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늘 뒤를 조심합니다'...국외로 망명하는 BBC 기자들
국외 망명을 택한 BBC 월드 서비스 소속 언론인 수가 2020년 이후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해 31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는 3일 ‘세계 언론 자유의 날’을 앞두고 처음으로 발표된 해당 수치는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등지의 언론인 탄압이 반영된 결과다.
이란을 포함해 여러 국가의 언론인들이 10년 이상 돌아가지 못하고 해외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 중 다수가 교도소 수감 및 살해 위협, 온오프라인을 막론한 괴롭힘에 시달린다.
릴리안 랜더 BBC 월드 서비스 책임자는 “언론인들이 계속 보도를 이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모국에서 떠나는 것뿐”이라면서 “언론의 자유 측면에서 현재 국외 망명을 택한 언론인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우려된다”고 설명했다.
2021년 8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장악했을 때, BBC는 소속 언론인 대부분을 국외로 철수시켰다. 여성 직원들의 근무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으며, 남성 동료들은 여러 위협에 시달렸다.
미얀마와 에티오피아에서도 언론인에 대한 탄압이 늘어나면서 자유롭게 보도를 이어 나가긴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의 지야르 골 특파원은 “나는 늘 뒤를 조심한다”며 말을 꺼냈다. 골 특파원은 실내 공간에 들어서면 습관처럼 탈출 경로를 생각해본다.
“저는 집에도 여러 대의 보안 카메라를 설치해 뒀습니다. 제 딸을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경고도 들었습니다.”
골 특파원은 2007년 이후 조국인 이란에 가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몰래 국경을 넘어 묘소에만 가봤을 뿐이다.
하지만 4년 전 아내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부턴 더욱더 조심하게 됐다고 한다.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딸은 어떡하나요? 항상 이런 생각을 품고 삽니다.”
“이란 정권은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로부터) 엄격한 제재를 받는 이들은 국제사회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고립된 상태이기 때문이죠.”
미국 소재 비영리 기구로 국외 망명을 택한 언론인을 지원하는 ‘언론인보호위원회’의 조디 긴즈버그 회장은 지난 3년간 망명 중인 언론인에 대한 재정적, 법률적 지원이 225%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투옥된 언론인의 수는 거의 기록적인 수준이며, 언론인 살해 건수 역시 2015년 이후 최고치”라는 설명이다.
러시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국가 당국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국내외 내러티브를 통제하려 든다는 게 긴즈버그 회장의 주장이다.
BBC 러시아어 서비스의 니나 나자로바 기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이 본격화되자 고국을 떠났다. 모스크바에서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자로바 기자는 마찬가지로 기자인 남편을 바라봤다. 남편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자로바 기자는 그날을 떠올리며 “그냥 망연자실했다”고 회상했다. 이들이 떠나던 2022년 3월 4일은 새로운 검열법이 발효된 날이었다.
그리고 나자로바 기자는 “나는 전쟁을 전쟁이라고 칭했다”면서 “그로 인해 언제든지 투옥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자로바 부부는 당시 16개월 난 어린 아들과 함께 여행용 가방 2개, 유아차를 챙겨 자신들이 찾을 수 있는 한 가장 저렴한 해외 항공권을 구입해 튀르키예로 떠났다.
튀르키예에 도착한 지 1주일 뒤, 이들은 이번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계획했던 두바이에서의 휴가를 보냈다. 비현실적인 1주일이었다. 이후 몬테네그로로 건너간 가족은 다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로 향했다. BBC가 망명 중인 러시아 직원들을 위해 마련해 둔 사무실이 자리한 곳이다.
올해 4월, 나자로바의 동료였던 일리야 바라바노프 BBC 러시아 특파원이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이번 전쟁에 반대한다는 혐의로 ‘외국 요원’으로 낙인찍혔다. 바라바노프 기자와 BBC는 이러한 혐의를 전면 부정하며 법정에서 맞서고 있다.
망명 이후에도 언론인에 대한 위협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올해 3월, 독립적인 방송사인 ‘이란 인터네셔널’의 한 진행자가 영국 런던의 자택 밖에서 괴한의 칼에 맞아 다리를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 영국 경찰의 대테러 부서는 영국에 머무는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 직원들에 대한 위협이 늘어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2022년엔 BBC 페르시아어 뉴스의 라나 라힘푸르 진행자의 차에 누군가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라힘푸르 진행자는 차량 내부에 누군가 도청 장치를 설치해둔 건 아닌지 의심했다. 라힘푸르 진행자가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담은 녹음본이 이란 정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플랫폼에 게시됐다. 라힘푸르 진행자가 현 정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들리게 편집된 상태였다.
경쟁 방송사들이 해당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신용을 깎아내리기 시작하자 라힘푸르 진행자는 언론계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라힘푸르 진행자는 “(이란) 정권의 전술이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다”면서 “내게 일어난 일은 저들이 언론인들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협박해 궁극적으로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동원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주변 동료와 친구들은 불안감에 떨게 됐다.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의 또 다른 진행자인 파르나즈 가지자데는 “이란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할 때마다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안다”고 토로했다.
“저들이 우리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두렵습니다.”
가지자데 진행자는 지난 21년 동안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자신과 동료 9명이 궐석 재판을 통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커들이 이란 사법부의 정보를 빼내 유출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앞서 이란 외무부는 BBC 페르시아어 서비스 직원들이 폭력, 증오 발언, 인권 유린 행위 등을 선동했다고 비난한 바 있다.
과거 가지자데 진행자는 남편이 블로그에 쓴 글을 이유로 25일간 수감된 이후 남편과 6개월 된 아들과 함께 이란을 떠났다.
한편 여전히 이란에 남아 있던 가지자데 진행자의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이란 보안 당국에 소환됐다. 아버지는 딸에게 어서 귀국을 재촉하라는 협박과 손자들이 다니는 학교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협박을 들었다.
그러던 2022년, 남동생이 중병에 걸렸고, 연로하신 가지자데의 부모님은 아들을 돌보고자 애썼다. 그러나 6주 만에 남동생은 사망했고, 이로부터 6개월 만에 아버지도 그만 세상을 떠났다.
가지자데 진행자는 “그 충격에서 온전히 회복하긴 힘들다”면서 “나는 정말 가족과 어머니를 위해 그 곁에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 BBC 파슈토어 서비스의 샤지아 하야 기자도 망명 생활 중 죄책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하야 기자는 지난 2022년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재집권 당시 카불에 부모님과 남동생을 남겨 두고 홀로 영국으로 몸을 피했다.
“새벽 2시쯤 집을 나섰던 그날 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동생을 안아주지 못했다. 정말 후회된다”는 하야 기자는 “나는 이곳에서 자유롭지만, 가족들은 그곳에서 마치 갇힌 듯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온라인상에서도 괴롭힘은 이어진다.
가지자데 진행자는 “나는 더 이상 악질적인 메시지나 이러한 살해 협박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는다”면서 “때로는 성적인 내용도 있고, 정말 추악하다”고 설명했다.
지도층의 화를 살까 두려워 익명을 요구한 한 BBC 월드 서비스 소속 기자는 자신과 동료들은 고국의 정부가 여권 갱신을 거부해 무국적자로 전락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수의 언론인들은 협박보다도 멀리 떨어져 고국에 대해 취재하고 보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답답함을 느낀다.
하야 기자는 원래 아프가니스탄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민들, 특히 여성들의 삶에 대해 보도했다. 이젠 뚝뚝 끊어지는 전화 연결을 붙잡고 이들의 신뢰를 얻어내야만 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의 평범한 주민들은 BBC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에 직면하곤 한다.
러시아를 떠나온 나자로바 기자 또한 일하기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현장에 가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아있다 보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기술인, 사람들을 설득해 다른 곳에선 하지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하는 기술이 사라질까 두렵다는 것이다.
또한 나자로바 기자는 모두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아껴주는 가족 모임 같은 정말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그립다고 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사랑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다”는 설명이다.
한편 가지자데 진행자는 망명 중인 상태에서 취재하며 살아가는 삶은 일종의 반쪽짜리 삶에 불과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이제 영국인이고,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는 제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아요. 해외에 망명 중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국에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