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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광복 직후, 서울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렸을까?

1일 전
이성화 씨
BBC/최유진
이성화 씨가 80년 전 광복 당시 일화를 얘기하고 있다

"나는 (광복일에) 동네 골목에서 놀고 있었는데, 오빠는 어른들이 만세 부르러 간다고 다 나가니까 웬일인가 하고 쫓아 나갔어. 막 뛰어가다가 넘어졌대…(사람들이) 다 들뜨고, 여기저기서 만세 부르러 간다고 몰려다녔던 거야."

이성화(87) 씨는 국내 상업방송 최초의 아나운서로, 지금까지도 비영리 공동체라디오 관악FM에서 DJ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만나 대화를 나눈 사람만 해도 수백 명이다.

이 씨는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광복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수십 명에게 연락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린 탓에 "그날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라며 아쉬워했다. 당시 개성에서 국민학교에 다니던 이 씨도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광복은 더 이상 생생한 경험이 아닌,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 씨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광복일의 함성 소리를 재현한 '처음 듣는 광복' 캠페인에 참여한 이유이기도 하다.

광복의 소리

1945년 8월 16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의 철문이 천천히 열리고 사람들의 흐느낌과 다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박수 소리와 함께 '해방이다!', '만세!'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다.

그날 오후 무렵 종로 일대에서 시작된 거리 행진은 경성역까지 이어진다. '해방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등 찢어질 듯한 '만세'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끊임없이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을 바쁘게 실어 나르는 전차가 경적을 울리며 철로를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식품 기업인 빙그레와 국가보훈부에서 진행한 광복 80주년 캠페인 '처음 듣는 광복'은 이처럼 AI를 활용해 광복 직후의 소리를 구현했다.

빙그레에서 광고 기획을 담당한 전혜성 씨는 BBC에 "함성 소리만을 구현한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소리를 레이어로 구성하다 보니 고증 자료도 많이 필요했고, 이에 대한 검증도 필요했다"라며 "총 제작 과정 8개월 중 (역사) 고증 과정만 6개월 정도가 걸렸다"라고 설명했다.

고증 자료로는 신문 기사와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헌과 사람들의 증언이 활용됐다. 국가보훈부와 역사학자들이 고증 과정에 참여했다.

광복 당일이 아니라 8월 16일로 날짜를 설정한 이유도 역사적 자료에 기반한다. 일왕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 선언을 한 것은 15일이지만, 당시 라디오의 대중 보급률이 낮았던 데다가 일왕의 난해한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 많지 않아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광고대행사 이노션의 문나리 제작팀장은 캠페인 광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자료를 많이 찾았고, 이를 크고 작은 소리로 녹여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흥분을 해서 나왔는데, 계속 함성을 지르는 데 한계가 있잖아요. 뭔가 두들기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 당시에는 (일본에) 숟가락이고 냄비고 다 빼앗기다 보니까 바가지라든지 담배 가게 양철 간판 이런 것들을 들고 막 두들기면서 거리 행진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는 KBS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8·15의 기억'에서 박문재 씨의 증언 등을 참고해 더한 요소다. 박 씨는 "그날 저녁 개성 사람들이 모두 만월대에 모여 꽹과리를 치고 난리가 났어요. 아니, 꽹과리 같은 것은 다 공출되고 없었으니까 대신 담배표 그림이 그려진 양철 간판을 쳤지요"라고 증언한 바 있다.

이외에도 당시의 날씨를 고려해 바람에 나부끼는 천(태극기)의 소리, 사람들이 신었던 신발의 종류와 이에 따른 발소리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소리를 반영했다.

다만 제작 과정에서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대한 독립 만세' 함성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의 억양을 반영하고 싶었지만, AI로는 억양까지 섬세하게 조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함성 소리를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성우의 목소리 녹음본을 활용해야 했다.

어떤 의미 있나

캠페인 광고는 30초짜리 짧은 영상과 5분 21초짜리 긴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된 지 며칠 만에 조회수 도합 1000만 회를 넘겼다. 아이디어 자체를 흥미로워하거나, 소리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다.

전 씨는 "매년 광복절에 많은 영상이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데 반해 정작 우리가 그날의 분위기라든지 감정을 피부에 와닿게 느끼기는 좀 어렵다고 느꼈다"라며 "사람들이 1945년 그날을 좀 더 생생하고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고 싶었다"라고 제작 취지를 설명했다.

식품 기업인 빙그레는 2019년부터 매년 광복절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번 캠페인은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광복 8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AI를 활용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의 '소리'를 구현한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AI를 사진이나 영상에 활용한 사례는 많았지만, 소리를 재현하는 데 활용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AI와 디지털 기술을 역사 연구 및 교육 분야에서 적극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는 반면, 역사적 사실 왜곡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독립운동 연구가인 박환 전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가의 관점에서는 경성역에 모인 인파의 규모 등 여러 면에서 "실제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면서도 "AI를 통해 (역사를) 보다 생동감 있게,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들려준다"는 점에서 새롭고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이 씨는 제작된 소리를 듣고 "광복의 기쁨"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 마음속으로 원하고 갖고 싶었던 자유와 행복이라는 감정이 묵혀서 눌려 있었던 만큼 폭발력이 크다는 걸 느꼈어요...젊은 사람들도 영상을 보고 저런 열정과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우리 선조들이 갖고 살아왔고, 또 물려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영상: 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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