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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에 발 묶인 어르신들...고령층 재난 대응 충분한가?

2025.03.29
권오석 씨가 삽을 들고 화재 피해로 무너지고 그을린 집 앞에 잔해를 치우고 있다
권오석
화재 피해로 무너진 집 잔해를 치우고 있는 권오석 씨

"요즘 사실상 시골에는 노령층밖에 없거든요. 젊은 사람들은 없어요. 노인들은 잘 걷지도 못하는데...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는 속수무책인 거죠." (안동 시민 권오석 씨)

영남 지역에서 발생한 역대 최악의 산불 사태에서 고령층 피해가 특히 큰 것으로 드러나면서, 재난 발생 시 수도권 외 지역에 사는 노인들의 재난 대응책이 충분하지 않다는 우려가 나온다.

29일 행정안전부 중앙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29일 오후 4시 기준 산불 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30명, 부상자는 43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경남 산청과 경북 의성에서 각각 4명, 26명 발생했다.

전날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상북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6일까지 경북(안동·청송·영양·영덕)에서 발생한 산불 피해 사망자와 실종자 18명 중 14명의 평균 연령이 78세 노인으로 확인됐다.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지방에 거주하는 고령층 비율이 워낙 높은 데다가, 산불이 유달리 빠르게 확산하는 바람에 정보와 기동력이 취약한 노인들이 대피하기 쉽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불티보다 늦은 알림

이번 산불 사태의 경우 불길이 예상보다 워낙 빠르게 번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통신망 장애까지 일어나면서 재난 알림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북 안동시에 거주하는 권오석(64) 씨는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5일 저녁 대피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산불이 시작된 의성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안동시에 거주하는 본인은 재난문자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가 의성하고 안동하고 경계 지점이에요. 그래서 불이 넘어올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어머니를 모시러 갔죠."

권 씨는 먼저 차로 약 30분 떨어진 길안면에 사는 혼자 사는 93세 어머니를 데리러 갔다. 권 씨가 갈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앞서 TV 방송을 통해 의성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접한 게 전부였다.

그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차에 불씨가 날아드는데, 그걸 뚫고 갔다"라며 "재난영화보다 더 한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멀리서 사는 자녀들이 권 씨가 걱정돼 전화했지만, 통신망 문제로 전화가 잘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행안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은 자연재해 등 국민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 휴대전화를 통해 재난문자방송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적 문제로 인해 3세대(3G) 휴대전화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2013년 이전에 출시된 4세대(LTE) 휴대전화도 재난문자를 받지 못할 수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3G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전체의 1%가 안 되긴 하지만, 52만8335명에 달한다.

같은 지역에 사는 권해진(24) 씨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길안면에 있는 조부모의 집 근처까지 불길이 다다랐다는 소식을 듣고 재난 알림에 앞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때는 200미터 강 건너에 불이 붙어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저희들도 이제 대비는 해 놓지만 '설마 불씨가 여기까지 날아오겠어'라고 생각해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는데…갑자기 5초 안에 산불이 번져오더라고요."

권 씨의 할머니는 밖에 나갔다가 굴러온 돌에 맞아 다리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권 씨는 워낙 빠르게 퍼지는 산불에 재난 알림이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피하라는 문자는 받긴 했지만, 안내 방송 같은 것도 이미 산불이 다 나고 집이 다 타고 있는 와중에 울렸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재난문자가 발송되더라도 이를 확인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특히 고령층의 경우 젊은층에 비해 휴대전화 사용 빈도가 적은 만큼 재난문자를 빨리 확인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제진주 전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고령층에 재난문자를 단순 발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효율적인 내용 전달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 교수는 "(이들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스크린 속 버튼만 누르면 긴급 재난센터 같은 곳에 연락이 가게 한다든지…재난 관련 정보를 노인들이 쉽게 접하고 (활용) 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주택을 둘러싼 산에 불이 옮겨붙어 주변이 새빨간 연기로 둘러싸인 모습
김은희
김은희 씨는 집을 둘러싼 산에 불씨가 빠르게 옮겨붙으면서 밖에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다고 회상했다

이동이 어려운 노인들

김은희(55) 씨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 거주하는 85세 아버지를 모시고 대피했다. 그는 개인 차량이 없어 대피 과정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보통 시골집에는 집 안에 노인분들을 위한 비상 방송망이 있거든요. 그런데 당시 정전이 돼서 방송이 안 되니까 동장분들과 경찰분들이 직접 집집마다 다니면서 빨리 대피하라고 했죠."

김 씨는 "119 (구급차가) 근처까지 왔는데 위치 추적이 안 돼서 찾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 또 영양읍이나 영덕으로 가는 3개의 길이 모두 차단되다 보니까 진입도 불가능했다"라며 이후 경찰차가 도착해 아버지와 함께 대피할 때쯤에는 도로에 연기가 자욱해 길이 안 보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원래 서울에 거주하는 김 씨는 병원 치료 목적으로 대도시로 간 어머니를 대신해 잠시 아버지와 지내는 중이었다. 그는 만약 산불이 발생했을 때 평소처럼 부모님만 지내는 상황이었다면 대피가 더 어려웠을 거라며 인터뷰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재 때문에 눈을 못 뜰 정도였으니까 밖에 나가 있을 수도 없었어요. 119가 안 와서 너무 조마조마했죠. 바람은 돌풍처럼 불지, 불씨는 날아다니지...정말 전쟁터였습니다."

이처럼 차량을 운전해 빠져나갈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택시나 119 구급차를 부르거나 이웃의 차를 얻어 타 대피소로 향했다. 개인 차량이 있어도 불에 타 대피에 어려움을 겪거나, 다른 지역에 사는 자식들이 소식을 듣고 와도 교통 통제로 인해 마을에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해진 씨도 동네 주민들이 트럭 등 다양한 운송 수단을 타고 대피에 나섰지만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여기 있어야지 어딜 가냐'라면서 (대피하지 않고) 악착같이 계신 분들도 있었다"라고 전했다.

화재 피해 지역에서 긴급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는 비영리기구(NGO) 피스윈즈의 이동환 사무국장은 이번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고령층을 대피시킬 때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자포자기" 심리라고 했다. 위급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피하기보단 대피를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는 과거 수해 등 다른 상황에서도 "소방과 경찰, 이장님이 네다섯 번씩 와서 (어르신을) 설득해서 대피소로 옮기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연합뉴스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에서 이장 부부가 대피장소와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지난 26일 보도했다. 이에 부부가 다른 주민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대피소에 앉아 있는 어르신들
Getty Images
산불이 빠르게 확산해 대피소에 이재민들이 몰리면서 식수, 의료 등 지원상 어려움이 발생했다

긴박해지는 재난 상황

전문가들은 이번 산불 사태가 너무 빠르게 확산해 현실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시 공무원 출신인 권오석 씨도 "시에 (공무원으로) 있을 때 산불 끄러 많이 다녀봤지만, 이런 산불은 생전 처음"이라며 "불길이 빠를뿐더러, 너무 거세서 함석지붕(아연을 입힌 철판으로 지은 지붕)이 여기저기 날아다닐 정도"라고 회상했다.

김 씨도 처음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 소식을 들었을 때 불길이 자신이 사는 영양군에 다다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거리상으로 약 80km나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갑자기 바람이 막 많이 불어서 (불길이) 청송 쪽으로 온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청송 옆이 영양이니까 불안하긴 하지만 설마 넘어오겠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도 안 걸려서 순식간에 넘어왔잖아요."

이 국장은 최근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산불이나 폭우를 비롯해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의 재난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전보다 더 과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 정책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재난 시 대피 교육을 진행하고 집 안에 방재 물품을 구비해놓는 등 지역 차원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의 경우 밭일에 나가는 등 다양한 이유로 연락이 빨리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아 요양보호사, 자식 등 1·2차 연락망을 확보해 놓을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21일 경남 산청에서 시작된 불길은 9일째 완전히 진화되지 않고 있다.

지방의 경우 현실적으로 산불 진화에 투입되는 소방대원 역시 연령대가 높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소방 교육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제 교수는 '임도'(삼림에 설치한 도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임도가 멀리는 1~2km까지 날아가는 불씨가 옮겨붙는 것까지 막아주기는 힘들지만, 소방대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진화선을 구축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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