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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된 과학자'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은 누구?

2024.06.04
1991년 당시 ‘지금 당장 공정 무역과 민주주의를 이행하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의 사진
Personal archive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은 1991년 학생 시위로 ‘스탠포드 데일리’ 1면을 장식한 바 있다

1987년 1월, 멕시코 최대 공립대학인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UNAM)에선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안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누가 총장실에 시위 깃발을 걸겠냐”는 시위 지도자의 외침에 “저요!”라고 외치며 앞으로 나선 건 24살의 물리학도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라는 이름의, 이 학생은 좌파 성향의 집권 ‘국가재생운동(모레나)’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멕시코 국민들은 그를 그저 ‘클라우디아’라고 부른다.

현재 61세로 두 자녀의 어머니이기도 한 셰인바움은 환경공학 박사 학위 소유자이자, 인구 약 900만 명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시장직을 역임한 바 있다.

그리고 오는 10월 1일부로 멕시코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예정이다.

학생 시위 시절에 대한 질문에 셰인바움 당선인은 “난 언제나 그렇게 모험심이 강했다”면서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책임감이 더 커졌다”고 말한다.

셰인바움이 대통령으로서 이끌 멕시코는 인구는 1억3000만 명이며, 빈곤율이 36%에 달하고, 미국과 국경을 접한 국가다. 그리고 현재 갱단에 의한 여성 살해 및 폭력이 심각한 상태다.

올해 5월 대선 운동 중인 셰인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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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멕시코 텍스코코 지역에서 대선 운동 중인 셰인바움

셰인바움과는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고문이기도 한 디애나 알라콘은 셰인바움이 책임감이 강하긴 하지만, 자기 신념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셰인바움이 반항적인 면모를 버린 건 아닙니다. 이러한 사회 운동에서 셰인바움의 위치는 변했지만, 어릴 적부터 지녔던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겠다는 신념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지난 6년 동안 멕시코에선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현 대통령이 집권 중이다. 이름 앞 글자를 따 ‘AMLO’라는 별명으로도 더 잘 알려진 그는 퇴임을 앞두고도 지지율 60%를 자랑하며, 경제 상황도 안정돼 있다. 그리고 멕시코 국민들이 미래에 대해 낙관할 수 있도록 했다. 셰인바움 당선인도 이를 이어가기를 바랄 것이다.

멕시코의 대통령직은 6년 단임제로 AMLO 현 대통령의 재출마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여섯 명 정도가 거론됐으나, 그중 여성은 셰인바움 단 한 명뿐이었다.

셰인바움은 멕시코를 변화시키겠다는 AMLO 대통령의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만이 지닌 다른 점도 있다. 우선 셰인바움은 수상 경력이 있는 과학자이며, 자신의 이러한 연구 결과를 성공적으로 공공 정책에 적용한 바 있다.

정치적인 어린 시절

발레복을 입고 있는 어린 셰인바움
Personal archive

셰인바움은 1962년 6월 24일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좌파 성향의 급진적인 운동가이자 학계에선 선구자였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로스 셰인바움은 1920년대 리투아니아에서 멕시코로 이주한 아슈케나지(동부 및 중부 유럽 유대인 후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업가이자 화학자였다.

어머니 애니 파르도는 1940년대 불가리아에서 건너온 세파르드(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유대인 후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생물학자이자 의사였다.

셰인바움은 수도 남부의 중상류층 동네에서 자랐다. 이들 가족은 식사 시간마다 정치에 대해 논했으며, 부모님은 교도소로 무장 투쟁 운동가 친구들을 면회하러 갈 때 종종 셰인바움을 데리고 가곤 했다.

셰인바움은 학생들의 자율성을 장려하는 비종교적 학교에 다녔는데, 가톨릭 국가인 멕시코에선 드문 일이다. 셰인바움은 이곳에서 꼼꼼하고 에너지 넘치는 성격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셰인바움은 결론을 내리기 전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부터 셰인바움와 친구였다는 알라콘은 셰인바움에 대해 “수줍음이 많다. 그래서 진지한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함께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따뜻하고, 유머러스하며,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셰인바움과 남편 헤수스 마리아 타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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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운동에 나선 셰인바움과 남편 헤수스 마리아 타리바

셰인바움은 종종 “나는 ‘68운동’의 딸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의 부모님도 참여했던, 당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사회 운동을 가리킨다.

1980년대도 셰인바움에겐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 멕시코에선 기존 정치 계급에 대한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정부에서 민간 부문으로 경제의 축이 이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셰인바움에게 이는 멕시코 국민들이 겪는 불평등 및 빈곤을 의미였다.

셰인바움의 마음속엔 언제나 정치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남편인 카를로스 이마즈는 좌파 성향의 정치가였다. 이혼 후 셰인바움은 대학에서 처음 만난 금융 리스크 분석가인 헤수스 마리아 타리바와 지난해 재혼했다.

아울러 셰인바움은 학업에도 열정을 쏟았다. 박사 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멕시코 원주민들의 효율적인 목재 화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문도 저술했다.

어떻게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됐나

자전거를 타고 있는 셰인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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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멕시코에서 벌어진 두 가지 정치적 사건을 통해 셰인바움은 오늘날 대통령직 당선까지 향하는 정치로 발을 들이게 된다.

우선 ‘제도혁명(PRI)’당이 7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대선에서 패배했다. 게다가 수도 멕시코시티에선 가난한 남부 타바스코주 출신의, 좌파 성향의 급진적인 운동가가 시장으로 당선됐다. 바로 AMLO 현 대통령이다.

멕시코 국립자치대의 활동가인 수학과 교수가 AMLO에 셰인바움을 환경부 담당자로 추천하면서 이 시기 셰인바움은 AMLO와도 처음 만나게 된다.

AMLO는 셰인바움을 장관으로 임명하며 두 가지 임무를 맡겼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도시로 손꼽히는 멕시코시티를 정화하고, 멕시코시티 내 최대 고속도로인 페리페리코의 2층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셰인바움은 이 두 임무를 모두 완수했다.

이후 AMLO가 이끄는 시 정부가 2006년 선거에서 패배하자 셰인바움은 다시 한번 학계로 돌아왔고, 기후 변화를 연구하는 연구팀에 합류한다. 이 연구팀은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그러는 중에도 정치에 아예 등을 돌린 건 아니었던 셰인바움은 2006년과 2012년 AMLO 후보가 이끄는 대선 캠페인의 대변인으로도 활동했다. AMLO는 이 두 대선에서 모두 낙선했다.

그러던 2015년, 셰인바움은 직접 정치적인 주목을 받게 됐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멕시코시티 내 최대 자치구인 틀랄판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것이다.

게다가 3년 후인 2018년, AMLO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자 셰인바움은 멕시코시티의 시장이 되며 AMLO의 후계자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세간의 비난과 각종 의혹도 함께 뒤따랐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현 대통령과 포옹하는 셰인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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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LO’로 알려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현 대통령과 셰인바움

2017년 푸에블라주에서 진도 7.1의 강진이 발생했을 당시, 틀랄판에선 부정부패로 인해 부실하게 지어진 학교 건물 하나가 무너져 어린이 1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반대파와 일부 유가족은 이러한 문제가 처음 보고됐을 당시 학교 건물의 출입을 막지 않은 셰인바움을 비난했다.

그리고 2021년엔 지하철 사고가 발생해 27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셰인바움은 자신이 속한 당 소속이 시장에 재직하던 2014년~2015년 벌어진 건설 결함을 밝혀내고자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많은 이들이 셰인바움이 희생자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비난했다.

이번 대선 기간에도 이러한 스캔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학문적 업적에 대한 표절 의혹 및 셰인바움은 그저 AMLO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비난도 잇따랐다.

알라콘은 “나는 살면서 셰인바움에게 왜 이렇게 정치라는 힘든 일을 하는지 딱 두 번 물어봤다. 이에 대해 셰인바움은 두 번 모두 ‘이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셰인바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셰인바움은 권력자가 되고자 권력을 원하는 게 아닌,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되다

공사 현장을 찾은 AMLO 대통령과 셰인바움 당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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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시티 시민의 60%가 셰인바움 시장을 지지했다. 셰인바움 당선 이후 치안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도 부분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자전거 도로가 늘어나고, 4.8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도 건설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대처야말로 셰인바움의 최대 정치적 성과로 손꼽힌다. 이는 셰인바움이 자신이 AMLO와는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 부분이기도 했다.

우선 셰인바움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하자 멕시코시티를 봉쇄했으나, AMLO 현 대통령은 그 위험성을 축소하고자 했다. 아울러 셰인바움은 AMLO와 달리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셰인바움은 대규모 백신 접종을 장려했지만, AMLO는 회의적이었다.

그런데도 셰인바움은 AMLO가 가장 총애하는 후계자가 됐다.

이 두 사람을 인터뷰해 본 정치 평론가 호르헤 제페다 패터슨은 “시간이 지나면서 AMLO 또한 셰인바움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면서 “AMLO는 셰인바움이 책임감 있게 일하고, 정치인은 아닐지라도 굉장한 공공 행정가임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대통령으로서의 셰인바움에 대해선 결국 AMLO가 결정권을 쥐게 될지, 셰인바움이 군 고위 인사와 주지사 등을 견제할 수 있을지, AMLO의 실용적인 대미 정책을 이어 나갈 지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한 상태다.

알라콘은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셰인바움은 셰인바움답게 행동하리라는 것”이라면서 “80년대 당시 셰인바움은 대학 총장실에 깃발을 내걸어야 할 때 해냈으며, 이젠 아예 대학을 건설할 차례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는 셰인바움이 셰인바움답게 일하며 이를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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