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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마지막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누구인가?

1일 전
옛 이란 국기와 레자 팔라비의 모습
AFP

최근 이란 전역에서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란의 마지막 샤(국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현재 망명 중인 레자 팔라비가 지난 8일(현지시간) 대규모 새로운 시위를 촉구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왕의 맏아들인 그는 SNS를 통해 최근 시위 참가자 수가 "전례 없는 수준"이었다고 주장하며, 현 "정권이 매우 두려워하며 시위를 막고자 다시 한번 인터넷을 차단하고자 시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자국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역할을 맡고자 노력 중인 이 전 왕세자에 대해 알려진 바는 무엇일까.

이란의 왕관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태어난 레자 팔라비는 1979년 혁명이 일어나 아버지의 군주제가 몰락했을 당시 미국에서 지내며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는 한때 서방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았던 아버지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가 망명처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이집트에서 암으로 사망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갑작스럽게 권력을 잃으며 젊은 왕세자와 그의 가족은 무국적자 신세로 전락했고, 그 수도 점점 줄어드는 왕실 지지자들과 후원자들에 의지해 살아갔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이 옛 왕가는 여러 비극을 겪었다.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팔라비는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한 왕조의 상징적 수장 역할을 짊어지게 됐다.

그렇게 현재 65세가 된 그는 다시 한번 조국의 미래 형성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노력 중이다.

워싱턴 DC 근교 한적한 교외에 자리한 자택에서 지내는 그를, 지지자들은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친근한 인물이라 말한다. 화려한 경호 없이 아내 야스민과 함께 지역 카페도 자주 찾는다고 한다.

2022년 이란 시위 운동의 지도자로서 나설 수 있겠는지 묻는 한 행인의 질문에, 그와 야스민은 동시에 "변화는 내부에서 비롯돼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환점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그의 어조는 더욱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난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란의 여러 고위급 장성이 사망한 이후, 팔라비는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만약 현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붕괴할 경우 자신은 과도 정부를 이끄는 데 도울 준비가 됐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임시 행정부를 위한 100일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새로운 자신감에 대해 그는 망명 생활에서 얻은 교훈과 아버지가 남긴 "미완의 사명"에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아울러 파리에서 기자들에게 "이는 과거를 복원하겠다는 시도가 아니"라 "모든 이란인에게 민주적인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왕세자로서의 성장 배경

1967년 10월 26일,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무하마드 레자 팔라비(1919-1908)와 그의 아내 파라의 대관식. 왕세자 레자 팔라비 또한 국왕 옆에 앉아 있다
UPI/Bettmann Archive/Getty Images
1967년 테헤란에서 열린 아버지의 대관식에 참석한 레자 팔라비(오른쪽 의자에 앉은 어린이)의 모습

1960년 10월 테헤란에서 태어난 팔라비는 이전의 두 차례 결혼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한 왕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렇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권을 쥔 팔라비는 개인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린 나이부터 군주제를 수호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리고 17세가 되던 해, 전투기 조종사로서 훈련을 받고자 미 텍사스로 건너갔다. 그러나 귀국하여 복무해보기도 전에 혁명이 일어나 아버지의 군주제가 무너졌다.

그 이후 팔라비는 줄곧 미국에서 살았다.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이란계 미국인 변호사 야스민과 결혼해 누르, 이만, 파라 등 세 딸을 낳아 키웠다.

논란의 과거 유산

망명 중인 팔라비는 여전히 옛 군주제 지지자들에게는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팔라비 왕조 시대를 급격한 현대화 및 서방과 긴밀하게 밀착하던 시절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반면 반체제 인사 탄압에 동원되며 인권을 짓밟던 악명높은 비밀경찰 '사박'이나 검열 등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수년간 이란 내 그의 인기도 오르락내리락했다. 1980년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상징적인 즉위식을 열고 자신을 샤로 선포했다. 물론 실질적인 영향력은 크지 않았으나, 일부 반대파들은 이러한 행보가 그가 현재 주장하는 민주적 개혁 메시지와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2013년 출범한 '자유 선거를 위한 이란 국민회의'를 포함해 여러 차례 현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연합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 내부 불화 및 이란 내 실질적인 영향력 제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망명 반정부 단체들과 달리, 팔라비 측은 일관되게 폭력은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모자헤딘-에 칼크에(MEK)와' 같은 무장 세력과도 거리를 두었다.

그는 평화적 정권 이양과 이란의 미래 정치 체제는 국민 투표로 정해야 할 것을 반복적으로 촉구해 왔다.

해외에서의 논란

2023년 4월 17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추모일 공식 개막식에 참석한 레자 팔라비(왼쪽)와 길라 감리엘 이스라엘 정보부 장관(오른쪽)
EPA-EFE/REX/Shutterstock
팔라비가 지난 2023년 이스라엘을 방문해 홀로코스트 추모 행사에 참석하고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만나며 옛 팔라비 왕가에 대한 여론은 양극화됐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팔라비 일가는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7년 반정부 시위에서는 그의 조부를 가리키는 '레자 샤, 당신의 영혼이 축복받기를'이라는 구호가 재등장했다.

그리고 2022년 여대생 마흐사 아미니가 경찰 구금 중 사망하는 사건으로 이란 전역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그는 다시 한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분열된 이란 야권을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에 국제 사회는 관심을 보였으나, 결국 추진력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그가 40년간 해외에서 지낸 세월을 지적하며 아직까지 견고한 조직이나 독립적인 언론 매체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한편 팔라비가 지난 2023년 여러 논란 속에 이스라엘을 방문하며 여론은 더욱 양극화됐다. 그는 당시 홀로코스트 추모 행사에 참석하는 한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만났다.

이에 대해 일부 이란인들은 현실적인 활동이라고 바라봤으나, 이란의 아랍 및 무슬림 동맹 세력들을 소외시키는 행위라는 비난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 이스라엘이 이란 내부를 공습하면서 그는 더욱 까다로운 질문에 직면했다.

로라 쿤스버그 BBC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민간인 생명을 위협하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지지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팔라비는 평범한 이란인들은 표적이 아니었다고 강조하며, "현 정권을 약화하는 모든 것"이 이란 내 많은 이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발언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미정인 미래

오늘날 팔라비는 자신을 왕위 계승자가 아닌 국가적 화해를 위한 상징적 인물로 내세운다.

그는 이란이 자유로운 선거, 법치주의, 여성 평등권 등을 향해 나아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동시에 군주제 복원이나 공화국 수립에 관한 최종 결정은 국민 투표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지자들은 팔라비야말로 평화적인 사회 변화를 위해 오랜 기간 헌신해 온 유일한 유명 야권 인사라고 본다. 반면 비판자들은 그가 여전히 외국 지원에 과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수십 년간의 정치적 혼란으로 지친 이란 국민들이 과연 누구든 국외 망명 중인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현 이란 정부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나, 공개적인 정치 공간이나 신뢰할 수 있는 여론조사가 부재한 상황에서 과연 그가 진정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지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일부 이란인들은 여전히 그의 가문을 존경하지만, 민주주의라는 체제 하에 비선출 지도자를 또 다른 비선출 지도자로 대체하자는 주장에 두려움을 표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부친의 유해는 여전히 카이로에 안장된 상태이며, 군주제 지지자들은 언젠가 상징적인 의미로 그의 유해가 이란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망명 중인 옛 왕세자는 과연 그날을, 혹은 자유로운 이란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까. 이는 과거와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이란에 대한 수많은 미답의 질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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