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운 빵을 껴안고 잠들었다'... 조지아 구금 근로자 BBC 인터뷰서 증언

미국 이민 당국의 대규모 단속으로 구금됐던 300여 명의 한국인 직원들이 귀국 후 증언에 나서면서, 절차상 인권침해 등의 문제가 있었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해 체포됐던 한국인 300여 명은 구금된 지 일주일이 지나 귀국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당시의 기억은 아직 떨쳐내지 못한 악몽과도 같은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도 구금 당시 인권침해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힌 가운데, BBC는 구금됐던 한국인 직원 세 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들었다. 기사에는 개인정보 보호 요청에 따라 모두 가명을 사용했다.
'붉은 레이저 나오는 총구…가슴 겨누기도'
4일 오전, 직원들은 창밖으로 총을 든 요원들과 헬리콥터와 군용 차량 등을 목격했다. 이는 ICE가 공개한 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BBC와 인터뷰한 직원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체포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철용 씨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자가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일부 요원들은 총구를 그들의 가슴에 겨눴다"라고 회상했다.
"총구에서 붉은 레이저가 나오는 걸 본 적 있나요? 너무 충격적이라 일부 직원들은 공포에 몸을 떨기도 했습니다."
설비 유지 업무를 위해 파견된 민석 씨는 회사가 일괄 신청한 B-1(단기상용) 비자로 생애 첫 미국 출장을 왔다.
"(ICE에서 요구한) 서류를 작성하고 비자를 보여주면 그냥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갑자기 소지품을 다 가져가고, 수갑 같은 걸 채워서 가니까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그런 상황이었죠."
ESTA(무비자 전자여행허가)로 미국에 입국했다는 엔지니어 영진 씨는 현지 직원들과 미팅을 갖거나 회의실에서 설비 관련 트레이닝을 진행하는 일을 했으며, 이는 허용 범위 내 업무라고 주장했다.
이번에 구금됐던 300여 명의 한국인 근로자들은 주로 B-1 비자나 ESTA로 미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일각에서는 국내 기업이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B-1 비자와 ESTA를 허용 범위 외 업무에도 관행처럼 활용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미 국무부 안내에 따르면 ESTA는 단기 비즈니스 목적으로, B-1 비자는 특정 조건을 만족할 경우 미국 외 국가에서 구매한 장비를 설치 및 관리하거나 현지 직원들에게 해당 사용법을 가르치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내 기관에 따라 업무 범위 해석 및 집행이 다소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민석 씨는 이민 당국이 잘잘못을 따질 수는 있지만, 직원들 각자의 업무 범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일단 가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데운 빵을 껴안고 잠들었다'
민석 씨는 70여 명이 한 방에 있다가 구금 후 사흘쯤 지나 2인실로 옮겨갔다. 영사 접견이 이뤄진 것도 그때쯤이라고 했다.
"(시설에) 시계가 없어서 날짜 개념이 정확하진 않은데…한 사흘 정도는 바깥이랑 소통도 못 하고 제대로 된 소식을 듣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철용 씨는 자신이 구금된 방에는 80명 정도가 있었고, 들어갔을 때는 이미 모든 침대에 사람들이 누워있었기 때문에 책상 위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고 밝혔다.
"(수감 시설이) 정말 추웠어요. 포장된 빵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뜻하게 한 다음 껴안고 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영진 씨도 "패닉(공황상태)이 와서 몸을 떨면서 있었다"라며 "(구금) 둘째 날까지 모포를 주지 않아 샤워타올을 두르고 잤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식수 문제였다고 했다. 물에서 "하수구 냄새"가 나서 "정말 목마를 때만, 최소한으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미 이민 당국은 처음에 해당 근로자들이 유효하지 않은 비자로 불법 체류 중이라고 주장했으나, 결국 한미 양측은 그들이 나중에 다시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어떠한 처벌 없이 자진 출국을 허용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영진 씨는 귀국 후에도 장시간 외출이 어렵다며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가끔씩 밖에 나가더라도 (미국에서 구금됐던) 교도소 냄새가 비슷한 게 나면 좀 많이 떨리고 그럴 때가 많다"라며 "가끔 가다가 호흡이 좀 과해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전례 없는 이번 사태의 결과는
이번 대규모 구금 사태가 한미 간 전례 없었던 일인 만큼, 이번 사태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이목이 쏠린다.
한국 외교부는 지난 14일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이 서울에서 열린 한미 외교차관 회담에서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재계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오랜 골칫거리였던 미국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트럼프 정부 들어 대미 투자를 늘리는 시점에서 비자 문제 해결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민석 씨도 미 이민 당국의 체포 과정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비자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BBC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혔다.
"우리 같은 제조·설비 수출 업체의 경우 (인력을) 현지인들로 대체하기 힘들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걸리는 거 없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비자나 정부 간 협의 같은 게 좀 마련이 됐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번 사태는 한국이 미국에 3500억달러(약 483조원)를 투자하기로 약속한 무역 협정 직후에 발생한 일로 매우 긴밀한 동맹국인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흔들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진 씨는 국가 차원에서는 대미 투자를 지속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이번 일로 미국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졌다"라고 밝혔다.
이번 인터뷰와 국내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일부 구금 당사자들과 관련 회사는 법적 조치 등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 취재: 이호수, 최리현
영상: 이호수, 편집: 이선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