국 시도경찰청 소속 과학수사관들(KCSI)의 이야기다. BBC 코리아는 사고 수습 후로는 최초로 사고 현장에 다녀왔다. 그리고 KCSI 대원들을 통해 12.29 참사 당시 상황을 살펴봤다.

'처음엔 희망도 가졌었는데...'

차 운 경감은 사고 현장 투입 대원 중에서도 최일선에 섰던 전남경찰청 과학수사대 과학수사관이다.

엄청난 기름 냄새와 뿌연 연기 그리고 처참하게 부서진 비행기.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먼저 그 속을 헤집고 소방대원과 구급대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운동장 3분의 2 정도 되는 공간에 대형 텐트를 여러 개를 쳤어요. 그곳에 계속해서 시체낭이 쌓이더라고요. 그래도 혹시나 숨이 붙어 있는 분이 안 계실까 생각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희망을 품을 그런 형편이 안 됐어요."

제주항공 사고 당시 시신수습, 현장 감식 등을 수행한 전남경찰청 과학수사대 소속 차 운 경감(왼쪽)과 김경희 검시 조사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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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공 사고 당시 시신수습, 현장 감식 등을 수행한 전남경찰청 과학수사대 소속 차 운 경감(왼쪽)과 김경희 검시 조사관(오른쪽)

사고 두 달이 지났지만 현장은 여전히 그 충격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사고 비행기가 부딪쳤던 로컬라이저(비행기 착륙을 돕는 장치. 방위각 시설로도 불린다)는 부서지고 휘어진 채였다. 일부는 탄 흔적이 역력했다.

콘크리트 둔덕 잔해는 사고 현장 옆에 쌓여 있었다. 무너져 내린 공항 외벽과 힘없이 구부러진 철근은 당시 울렸을 굉음과 폭발음을 예측게 했다. 중간중간 새들을 쫓는 가짜 새소리가 텅 빈 창공을 날카롭게 가를 뿐이었다.

시신 역시 온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수습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폭발과 화재로 비행기 좌석이 공항 외부 200~300m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을 정도로 시신과 유류품 수색 범위도 넓었다.

초반엔 신원 확인에만 몇 주가 걸릴 거란 우려도 흘러나왔다.

"엄청 큰 충격으로 비행기가 내려와서 땅 아래까지 시신과 유류품이 나왔어요. 옆에 이 갈대밭을 모두 베서 땅을 파야 했습니다. 지금 아직 사고 조사 중이지만 당시는 더 처참했죠"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소방관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대로 급히 구역을 나누고 번호를 붙였다. 사고 난 후 2시간 여만인 오전 11시에 시작된 이 1차 수습 작업은 그다음 날 오전 6시 반이 되자 끝이 보였다.

"돌아가신 분들을 모시고 오는 대로 지문을 찍고 번호를 부여하고, 또 지문 인식이 어려운 분은 혈흔을 면봉으로 찍어 유전자를 채취하는 작업이 제일 먼저 시작됐습니다. 이분들의 소지품이나 신체적인 특징도 택에 기록하는 작업이 이뤄졌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뒤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을 임시로 공항 격납고 안치소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공항 활주로 옆에는 급히 10개의 냉동 컨테이너가 설치됐다.

 사고 항공기가 부딪혔던 콘크리트 둔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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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난지 두 달여가 됐던 시점에도 현장은 아픔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사고 항공기가 부딪혔던 콘크리트 둔덕

이후 과정은 '시신 조각'의 주인을 찾는 일이었다. DNA 검사 결과가 나오면 해당되는 번호의 낭에 넣어 신체 부위를 맞춰나갔다.

3년 차 김경희(43) 검시 조사관은 희생자 전원의 시신 조각이 제대로 모아졌는지 살피고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는 업무를 맡았다. 사후 변성을 막기 위해 공간은 낮은 온도로 채워졌다.

김 조사관과 함께 임시 안치소로 사용했던 컨테이너에 들어서자 "밖에서 들려오던 (유족들의) 오열과 비명, 그 잔영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시신을 하나하나 수습하면서 가족 단위의 승객들이 많았다는 점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찾아올 유족들을 위해 가족 단위로 분류해 고인이 된 분들을 모셨다.

임시 시신안치소가 됐었던 컨테이너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김경희 검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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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시신안치소가 됐었던 컨테이너를 다시 찾은 김경희 검시관

특히 자신의 자녀와 비슷한 연령의 어린아이 시신을 봤을 때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그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너무 어린아이들도 봤을 때 그 상황에선 순간 말을 잃었어요. 어쩌지… 내가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요"

전국 각지에서 지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전남경찰청을 비롯한 전국 시도경찰청 소속 과학수사관들이 합류해 총 373명이 투입됐다.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라는 초기 예상을 깨고 신원 확인 작업은 불과 68시간 만에 완료됐다.

흩어져버린 이들의 유류물을 수거하는 것도 이들 요원들의 일이었다. 캐리어, 옷, 신발, 여권, 신분증부터 고가의 시계까지.

1100여 개의 유류물이 수거됐다. 이 가운데 500여 개는 유가족에게 전달됐고, 훼손 상태가 심한 372개는 소각됐다.

당국이 보관하던 유류품 228점은 지난날 말, 전남 담양군 한 추모관에 안치됐다.

차 경감은 땅 깊은 곳에서 나왔던 신분증을 떠올렸다.

"가장 마지막에 우리가 발굴한 것이 스튜어디스 신분증이었어요. 그분이 자랑스럽게 차고 다녔을 것 같은 그런 신분증을 보면서 가슴이 또 무너지더라고요."

유족과 함께 울던 시간

하지만 이들에겐 가장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 남아있었다. 유족에게 시신을 확인시켜 주고 인계하는 작업이었다.

차 경감은 "맨정신으로 시작이 안 되고 눈물부터 흘리고 시작이 됐다"고 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광주나 전남 분들이었어요.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이고 남이라는 생각이 안 드니까 먼저 눈물이 나가지고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가족 같아서요"

시신을 최대한 복원하려고 애썼지만, 훼손이 워낙 컸던 탓에 유가족이 받을 충격이 걱정 됐다.

"(가족의 시신을 확인하기 전에) 평소에 보셨던 모습하고 다를 수 있으니까 그걸 염두에 두시고 봐달라고 부탁했어요. 유족분들 중에서는 차마 직접 보시지 못한다고 대신 설명을 해달라고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과학수사대원들은 유족에게 시신을 확인시켜 주고 인계하는 작업이 눈물 없이는 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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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대원들은 유족에게 시신을 확인시켜 주고 인계하는 작업이 눈물 없이는 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실제로 가족의 시신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얼굴 손상이 심하거나 각종 골절로 신체 형태가 달라져 생존했을 때 모습과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시신 인계를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왔다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입고 있었던 옷이나 소지품을 비롯해 지문과 DNA 검사도 모두 했는데 믿지 못하는 분도 계셨어요. 유가족들이 긴 회의 끝에 겨우 모시고 가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차 경감은 유가족들을 통해 희생자들의 삶이 하나하나 읽혔다고 설명했다.

'이제 고생해 가지고 먹고살 만하게 직장에 들어갔는데 네가 이렇게 되다니…' 한 제주항공 직원 희생자의 어머니는 먼저 하늘의 별이 된 아들 앞에서 하며 눈물을 쏟았다. 30대, 청춘이었다.

'죽을 때까지 왜 속을 썩이니' 하며 원망 어린 슬픔을 토해내는 유족도 있었다. 차 경감은 그에게 '가장 처절하게' 들려왔던 말이라고 했다. '형님 못 사신 몫까지 제가 열심히 살겠습니다'하는 흐느낌 속 다짐도 들려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망자분들께서 그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어떤 흔적을 남기셨는지, 얼마나 열심히 살아오셨는지가 어렴풋이나마 느껴지더라고요."

김 검시관은 유족 가운데서도 특히 혼자 남겨진 이들을 걱정했다.

"다른 가족 분들이 모두 돌아가셔서 혼자 남겨지신 분들이 있었어요. 이제 희생자 분들의 죽음도 너무 안타깝지만 그 혼자 되신 유족들은 어디 가서, 또 누구에게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그런 분들이 마음에 좀 많이 좀 걸려요."

과학수사대 요원들은 정신없고 황망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기억해 준 유가족들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고 한다.

수색이 마무리됐던 지난 1월 5일, 박한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브리핑을 열었다.

이날 전체 희생자 179명 중 146명의 인도가 이뤄졌다. 그리고 사고 발생 9일 만에 희생자 179명 전원이 유족에게 인도됐다.

박 대표와 유족들은 "시신 인도 절차가 급속도로 빠르게 이뤄져서 유족들이 위로를 받고 돌아갔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고 수습 이후 현장에 도착해 묵념을 하는 차운 경감과 김경희 검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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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수습 이후 현장에 도착해 묵념을 하는 차운 경감과 김경희 검시관

'참사 겪으며 생명의 무게감 다시금 느껴'

공항 1층 분향소에는 국화꽃이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서 고요히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무안공항에는 유가족들이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있다.

김 조사관은 자신이 수습했던 희생자 분들의 영면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한분 한분 수습을 하면서 그 죽음이 너무 안타까워서 진심으로 '좋은 곳에서 진짜 편히 쉬세요'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유가족에겐 "감히 위로를 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부디 정말 힘내시길 바란다"고 했다.

세월호, 장성 효사랑 병원 사건 등의 참사 현장도 지켰던 차 경감은 "다 너무 안타까운 사건들이었다"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는 "과학수사 요원들의 직업병 중에 하나는 항상 죽음을 거의 매일 대하기 때문에 죽음에 별다른 감정을 넣지 않고 가볍게 보는 것"이라며 "그런데 이런 참사들을 겪으면서 생명의 무게감을 그만큼의 무거운 죽음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라며 다시금 눈시울을 붉혔다.

"다시는, 정말 절대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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