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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류 콘텐츠? 한국 개표방송에 눈 뗄 수 없는 이유

2024.04.11
미션 임파서블의 열차 액션을 패러디해 이재명 대표와 한동훈 위원장의 얼굴이 합성된 그래픽
SBS
SBS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열차 액션'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이번 22대 총선 개표방송에 선보일 예정이다

개표방송은 단조롭고 지루한 경우가 많다. 개표 현황, 출구 조사, 후보 분석 등을 반복하며 자정 넘은 시간까지 방송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선거 날 밤은 다르다. 방송사들이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도 사로잡고자 개표방송 콘텐츠에 심혈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개표방송인데 '보고 또 보는’ 시청자도 있다.

4월 10일 제22대 한국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요 방송사들은 한 달 전부터 예고편을 올리며 경쟁을 시작했다.

총선 후보 경쟁만큼이나 뜨거운 한국 방송사들의 개표 방송은 어떤 것이고,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화제 속 선거 그래픽, 올해는?

KBS의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주인공이 등장한 인포그래픽 예시
KBS
KBS는 선거 당일 개표 방송에 최근 종영한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주인공이 등장하는인포그래픽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한국의 개표방송은 한마디로 스토리텔링과 더불어 인공지능(AI), 정보통신기술(ICT) 등 최신 방송 기술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특히 화려한 그래픽이 화제가 되는데, 인기 영화나 드라마 패러디, 유머 넘치는 자막 등은 '젊은 세대'의 관심을 집중 시킨다.

이번에 KBS는 선거 당일 개표 방송에 최근 종영한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주인공이 등장하는 인포그래픽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후보자 공약 랩 배틀’ 코너에서는 주요 후보들의 아바타가 무대 위에서 공약 정책으로 랩 배틀을 한다.

SBS의 경우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열차 액션'을 떠올리게 하는 블록버스터 '국회행: 자리 쟁탈전'과 더불어, 인기 드라마였던 '천국의 계단' 장면도 패러디할 예정이다.

과거 개표방송 사례를 보면 후보들은 개표 그래픽 속에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포켓몬 고' 속의 게임 캐릭터가 돼 웃음을 자아냈다.

개표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시청자들은 ‘선거 맛집’을 찾아다니며 실시간 라이브 채팅을 통해 방청 후기를 공유하기도 한다.

지난 총선 때부터 이번 총선방송 준비를 하는가, 선거방송을 보도국과 예능국이 협업으로 만드는 것인가, 선거방송 만드는 정성으로 평소에 뉴스를 만들지 그러냐는 둥 반응도 다양하다.

앞선 개표 방송들을 즐겨봤다는 직장인 박은혜 씨(25)는 "말 그대로 약 빤 것 같은데, 그러는 와중에 고퀄리티였던 점이 흥미로웠고 친구나 가족과 함께 볼때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대화주제가 되어서 좋았다"고 했다.

"방송을 통해 계속 (국회의원 후보들의) 얼굴을 보니 정이 들면서 어떤 공약을 내세웠는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찾아보게 됐어요."

30대 시청자인 김재우 씨 역시 비쥬얼 요소 때문에 "개표 시간이 지루함을 넘어 즐거워졌다"고 한다.

김 씨는 "처음에는 주요 정치인들을 너무 풍자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보다보니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마치 올림픽 준비하는 기분'...준비 과정 어떻길래?

대부분의 방송사는 1년 전부터는 팀을 미리 꾸려 선거일 개표방송 경쟁에 대비한다. 단 하루 방송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힘을 모으는 것이다.

지난 2022년 대선 기준 20~49세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SBS의 경우, 이번 총선 개표방송과 관련해 미리 선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6,70명이고 선거일에 관여하는 사람은 약 200여명이나 된다.

SBS 선거방송기획팀에서 이번 총선 개표방송을 준비하는 박하정 기자는 “우리끼리 이야기하길 올림픽 준비를 하는 것 같다고들 한다”고 했다.

“내가 선수가 돼서 그동안 열심히 훈련하고 노력했던 것을 선보이는 느낌, 상대방(다른 방송사)도 열심히 이 시간에 훈련하고 땀을 흘리고 있겠지 이런 생각은 늘 합니다.”

실시간 개표 정보 그래픽 제작의 경우, 기자, 작가를 비롯해 그래픽 디자이너 등이 머리를 맞대고 제작한다.

‘이걸 방송에 내보내도 될까?’ 할 정도로 표현의 자유는 무한정 보장된다. 다만 여러 회의를 거쳐 공정성 여부를 철저히 검증한다.

박 기자는 “젊은 감각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진이 모두 MZ 세대만 있는 건 아니다”라며 “이번 개표방송 관련해선 막 대학을 졸업한 사람부터 경험이 풍부한 4, 50대 등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개표방송도 결국은 보도 프로그램이기에 뉴스 경험이 많은 인력이 중요하다는 것.

개표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카메라를 두고 여러 장소에서 촬영을 하는 사람들
SBS
방송사들은 개표방송에 드라마 촬영 같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기자나 스태프 등이 해당 장면을 촬영해 놓으면 후보자들의 얼굴이 합성되어 나가는 방식이다

총선은 대선과 달리 지역마다 후보가 다양하다 보니 준비할 내용도 많다. SBS의 경우, 한 지역구당 7초 정도 방송이 나가는데 아이디어를 내고 구현하기까지 2달이 넘게 소요되는 것도 있다.

다양한 후보들과 지역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가 있다.

박 기자는 “캐릭터와 세계관(컨셉)이 있는데 시청자분들이 그걸 발견하는 재미를 좀 느끼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선거 그래픽이 화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히 사진을 합성한 것이 아니라, 실시간 득표율 상황에 따라 구현되는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희의 실시간 개표그래픽을 ‘바이폰(VIPON: Voting Information Processing Online Network)’이라고 하는데요. 지난 번에 했었던 우주비행사 그래픽을 예로 들면 득표율 정보가 들어왔을 때 표가 더 적은 후보가 우주선 문이 열리면서 뒤로 밀려나요. 데이터가 들어오면 동선 로직을 넣어서 포맷을 마련해 놓는 겁니다.”

그래픽이 화려할수록 후보들도 바빠진다. 그래픽에 맞는 ‘맞춤 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방송사들은 사전에 후보들의 표정을 촬영한다.

후보들은 카메라 앞에서 아이돌처럼 하트를 날리기도 하고 신나거나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보지 못했던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쾌감을 느낀다.

물론 개표방송이 웃음 코드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지난 2020년 총선의 경우, MBC는 개표방송 오프닝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듯한 그래픽 영상을, SBS는 충남 개표 현황에서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였던 김용균 씨 일러스트레이션을 선보인 바 있다.

박하정 기자는 사회와 정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에 사람들의 호응이 컸다고 말했다.

“경쟁하는 두 후보가 밤바다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나란히 앉아서 같은 바다를 보는 장면을 나타낸 ‘고요의 시간’이라는 바이폰이 있었습니다. 당시 댓글에 ‘정치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막 서로 욕하는 게 아니고 결국 같은 방향을 보는 모습을 생각해 봐서 좋았다’라는 반응이 많았어요."

SBS 바이폰
SBS

외국인도 관심가지는 개표방송…비결은?

이런 형식으로 개표방송을 하는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보니 각종 소셜미디어에선 ‘신박하다’며 외신 기자나 인플루언서들이 관련 밈을 공유하는 일은 흔한 광경이 됐다.

한류 콘텐트가 많이 차용되기에 외국인들의 리액션 비디오까지 나왔다.

미 외교지 포린폴리시(FP)는 지난 2017년 한국의 한 개표 방송에 미드 ‘왕좌의 게임’이나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 등이 대거 차용된 것을 두고 “미친 방식(crazy ways)” 이라고 표현하며 집중 보도했을 정도였다.

해외에서도 관심을 갖는 이유에 관해 조정 SBS 보도본부장은 “민주주의의 속성은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이벤트죠. 후보자들이 정치권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국민들의 선택의 대상으로 정확히 묘사되는데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유쾌하게 볼 수 있는 풍자적 영상과 그래픽으로 더해져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개표방송을 둘러싼 다양한 시선

지상파 방송국의 역대 개표방송 장면들. 우주인과 해리포터에서 영감을 받은 SBS(상단), 인기프로 '전국노래자랑'을 패러디한 KBS(하단 좌측), 지역별 음식을 미니어쳐로 구성한 MBC(하단 우측)
SBS/KBS/MBC
지상파 방송국의 역대 개표방송 장면들. 우주인과 해리포터에서 영감을 받은 SBS(상단), 인기프로 '전국노래자랑'을 패러디한 KBS(하단 좌측), 지역별 음식을 미니어쳐로 구성한 MBC(하단 우측)

물론 한국의 참신한 개표 방송에 긍정적인 반응만 있진 않았다. 화제가 된 만큼 논란이 있었던 적도 있다.

지난 21대 총선 개표 방송 당시, MBC는 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나경원 미래통합당 후보가 맞붙은 상황이 '여성 법관 출신 닮은 꼴 매치'라며 '언니 저 맘에 안 들죠'라는 표현을 썼다.

이 발언을 두고 후보들의 표 대결을 마치 여성끼리의 감정 싸움으로 묘사한 여성혐오 발언이라는 비판이 온라인에서 거세기도 했다.

이 외에도 초반에는 방송사들의 개표방송이 대부분 '젊은 층'의 문법에 많이 맞추다 보니 전 연령대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조 본부장은 “사실은 처음에 이걸 시도했을 때 굉장히 젊고 박진감 있게 했다”며 “그래야 눈길도 더 잡을 수 있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제 연령층이 높으신 분들은 조금 요란스럽다는 반응도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22대 총선부터는 처음으로 50대 이상 유권자가 절반 이상으로 유권자 지형이 바뀐 상황.

이와 관련한 질문에 그는 장년층을 비롯해 다양한 세대를 소구할 수 있는 콘텐츠도 늘리고 있다고 답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그 윗세대도 같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감 요소를 가미해가지고 그걸 넓히고 있는 거죠. 따뜻하고 휴머니즘을 녹인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 본부장은 개표방송이 '진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승부에만 얽매이는 개표 결과를 소화하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며 "선거 방송 사이사이에 토론이라든지 패널 토크 등을 통해서 이번 선거가 갖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 등도 모두 짚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역대 총선의 연령대별 유권자 비율 표시한 그래프
BBC

시청자들은 개표방송을 통해 정치와 투표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정치가 친근하게 느껴졌다는 반응도, 관심이 일회성에 그친다는 평도 있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 이다혜 씨는 "재밌는 개표 방송이 영상 자료와 재미에 민감한 젊은 계층에게 적어도 투표만큼은 독려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또 "후보자들에게 씌워지는 온갖 밈 CG들이 정치인들의 권위주의적인 이미지 인식을 전환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나아가 정치에 대한 친근감을 높여줄 것이라 기대한다"라고 했다.

여러 방송 모니터링 활동을 해왔다는 시청자 김현재 씨의 경우 "아쉽게도 개표 방송만으로 정치나 선거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생기지는 않았다"라며 "후보도 많고, 공약을 일일이 확인하기 번거로운 상황에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을 두게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김춘식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BBC 코리아에 "기자들 세계에서는 개표방송이 양보할 수 없는 아이템인데, 뉴스보다는 약간 이벤트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고 평했다.

그는 또 “분명 한국 방송사들의 개표방송은 재밌고 오락 요소도 많다”면서 “(투표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시선도 사로잡았기에 당일 방송을 놓고 보자면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선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평가를 내릴 순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개표방송에만 많은 힘이 실리는 언론 환경에는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전체 선거 보도로 보자면 개표방송 전에 유권자가 투표에 참조할 만한 그런 사항들에 관한 평가 정보는 별로 없거든요. 출산 문제든, 교육 문제든, 의료 문제든 정책 환경을 감시하는 데 방송사들이 개표방송 제작만큼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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