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 체포...'마약과의 전쟁' ICC 영장 집행

'마약과의 전쟁'과 관련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 대해 발부한 체포 영장을 필리핀 경찰이 11일 집행했다.
두테르테(79) 전 대통령은 홍콩 방문 뒤 마닐라 공항을 통해 귀국한 직후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두테르테는 2016~2022년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및 그 이전 다바오시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신의 잔혹한 마약 단속 정책에 대해 한 번도 공개적으로 사과한 바 없다.
이번에도 체포 뒤 영장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며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냐"고 반문했다.
두테르테 대통령 재임 당시 대변인이었던 살바도르 파넬로는 필리핀은 2019년 이미 ICC에서 탈퇴했기에 이는 "불법" 체포라고 비난했다.
앞서 ICC는 필리핀이 회원국에서 탈퇴하기 전에 행해진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관할권이 유효하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필리핀 인권 국제 연합(ICHRP)'은 이번 체포가 마약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과 그 유가족들에게는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환영했다.
피터 머피 ICHRP 회장은 "도덕적 우주의 호는 길지만, 오늘 그 호는 정의를 향해 기울어졌다. 두테르테의 체포는 그의 잔인한 통치 및 그 기간에 벌어진 대량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두테르테는 오는 5월 12일로 예정된 필리핀 중간선거 활동을 위해 홍콩에 머무르며 다바오시 시장 선거 출마를 구상하고 있었다.
현지 TV 방영 영상 속 그는 지팡이를 짚고 공항을 걸어 나오고 있다. 당국은 그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며, 정부 의료진이 세밀히 관찰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콩을 떠나기 전, 환호하는 필리핀 교민들을 향해 두테르테는 "내 죄가 뭐냐? 나는 재임 당시 필리핀 국민들의 평화와 평화로운 삶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외쳤다.
딸 베로니카 두테르테가 올린 영상 속 두테르테는 마닐라 빌라아모르 공군기지 라운지에 구금된 채 자신을 체포한 이유를 묻고 있다.
"이는 무슨 법이며, 내가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저지른 범죄는 무엇입니까? 저는 제 의지로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의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 자유를 박탈한 것에 대한 답을 원합니다."
'마약과의 전쟁'
두테르테는 22년 동안 남부 대도시 다바오의 시장으로 활동하며 필리핀에서 가장 거리 치안이 좋은 도시 중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다바오의 평화와 질서를 확립했다는 명성을 바탕으로 두테르테는 강하게 할 말 하는 반기득권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웠고, 결국 2016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이후 그는 단호한 발언을 내뱉으며 보안군에 마약 사범 용의자들을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 기간 경찰이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들에 의해 총살 당한 이들이 6000명을 웃돈다. 인권 단체들은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과거 발표된 UN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 대부분이 도시의 빈곤한 청년 남성이었다. 경찰은 가택 수색이나 체포 영장이 필요 없는 이들을 상대로 폭력적으로, 조직적으로 자백 혹은 진술을 강요했다고 한다.
이러한 '마약과의 전쟁'에 대해 도시 빈민층이나 하급 마약사범을 표적으로 삼았을 뿐 거물급 마약왕 단속에는 실패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아울러 수많은 유가족이 나서 아들, 형제, 남편 등이 그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용의자로 몰렸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필리핀 국회 조사에서도 마약 용의자를 노리며 은밀히 '암살단'처럼 활동하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지적했다. 그러나 두테르테는 이러한 인권 유린 혐의를 계속 부인한다
두테르테는 지난달 10월 국회 청문회에서 "나의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지 말라. 나는 사과도 변명도 하지 않는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당신들이 믿든 믿지 않든 … 나는 조국을 위해 했다"고 했다.
"저는 마약을 혐오하고, 마약에 관해서는 실수하지 않습니다."
한편 국제형사재판소(ICC)는 2016년 처음으로 이 같은 인권 유린 의혹에 주목하고 2021년부터 조사에 착수했다. 두테르테가 다바오 시장으로 재임하던 2011년 11월부터 필리핀이 ICC에서 탈퇴하기 전인 2019년 3월까지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동양의 도널드 트럼프'
두테르테는 수도 마닐라에 비해 소외감을 느끼는 남부 민다나오 지역 출신 최초의 대통령으로서 여전히 필리핀에서 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마닐라와 북부 지역에서 더 널리 사용되는 타갈로그어 대신 지역 언어인 세부아노어로도 자주 연설한다.
포퓰리즘적인 발언과 직설적이고 강한 발언으로 인해 '동양의 도널드 트럼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우상"으로 부르며, 두테르테 집권 당시 필리핀은 오랜 동맹국인 미국에서 중국 쪽으로 외교 정책을 선회했다.
그의 딸이자 정치적 후계자인 사라 두테르테는 현재 필리핀의 부통령으로 재임 중이며, 2028년 대권 잠룡으로도 거론된다.
두테르테 일가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현직 대통령 일가 간 동맹 관계는 사라 두테르테와 마르코스 대통령이 한 팀을 이루어 2022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드러났다.
처음에는 ICC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던 마르코스 대통령은 두테르테 일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태도를 바꾸며 필리핀 당국은 이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재판에 세우고자 두테르테 전 대통령을 인도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추가 보도: 비르마 시모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