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가 가자 지구 전쟁 반대 시위 확산...'인티파다'란?
미국 내 몇몇 유명 대학교에서 가자 지구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한 가운데 대규모 인원이 체포됐다.
그런데 이러한 시위 관련 SNS 게시물엔 아랍어로 ‘봉기’를 뜻하는 ‘인티파다’가 자주 등장한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에 대해 팔레스타인인들이 격렬히 저항하던 시기를 가리키곤 한다.
현재 수많은 게시물이 이번 가자 지구 전쟁이 새로운 인티파다를 불러일으킬지 묻고 있다. ‘지적인 인티파다’를 주장하는 이들도, ‘인티파다의 세계화’를 촉구하는 이들도 있다.
미국 내 대학생들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내 군사 작전에 항의하고자 수업 참여를 거부하는 한편 야외에 텐트까지 설치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현재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에서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이들은 수백 명에 이른다.
컬럼비아 대학, 뉴욕 대학,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미시간 대학교뿐만 아니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소재 에머슨 대학과 터프츠 대학과 더불어 근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우선 컬럼비아 대학에선 많은 학생들에게 정학 처분이 내려졌는데, 이러한 징계 조치를 취소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 몇몇 유대인 학생들은 캠퍼스 분위기가 위협적이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 시위대는 유대인 학생을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일은 드물며, 이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고 지적한다.
시민 운동가들 또한 나서 대학 측에 “집단학살에서 벗어나” 무기 제조 및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전쟁을 지원하는 기타 산업 및 관련 기업들로부터 대규모 기부금 투자를 받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다.
‘인티파다’란?
‘인티파다’란 아랍어로 ‘봉기’를 뜻하는 용어로, 이스라엘에 대해 팔레스타인이 격렬히 저항하던 시기를 가리킨다.
제1차 인티파다는 1987~1993년까지, 제2차 인티파다는 2000~2005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 가자 지구 전쟁이 시작된 지난해 10월 7일 이후 SNS엔 ‘인티파다의 세계화’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에 맞선 봉기에 동참해달라는 것이다.
그 외에 ‘온라인 인티파다(Electronic Intifada)’, ‘지적인 인티파다(Intellectual Intifada)’와 같은 용어와 함께 이스라엘에 맞서 ‘불매운동, 투자 거부, 무역 제재’를 추진하자는 구호도 등장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의 초기 인티파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1차 인티파다: 1987년 12월 ~ 1993년 9월
팔레스타인이 일으킨 최초의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 8일,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탱크를 수송하던 트럭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탄 차량과 충돌하면서 촉발됐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주민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불만이 지난 20년간 점점 커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엔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엔 이스라엘의 불법 정착촌이 확산하고 있었으며,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군과 팔레스타인 주민 간 충돌도 잦았다.
해당 사건으로 가자 지구 ‘자발리야 난민 캠프’에선 봉기가 일어났고, 이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돌과 휘발유 폭탄을 들고 이스라엘 군인들에 맞섰다. 이스라엘 군은 당시 실탄을 발사하여 UN 등 국제기구의 비난을 샀다.
시기별로 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양측의 폭력적인 대립은 1993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이러한 봉기는 이스라엘은 물론 당시 튀니지에 망명 중이던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줬다.
제1차 인티파다의 주된 결과 중 하나는 이스라엘 점령하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고난, 특히 이스라엘 군이 봉기를 진압하고자 얼마나 강경히 대처했는지에 세계의 관심이 쏠린 것이다.
시위대의 “뼈를 부러뜨려라”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의 발언이 유명해지기도 했다.
라빈 장관은 총이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실탄을 발사하면 국제 사회의 동정심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이미지가 손상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티파다가 진행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무기는 돌에서 화염병으로, 소총, 수류탄, 폭발물 등으로 진화했다.
공식적인 소식통과 전문가들은 제1차 인티파다 기간 팔레스타인이 죽인 이스라엘인은 약 100명인 반면,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 최소 1000명을 살해했다고 본다.
제1차 인티파다는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과 PLO 양측이 평화 협상의 틀을 마련한 ‘오슬로 협정’에 서명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의 대표로 인정했고, PLO는 무장 투쟁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제2차 인티파다: 2000년 9월 ~ 2005년 2월
2번째 인티파다는 ‘알-아크사 인티파다’라고도 불린다.
예루살렘에 자리한 ‘알-아크사 모스크(이슬람의 예배당)’는 이슬람교도들에겐 3번째로 성스러운 장소이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이 사원의 이름을 따 ‘알-아크사 인티파다’라고 부르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조직한 폭력 행위라는 이스라엘의 주장과는 달리 민중들이 일으킨 봉기임을 강조했다.
2000년, 이 사원은 앞으로 5년간 이어질 폭력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2000년 9월 28일, 이후 총리가 되는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야당 지도자가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알-아크사 사원을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시위가 발생해 첫날에만 7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팔레스타인 시위대 수백 명이 샤론의 경호원들에게 신발과 돌을 던지며 시작된 해당 시위는 이내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번졌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살던 12세 소년 모하메드 알-두라가 가자 지구에서 아버지의 팔에 매달려 숨어있다가 결국 총에 맞아 숨지는 장면은 제2차 인티파다를 나타내는 이미지로 오랫동안 회자됐다.
그러나 이스라엘 측은 조사 결과 이스라엘군이 모하메드를 총살했다는 프랑스 TV 방송국의 보도는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80년대와 2000년대 인티파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대치 상황 및 폭력의 규모다.
제2차 인티파다는 앞선 인티파다보다 훨씬 더 폭력적으로 전개됐다.
UN에 따르면 제2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2000년 9월 이후부터 인티파다가 마무리된 지 거의 2년이 지난 2007년 말까지 사망한 이들은 5800명 이상이다.
해당 인티파다 기간 정확히 몇 명이 사망했는지 파악하긴 어렵지만, 이스라엘인 사망자보다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게 대부분 전문가의 의견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은 로켓포를 발사하고, 건물 및 버스에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이때도 이스라엘의 대응 방식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일었으나, 이스라엘 측은 조직적인 무장 공격에 대응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