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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금서' 논란...과도한 검열인가 부적절 도서인가

2024.06.20
성평등 도서 차별 금지 시위
무지개독서회
지난 1일 서울도서관 앞에서는 '성평등 도서 읽기' 공동행동이 진행됐다

“자라다 보면 어떤 남자아이들은 다른 남자를, 어떤 여자아이들은 다른 여자를 좋아하기도 해요. 고민하지 마세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외계인 소녀, 원시인 소년'은 소위 ‘금서’로 지정된 도서다.

지난 1일 오전 서울도서관 앞에서는 ‘성평등 도서 읽기’ 공동행동이 진행됐다. 무지갯빛으로 물든 광장에 참여자들이 금서 한 권씩을 들고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검열은 혐오와 차별에서 시작됩니다. 검열하는 책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이야기 나눠 혐오와 차별에 맞서려 합니다. 도서관 전쟁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혐오와 차별에 맞서려 합니다.”

‘성평등 도서는 도서관으로, 차별과 혐오는 지옥으로’라 쓰인 플래카드를 든 참여자들은 한목소리로 다양성이 교류하는 도서관을 만들자고 외쳤다.

지난 몇 년간 ‘성교육·성평등 도서’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시작은 2019년 시작된 여성가족부 주관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이었다. 성평등 어린이·청소년 책을 선정해 추천 및 보급하는 것이 취지였다.

그러나 2020년 여가부는 ‘나다움 어린이책’으로 지정했던 도서 7종을 회수했다.

일부 학부모단체와 시민단체가 “동성애, 성전환, 조기성애화, 낙태 등을 정당화하거나 이를 반대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도서는 마땅히 폐기 처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역 공공도서관에 ‘문제 도서들’을 폐기 처분해달라고 요청하고 나선 것이 발단이다.

일부 지역 정치권도 이에 가세했다. 2023년 7월 김태흠 충남지사는 “7종 도서를 살펴봤는데 낯뜨거운 표현이 대부분으로 교육 목적으로 보기 어렵다”며 “도내 36개 도서관에서 해당 도서 열람을 제한했다”고 말했다.

성평등 도서 퇴출에 반대하는 일부 인권단체는 “도서관이 특정 이념만을 정답으로 인정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금서'는?

퀴어행사에 반대하는 학부모연합
NEWS1
일부 학부모 단체들은 '금서'가 미성숙한 아이들의 성적 충동을 자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식적인 금서'는 없다. 여가부의 ‘나다움 어린이책’ 목록에서 비롯됐으나,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반대하는 일부 학부모단체 및 보수 성향 시민단체들은 각자의 기준에 따라 서로 다른 ‘금서 리스트’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일례로 시민단체 ‘꿈키움성장연구소’는 지난해 충남 지역 공공도서관에 “다양성, 사회문화적 성, 성인지 등을 근거로 동성애, 조기성애화, 낙태 등을 정당화하거나 이를 반대하지 못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도서는 마땅히 폐기처분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서관에 비치돼 있다”며 해당 도서를 폐기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전국학부모연합' 소속 단체들에서 활동한다는 학부모 일부는 '위안부' 피해 여성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그림책 '꽃할머니' 등을 포함한 117종 도서를 유해도서로 지정해 도서관에 폐기를 요청한 바 있다.

다음세대를위한학부모연합(이하 ‘다학연’)에서 2023년 배포한 ‘우리아이 도서관에서 살아남게 하기’ 안내 책자를 보면 성평등 도서를 금지하는 단체들의 대략적인 ‘금서 기준’을 파악할 수 있다.

단체는 남녀의 자위행위나 성관계 등을 묘사한 '사춘기 내 몸 사용 설명서', '아름다운 탄생: 아이와 사랑' 등의 도서가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 및 성적 충동을 과도하게 극대화한다고 주장한다.

다학연 조우경 대표는 BBC코리아에 “몸은 20세가 되어야 성장하고, 뇌의 전두엽은 30세가 되어야 완성된다”며 “아직 올바른 판단이 어려운 미성숙한 아이들에게 성 지식으로 가득한 그림과 내용들이 성적 욕망과 충동을 크게 자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단체는 ‘남자아이를 위한 8가지 강간 예방법’ 등이 기술되어 있는 '어린이를 위한 페미니즘' 등의 도서는 '남자는 가해자, 여자는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남녀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성역할을 받아들일지 말지도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쓰인 '생각이 크는 인문학 – 성평등'도 해당 단체가 주장하는 ‘금서’다. 성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가족의 개념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조 대표는 “우리나라 헌법 36조 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돼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고 명시돼 있다”며 “혼인을 비롯한 가족생활이 남녀 양성평등을 기초로 성립돼야 한다는 건데, 이 도서들이 정의하는 ‘젠더 이퀄리티’는 수십 가지의 성이 있으며, 내가 인지하고 원하는 성으로 바꿀 수 있고, 그 성을 모두 인정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희는 성소수자를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성교육은 생명을 대하는 태도를 함양시켜주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몸 위주의 지식 교육 방향이 잘못된단 겁니다. 이미 성애화된 아이들은 교사 지도하에 성교육이 필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정말 필요할 때, 올바른 성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을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금서? 영광으로 생각해'

윤은주 작가의 '소녀와 소년: 멋진 사람이 되는 법'은 일부 단체가 지정한 ‘금서’다.

윤 작가는 BBC코리아에 “굉장히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일 뿐인데, 금서로 지정됐다니 농담처럼 ‘영광이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윤 작가의 책은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의 전통적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나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이 원래 그런 것이지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명시한다.

윤 작가는 “이 점이 소위 ‘금서’로 지정된 이유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 책을 안 읽어보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읽어보셨다면 반대를 안 했을 것 같은데… (책에서는)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제가 20대 초반일 때가 대학가에 성평등 운동이 한창 태동할 때였어요. 그때 우리나라도 금방 페미니즘의 수준이 올라가겠다고 생각했는데, 4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위해 이런 책을 쓰고 있단 사실이 한편으로는 서글프더라고요.”

윤 작가는 학령기 자녀를 둔 학부모기도 하다. 그는 2023년 말 충남에서 열린 한 비공개 학부모 간담회에 참석해 성평등 도서에 반대하는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당연히 걱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교육에 대해서 모르면요. 옛날 성교육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영상, 태아의 모습 보여주기 등에 그쳤어요. 그렇지만 그 이후에 성교육이 구체적으로 바뀌었죠. 성교육이 불모지였던 나라에서 자라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그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자꾸 판단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는 또 “책을 갖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요즘 아이들은 책을 잘 안 봐요. 실질적으로 아이들이 만나고 있는 건 강렬한 영상이죠. 그렇다면 책의 역할은 성교육인 겁니다. 이상한 영상을 보고 성에 대해 왜곡된 성의식을 가진 아이들로 자랄까봐 실시하는 게 성교육인데,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겠어요? 어릴 때부터 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성교라는 것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걸 직면해야 되거든요. 그게 성교육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는 ‘포괄적 성교육’입니다.”

'금서'를 통해 희망을 보는 아이들

성평등 도서 별별 교사들
무지개독서회
대부분 청소년 초기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청소년개발원의 ‘청소년 성소수자의 생활실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이 성 정체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평균 연령은 13.8세다. 대부분 청소년 초기에 인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소수자 교사 모임 QTQ 소속 회원 유랑은 BBC코리아에 “나 또한 청소년 시기를 지나온 성인으로서 청소년 시기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면 혼란스럽기도 하고, 혹은 부정하기도 하면서 힘들고 아파해요. 어떤 학생들의 경우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사실 외부에 드러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단 말이죠.”

그는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까 생각했을 때 도서관에서 성평등 책들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 막막하고 답답하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현재 ‘금서’로 지정된 도서 중 하나인 '별별 교사들'을 예로 들며,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고민 중 하나가 ‘좋은 직업을 갖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인데, 성소수자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으며 ‘성소수자도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구나’라는 부분에서 희망을 가지게 된 아이들도 봤다”고 말했다.

“’금서’로 불리는 책들은 다양한 삶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성소수자 아이들이) 이런 것들을 보며 본인이 겪은 혼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산지부 장병순 여성위원장은 초등학교에서 성교육을 가르치는 교사다. BBC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수업을 해보면 학생들은 이미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성적 정보에 노출돼 있다”고 전했다.

“사실상 수업을 해보면 자신들이 온라인에서 듣고 본 것들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교과서나 성교육 표준안, 그 어디에도 그것을 해결해 줄 만한 성교육 자료가 조성되어 있지 않아요.”

그는 학생들이 “오히려 어릴수록 자신의 몸과 어른의 몸, 장애가 있는 몸 등 다양한 형태의 몸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며 “어른의 시각으로 봤을 때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이지, 사실 이런 것들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다 알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더 건강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단체에서 주장하는 성평등 도서의 성적 충동 유발 가능성에 대해 장 위원장은 “오히려 이러한 책을 통해 성적 충동을 비롯한 욕구를 건강하게 해결하고 처리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서'는 어디로 가나

금서 분리 요청 공문
장병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장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는 도서관에 '금서'를 아이들로부터 분리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해왔다

2020년부터 학부모 단체를 포함한 시민단체는 ‘금서 목록’을 제작해 지역 공공도서관이나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폐기 처분할 것을 꾸준히 요청해왔다.

실제로 지난 10월 부산에 위치한 초등학교에는 민간단체인 ‘보건학문&인권연구소’의 민원 공문이 발송됐다. 불필요한 성적 호기심과 왜곡된 성인식을 심어주는 청소년 유해 도서 148권을 분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세종특별자치시 세종시립도서관 관계자는 BBC코리아에 한 시민단체에서 “성교육 관련 도서관 보유 자료에 대한 시정 요청이 있었다”며 “그에 따라 150건 정도 되는 목록 중 (우리 도서관의) 소장 도서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을 했었다”고 전했다.

“문제 제기 목록에는 국내외 수상작, 우수 추천 도서 등이 다수 포함돼 있는 상황이었고, 청소년 유해 간행물 목록에도 포함되지 않은 자료들이었습니다. 사실 성교육의 일부는 인권에 관한 광범위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부분이었죠.”

그 결과, 성평등 도서 목록 중 자료 대출 이력이 한 건도 없었던 7종의 도서는 보존서고로 이동, 사서들의 논의 하에 ‘어린이들이 읽기에 삽화나 내용이 과한 듯 보이는 도서’ 16종은 일반 자료실로 이동, 그리고 그 외 도서들은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일부 성평등 도서에 대한 접근 제한을 실시한 것에 대해 충청남도 관계자는 “현재 10종의 도서가 자세한 성적 묘사 등의 이유로 공공도서관 내에서 별도 서가로 이동되어 이용자가 따로 요청할 시 열람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둔 상황”이라고 전했다.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한 어린이 도서관은 “구청 등에서 도서관별로 어떤 특정한 문제 도서가 있다면 폐기하거나 일부 제한시키라는 식의 지침이 오기도 한다”며 “그런 도서들 중 과도하게 선정적이거나 구체적인 묘사가 들어갔다고 판단된 도서들을 폐기 및 검색 제외를 건 적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 청소년 유해간행물 심의는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위’)가 담당하고 있다. 실제로 도서관 등에 비치되어 있는 성평등 도서 100여 종에 대해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심의를 거친 결과, 심의 대상 도서가 아니라는 판단이 나오기도 했다.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지정된 도서도 있다. 간윤위는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는 남녀의 성기나 성행위, 동성애 등 성 지식을 사실적으로 설명한 부분에서 유해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2020년 한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한 성평등 전문가 차베즈 페레즈가 집필한 도서로, 스웨덴에서 최우수 청소년 도서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영국, 핀란드 등 15개국에 출간돼 호평을 받기도 했다.

심의 대상 도서는 아니지만 ‘금서’로 대표되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덴마크의 교사이자 심리치료사, 성 연구가가 쓴 도서다.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우리 가족 인권선언' 등은 아동문학작품 작가상 수상, 국제엠네스티 추천도서 선정 등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 ‘금서’들이다.

'금서 작가' 윤은주 씨는 “내 책이 곧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책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제 책을 포함한 이러한 (성평등) 책들을 위험한 책,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면 안 되는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굉장히 슬픕니다. 작가로서 어떤 면에선 책이 오랫동안 팔리면 좋겠지만, 제 책 정도는 이제 몇 년 안에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책이 되면 더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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