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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상캐스터라도 정규직 전환을…' 오요안나 1주기, 유족의 바람

1시간 전

"그날 아이 얼굴을 보는데, 너무 편히 자고 있는 모습이었어요. 네가 그렇게 잠을 자고 쉬고 싶어 했는데, 이제 영원히 쉬고 영원히 자게 됐구나…"

오요안나 MBC 기상캐스터의 어머니 장연미 씨는 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떠올렸다.

오 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지만, BBC가 방문한 장 씨의 자택 한 켠에는 딸의 유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가 사준 구두, 방송에 입고 나갔던 원피스, 공부 노트.

장 씨는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휴대폰 속 녹음 파일과 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안나가 이렇게 자료를 많이 남기고 간 건, 그냥 죽지 않겠다는 뜻이잖아요."

지난해 9월 사망한 오요안나 MBC 기상캐스터의 유서로 추정되는 문서와 녹취록 일부가 올해 초 공개되며 파장이 일었다. 그 안에는 직장에서 겪은 일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었다.

장 씨는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으로 "직장 내 괴롭힘"과 그런 환경을 조장하고, 방치한 "방송계 프리랜서 시스템"을 지목했다.

오요안나 어머니 장연미 씨가 딸이 생전에 입은 원피스를 들고 있다.
BBC
"다른 옷들은 다 태웠는데, 이상하게 일하는 옷은 쉽게 안버려져요. 이걸로 먹고 살겠다고 한 아이라..."

지난 1년간 무엇이 바뀌었나?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어머니 장연미 씨가 'MBC는 오요안나 기상캐스터 문제 해결하라'는 팻말을 들고 MBC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그의 뒤에는 분향소가 차려져 있다.
BBC
오 씨의 어머니는 15일 기준 단식 농성 8일째를 이어가고 있으며, MBC의 답변이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장연미 씨는 "무늬만 프리랜서"로 일해온 딸의 근로자 인정을 요구하고, 방송계 프리랜서 고용 구조의 개선을 촉구하며 지난 8일부터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는 오요안나 씨의 사망과 관련해 MBC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뒤 "괴롭힘은 사실이지만, 오 씨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다"며 '직장 내 괴롭힘'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오 씨가 구체적 지휘나 감독 없이 상당한 재량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업무했으며, 정해진 출퇴근이나 휴가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오 씨를 근로자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은 "고용노동부가 피해자 보호는 포기하고, 가해 기업인 MBC에 면죄부만 준 결과로 끝났다"며 "괴롭힘은 인정하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건 사실상 가해를 방조하고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윤지영 직장갑질119 대표도 고용노동부의 판단에 대해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사적 갈등이 아닌 '업무상 괴롭힘'이며, 그 책임에서 MBC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인권 전문 변호사인 윤 대표는 "근로자성 판단의 핵심은 '사용종속성'이라며, 오 씨는 과학기상팀 기상재난파트에 속한 공채 기상캐스터고 MBC가 정한 시간과 방식에 따라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등 전형적인 근로자의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BBC의 질의에 고용노동부는 "근로자 불인정에 대한 재심이나 추가 조사는 사실상 어렵다"며 기존 판단을 번복할 계획이 없음을 시사했다.

다만 방송 프리랜서 처우 개선과 관련해 "근로자 추정제(노동자가 '근로자성'을 스스로 입증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근로자로 간주하고, 회사 측이 반증하는 제도) 도입이나 프리랜서 대상 괴롭힘 보호 확대 등은 정책적으로 검토 중인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유족 측은 오 씨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제도적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토로한다.

장 씨는 "MBC는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고, 자체적으로 진행한 진상조사위원회 결과도 공개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밝혔다.

BBC는 이번 사안과 관련해 MBC에 재차 입장을 요청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MBC 건물 앞 오요안나 분향소
BBC
지난 5월 고용노동부 '오 씨 직장 내 괴롭 사건'에 대한 특별근로감독 결과, MBC 보도·시사교양국 소속 프리랜서 35명 중 FD, AD, 취재 PD 등 25명은 근로자성이 인정됐다

'출산 이틀 전까지 방송… 그리고 일주일 만에 복귀'

방송 현장에서 일하는 다른 프리랜서, 근로자들도 오 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BBC에 밝혔다.

특히 여성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로 일해온 이들은 불안정한 고용 구조 속에서 출산과 육아, 외모 평가, 조직 내 괴롭힘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왔다고 주장했다.

윤 변호사는 해고되지 않기 위해 "출산 이틀 전까지 방송을 하고, 아이를 낳고 1주일 만에 다시 방송에 나왔다"는 프리랜서 기상캐스터 A씨의 증언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은 법적으로 '근로자'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프리랜서 여성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들은 임신·출산을 이유로 방송에서 배제되거나 계약이 종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설명했다.

"젊은 여성들을 잠깐 쓰고 버리기 위해 프리랜서로 고용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입니다. 법에 따라 정년을 보장해야 하니까, 아예 정규직으로 뽑지 않는 거죠."

실제로 이러한 관행은 과거 2020년 '대전MBC 유지은 아나운서' 사건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당시 유 씨는 여성 아나운서만 프리랜서로 뽑고 남성은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차별 구조를 문제 삼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고, 인권위는 이를 '성차별'로 인정했다.

또 2022년에도 출산을 이유로 방송 복귀가 가로막힌 프리랜서 아나운서 사례가 인권위에 제기돼 평등권 침해로 판단된 바 있다.

고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영정 사진
BBC
오 씨의 어머니는 딸의 죽음이 다른 방송계 프리랜서 동료들을 위한 변화의 시작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은 방송계 구조 속에서 경쟁과 긴장이 일상화돼 있다고 지적한다.

4년 차 프리랜서 아나운서 B씨는 "선배도 프리랜서고 나도 프리랜서면, 각자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경쟁 속에서 건강하지 못한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치마를 입었다고 뭐라 한다든지, 주말에 놀러 가야 하니 대타로 방송하라는 식으로 후배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요청이 아닌 통보에 가까운 말투로 거절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많았다는 것.

그에 따르면 더 큰 문제는 선배가 방송 기회를 쥐고 있는 위치였다는 점이다.

"방송 진출을 위한 교육과 인사 관리를 모두 한 선배가 담당했어요. 어찌보면 평가자의 입장이었던 거죠. 겉으로 보면 배려와 지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권력 불균형 속에서 선택권을 빼앗긴 구조였습니다."

이 같은 위계적 분위기는 또 다른 7년 차 프리랜서 아나운서 C씨의 경험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방송 외 다른 일을 병행하는데 단체 채팅방에 일정을 명시하라고 하거나, 프리랜서로서 개인의 방송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면서도 원고를 모두 검사당하며 특정 사건이나 작은 실수가 과장되어 지적받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선후배간의 질투, 시기, 괴롭힘으로만 끝나서는 안되며, 문제의 근원에는 방송계 프리랜서 고용의 구조적 문제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높은 지원율과 경쟁률을 기록하는 인기 직종 특성상 이러한 구조를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공중파 방송사 기상캐스터 공채는 해마다 수백 대 일, 때로는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한다.

가장 시급한 제도적 처방은?

고 오요안나 기상캐스터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
오요안나 유튜브
오 씨의 유족은 MBC를 상대로는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다.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데 "노동자의 실질은 있지만, 뒷받침할 출퇴근 기록 등 모든 증거를 MBC가 (유족에게) 제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래를 그려나갈 현재의 원동력이 부족합니다. 언제 이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지, 계약이 연장이 안되는 것은 아닐지 늘 두려움에 떨며 방송을 해야합니다."

아나운서 C씨는 프리랜서 계약 구조의 불안정성에 대해 호소한다. 그는 "형식상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일 뿐이기 때문에 회사는 어떠한 해고 절차도 거치지 않아도 된다"며 "(아나운서들은) 해고 회피 노력, 예고, 서면 통보 등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에서도 배제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구조적 불안정성은 방송 현장의 또 다른 프리랜서에게도 동일하게 지적됐다. 아나운서 B씨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계약 구조의 개선'을 꼽았다.

"사실상 '위장 프리랜서'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요. 실질적으로는 상시 근무에 가까운데도, 4대 보험도 없고 근로시간이나 휴식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B씨는 '특수고용직 방송인 보호법' 제정이나 프리랜서 표준계약서의 의무화를 통해 최소한의 권리를 명시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오요안나 씨의 사망 이후, 방송 프리랜서를 포함한 '법 밖의 노동자'들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중심으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2025년 7월 7일 기준, 해당 내용을 포함한 개정안만 13건에 달한다.

특히 김소희 의원을 비롯한 41명의 국회의원은 아예 별도의 특별법 형태로 '일터에서의 괴롭힘 예방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을 지난 5월 발의했다. 이 법안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의 적용 대상을 확대해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직 등 기존 법의 보호 밖에 있는 노동자들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오 씨의 죽음은 기존 방송계 프리랜서 고용 제도의 사각지대를 드러내며, 오랜 기간 지체됐던 입법 논의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관련 법안 중 어떤 것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윤지영 변호사는 "적용 대상을 어디까지 확대할지 노사 간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도 피해자일 수도'

오요안나가 그린 자화상 속 그는 한쪽 얼굴에는 화장을 했고, 다른 한쪽은 공허하게 남겨 두었다.
BBC
고 오요안나 씨가 사망 약 한 달 전 그린 초상화. 오 씨의 어머니는 딸이 생전 선배에게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을 앓았다고 밝혔다

오요안나 씨의 어머니 장 씨는 가해자로 거론돼 논란이 됐음에도 MBC와 재계약을 맺고 현재 방송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아나운서들에 대해 오히려 "정규직 전환을 통해 안정적인 고용 환경을 보장해달라"고 MBC에 요청한 상태다.

"그들도 요안나가 죽은 거에 대해서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아요. 어쩌면 그들 역시 피해자일 수 있어요. 그 문화 속에서 똑같이 당했고, 그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을 거예요."

방송 및 미디어 비정규직·프리랜서 노동인권 단체 '엔딩크레딧'의 진재연 집행위원장도 "이번 사건은 불안정한 노동 구조가 어떻게 경쟁과 고립을 낳는지를 보여준다"며 "모두가 프리랜서였기에 입지를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내몰렸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오 씨의 유족은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된 기상캐스터 D씨를 상대로만 민사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D씨는 재판 과정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유족은 "D씨를 향한 소송은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지렛대일 뿐"이라며 "직장 내 괴롭힘과 제도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BBC에 설명했다.

"복수하자는 게 아닙니다. 프리랜서를 소모품처럼 쓰는 구조, 을끼리 싸우는 구조를 바꾸자는 겁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아요. 제도가 바뀌어야 해요."

한편 MBC는 오 씨 유족의 '기상캐스터 정규직 전환'에 대한 요청에 대해 반영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지난달 28일 유족에게 밝혔다.

오 씨의 어머니는 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생명을 건 외침을 이어가고 있다.

"저는 오요안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방송 미디어 산업의 수많은 청년들이 우리 요안나처럼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요안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결국 법을 바꿔서 (기상캐스터 동료들로부터) 우리가 이제 편안하고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제2의 오요안나는 없어야죠."

기획·취재: 문준아

취재·영상: 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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