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불법체류가 제 죄가 되나요' 고향 한국에서 좌절하는 미등록 이주아동들
"한국에서만 평생을 살았는데, 뭘 더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2002년 한국에서 태어난 마리나는 고향인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써 5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마리나는 몽골 국적의 부모님이 미등록 이주민(불법체류자)이었던 탓에 성인이 될 때까지 한국에도 몽골에도 출생등록이 되지 않아 서류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살았다.
2021년 가까스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임시 자격을 얻었지만, 대학교 3학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큰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가며 체류기간을 연장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마리나는 말한다.
마리나는 그나마 나은 경우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조건부 체류자격을 주는 제도의 시행 기간은 오는 3월 31일까지로 만료가 2달도 안 남았지만, 연장 혹은 개정 여부가 현재까지도 결정이 되지 않았다. 현재 미성년자인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이 제도마저 사라져 한국에 머물 방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법무부는 현재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초, 중, 고에만 약 3000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주민 지원 단체들은 학교를 졸업했거나 다니지 않는 이들을 합하면 그 수가 1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마리나와 같은 미등록 이주아동 출신 청년들이 BBC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위태로운 일상에 대해 들려줬다.
'스무살이 되면 죽어야겠다'
"복잡한 생각은 없고 그냥 딱 집이라는 생각이에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마리나는 "집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했다. "정치를 못하면 속상하고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좋은 것처럼 그냥 자연스러운 거예요."
마리나는 이처럼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한국인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며 자랐다.
그런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성인이 되면 강제출국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몽골로 가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스무살이 되면 죽어야지 생각했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정부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국내 체류를 허용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라 교육권을 보장하고 추방을 유예했지만, 성인이 된 미등록 이주아동은 바로 강제 퇴거 대상이었다.
"어릴 땐 '내가 군대 갈 때쯤엔 통일이 돼있겠지'라는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제가 스무살이 되면 어떻게든 돼있겠지.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마리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20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나고 자란 한국을 떠나야 하는 현실이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다행히 진정은 받아들여졌다. 진정을 접수한 인권위는 법무부에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인도적 체류자격을 보장하라고 권고했고, 법무부는 2021년 처음으로 이들에게 한시적 체류 자격을 부여했다.
덕분에 마리나는 몽골 국적으로 등록한 후 한국에서 첫 신분증인 외국인 등록증을 받았다. 이듬해엔 유학생 신분으로 국내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으로 인간으로 인정받은 것 같았어요. 병원에도 못 가고, 모든 걸 다 걱정해야 되는 삶에서 그냥 평범하게 대학에 갈 수도 있게 됐고."
체류자격이 생겨 가장 좋았던 점으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각종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고", "모바일 뱅킹이나 쇼핑을 할 수 있게 된 점" 등을 꼽았다.
그러나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기쁨도 잠시, 마리나에겐 또 다시 불안한 일상이 시작됐다. 대학교 3학년인 마리나는 여전히 한국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해외유학생'으로 대학 진학이 유일한 길
"진정이 받아들여지면 한국인이 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법무부로부터 1년짜리 임시 비자를 받은 마리나는 한국에 장기 체류하기 위해 해외유학생 신분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대부분의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행을 택하고 있다. 국내에 장기 체류하려면 대학 졸업 후 전문 취업비자(E-7)를 받는 것이 현재로선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류상 해외에서 한국 대학에 입학하는 해외 유학생들과 똑같이 분류된 탓에, 유학생들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맞춰 생활하고 비자를 연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리나는 "학비 문제로 대학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제한된 조건 속에서 홀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리나가 갖고 있는 유학생 비자로는 아르바이트도 주중엔 20시간 이하로만 할 수 있다. 유학생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휴학을 할 수도 없다. 국가장학금이나 학자금 대출도 유학생은 대상이 아니다.
또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되면 한국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마리나의 부모님도 몽골로 돌아간 상태다.
"진로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해보고 싶던 때도 있었다"는 마리나는 "지금은 부모님도 안 계시고 생활비도 없고 하니까 그냥 아무 데나 빨리 취업이 되는 데 가고 싶다"고 답했다.
3년째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마리나는 "최근엔 불안장애가 심해져 병원을 바꿨더니 좀 나아졌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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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보다 더 넘기 힘든 취업 관문
겨우 대학의 문턱을 넘어도 한국에 남기는 쉽지 않다. 3년 전 법무부 조치의 수혜를 입어 이미 2년제 대학을 졸업했거나 3, 4년제 졸업을 앞둔 당사자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취업은 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베트남 국적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자란 판, 유리 자매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앞두고 크게 좌절하고 있다.
1년 전 호텔조리학과를 졸업한 22살 판은 비자 만료를 일주일여 앞둔 지난해 9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6개월을 인턴으로 근무한 호텔 조리 업체가 판을 정식으로 채용하기 위해 비자 발급을 신청하자, 법무부로부터 '베트남 국적자는 해당 직무에 채용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은 것이다.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가져야만 전문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어서 주방에 지원했는데, 베트남 사람 중에 주방에 취업하고 불법 체류자로 지내는 사람이 많다고 비자 발급을 아예 막아놨대요."
법무부는 현재 외국인이 국내 호텔, 주방 등에서 일할 수 있는 전문취업 비자를 발급할 때 불법체류율이 40%가 넘는 베트남과 방글라데시 국적자에 한해 취업을 불허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규정은 출입국관리소의 내부지침 형태로만 존재하고 신청자들이 찾아보기 쉽게 안내되지 않아 판은 대학을 다니는 내내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문제는 호텔조리학과를 나온 판이 국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취업비자를 받으려면 전공과 관련된 호텔, 조리 영역에 취업해 바로 이 전문취업 비자(E-7)를 받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다는 점이다.
취업비자를 받지 못한 판은 현재 취업준비용 3개월짜리 임시 비자를 연장해가며 법무부에 주방 취업에 대한 예외적 허용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만약 법무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체류를 연장할 방법이 없다.
"대학에서 성적도 잘 받고 각종 자격증도 따며 열심히 취업을 준비했다"는 그는 "다 뜻대로 되지 않아 많이 우울하다"고 털어놨다.
언니인 유리도 이번 달 영상디자인과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리 역시 졸업과 동시에 비자가 만료되지만 "외국인이란 이유로 취업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비슷한 조건의 한국 국적 친구들은 다 취업을 했다"는 유리는 본인만 "취업을 못하고 있어서 상실감이 많이 크다"고 털어놨다.
나이지리아 국적의 미등록 이주아동 출신 기프트도 "취업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전했다. 그 역시 태어나 한 번도 한국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전화를 하면 제가 (한국어) 원어민이니까 사람들이 다 적극적이에요. 그런데 제 국적을 얘기하면 아무도 다시 연락을 안 해요."
그는 "취업을 해야만 이후에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 해외 유학생으로 분류된 자신들에겐 "그 과정이 너무 어렵다"고 전했다.
겨우 취업 문턱 넘어선 한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
지난해에는 겨우 취업에 성공한 미등록 이주아동 출신 청년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몽골 국적으로 5살 때 한국에 와 26년을 산 태완은 지난 8일 전북 김제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중 무인 건설장비와 고소작업 차량 사이에 끼이는 사고로 숨졌다.
미등록 상태이던 태완은 서른 살이던 2021년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고자 몽골로 자진출국해 1년여 동안 한국 유학을 준비해 다시 돌아왔다. 2년제 대학에 합격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원했던 수도권에 취업하기는 어려웠다.
"제가 거기에 가라고 했어요. 미쳤죠 정말."
태완을 비롯한 미등록 이주아동들을 지원해온 이주와인권연구소 김사강 연구위원은 본인이 해당 업체 취업을 추천했다며 자책했다.
태완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쉽지 않았다. 김 연구위원은 태완이 취업을 준비할 때 "자신보다 성적도 낮은 친구들은 다 좋은 회사에서 연락이 오는데 외국인인 자신에게는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는 단순 생산직에서만 연락이 온다"며 "왜 대학에 갔을까 후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던 태완은 김 연구위원으로부터 외국인이 인구 소멸 위험 지역에 취직하면 일반 취업비자보다 더 나은 거주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법무부는 일부 인구 소멸 위험 지역에 외국인을 유치하고자 장기 거주가 가능한 '지역특화비자(F-2)'를 예외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지난 6월 이 비자를 받아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에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게 된 태완은 그로부터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김 위원은 홈페이지에 올린 추모의 글을 통해 "외국인 등록증을 받고 기뻐하던 태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자신의 남은 목표가 태완이 "몽골 이름 타이반(Taivan)이 찍힌 외국인 등록증이 아닌 한국 이름 강태완이 적힌 주민등록증을 받는 일이었는데, 태완이 떠나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법률 지원 활동 등을 해온 사단법인 두루의 김진 변호사도 태완이 "진작에 좀 더 안정적인 체류 비자를 받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국에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결국은 이렇게 돼 너무 안타깝다"고 심경을 전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인 되기
BBC가 만난 미등록이주아동 출신 청년들은 모두 어렵지만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 모두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며 한국인으로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기프트는 "가본 적도 없는 부모님 나라에 가기가 많이 무섭다"며 "체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숨어 지내더라도 한국이 나을 것"이라 말한다.
판도 "그냥 베트남에 가서 비자 걱정 없이 편하게 살까 몇 번이나 생각해보기도 했다"면서도, "말도 안 통하는 베트남에 가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 비자를 연장해 한국 국적을 얻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이들이 한국에 계속 거주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김사강 연구위원은 미등록이주아동을 '유학생'으로밖에 분류할 수 없는 현 제도를 지적한다.
그는 "여기서 교육받고 여기서 자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일반적인 유학생들과 똑같은 길을 밟아야 하는 건 너무하다"며 "바로 국적을 주진 않더라도 최소한 체류 문제에 있어선 다르게 처우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권위도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유학생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박혜경 인권위 인권침해조사관은 지난해 11월 열린 토론회에서 "성인이 되면 대학교 진학 등의 조건을 통해 체류자격을 연장할 수 있는 상황은, 본인의 잘못 없이 숨어 살다 일정 조건이 되어 비로소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 또 다른 장벽"이라고 발언했다.
김 연구위원은 장기체류 이주아동들에게 한국에 거주할 권리를 부여하는 일은 "국익 차원에서도 생각해볼 문제"라며,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비용을 들여 교육한 청년들을 내쫓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냐"고 물었다.
한국 법원도 이같은 요지의 판결을 한 적이 있다. 지난 2018년 청주지방법원은 한 미등록 이주아동이 낸 강제퇴거 취소 소송에서 "대한민국에서 초중고 정규교과과정을 모두 이수한 원고를 강제로 내쫓는 것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경제적, 인적 피해를 입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이민 역사가 오래된 국가들에선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오랜 기간 거주한 이주아동들을 자국에 편입하려는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다.
영국은 국적법에 따라 18세 미만의 아동 중 대부분의 삶을 영국에서 영위한 16세 이상 아동, 아동의 미래가 명백히 영국에 있는 아동 등은 적극적인 심사를 통해 국적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다.
프랑스 역시 본국에서의 생활 기간, 사회통합 정도, 출신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체류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이던 지난 2012년 '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제도(DACA)'를 만들었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이주 청년 수천 명도 이 제도의 혜택을 봤다. 연방 이민국(USCIS) 통계에 따르면 2023년 3월 말 기준 DACA의 수혜자는 약 57만 명에 달했으며, 이 중 출생지가 한국인 이민자는 5320명이었다.
있는 제도마저 사라질 상황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조건부 체류자격을 주는 현 제도의 시행 기간은 오는 3월 31일까지이지만, 이 제도의 연장 혹은 개정 여부는 만료가 2달도 안 남은 현재까지도 결정이 되지 않았다.
인권위 등 관련 단체들은 이 제도가 지속되어야 할 뿐 아니라 유학생 자격을 부여하는 등의 문제점이 개선돼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법무부가 아직 이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다"며 우려하고 있다.
법무부는 BBC 코리아에 "현재 시행중인 제도의 연장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연장 여부 및 대상자 확대 등 운영 계획에 대해서는 관련 통계와 아동 체류 실태, 각계의 의견 수렴 등을 거쳐 신중히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반이민의 흐름이 한국에까지 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출생한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시민권 제도를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1기 때 이미 불법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의 폐지를 시도한 적도 있다.
마리나는 이런 국내외적인 흐름을 보며 "많이 불안하다"고 말했다.
"세상이 다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