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비출산·비연애·비성관계, 트럼프 당선 후 미국서 주목받는 '4B 운동'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이후 한국의 '4B 운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비혼·비출산·비연애·비성관계를 의미하는 이 4B원칙을 추구하는 여성들은 누구일까.
민주(가명) 씨는 자신이 올렸던 온라인 게시물이 많은 외국인 여성들의 관심을 받았던 날을 기억한다. 짧은 게시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남성들은 낙태가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여성들과의 성관계는 원하죠. 이 역설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4B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27세 민주 씨는 취재를 하며 만난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가명 사용을 요청했다. 자신을 향한 조롱이 두려워서다.
한국의 일부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활성화된 4B 운동은 남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의미를 둔다. 이들은 사회에 여전히 여성혐오가 존재하며, 이 때문에 4B운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한다.
민주 씨는 "데이트 폭력뿐만 아니라 이별을 시도하다 살해 당한 여성들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심심치 않게 듣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 운동이 최근 미국에도 확산하고 있다.
특히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현재까지 4B에 대한 관심은 증가하고 있으며, 온라인 상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4B는 무엇인가?
4B는 비연애, 비출산, 비성관계, 비혼이라는 네 단어에서 기원했다.
'비(非)', 즉, 앞서 등장한 모든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선(가명) 씨는 4B가 "하나의 개념이자, 운동, 그리고 여성에게 있어 매일 실천하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 모임 '비웨이브(B-Wave)'를 과거 이끌었던 이력이 있는 지선 씨는 4B가 몇몇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모임으로부터 본격으로 이 개념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그는 '미혼'이라는 단어가 '혼인'을 완성된 상태로 보는 가부장적 개념이라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이를 거부하고자 등장하게 된 용어가 '비혼'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비연애, 비출산, 비성관계의 개념들이 여성의 자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더해진 것이라고 지선 씨는 덧붙였다.
"4B는 파업이 아닙니다. 파업은 '의무'를 전제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존중하고자 선택한 행동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4B란 남성에 대한 거부보다는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입니다. 연애와 성관계, 혼인, 출산은 현실에서 여성을 약하게 만듭니다."
지선 씨는 또 '6B'라는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6B는 기존의 4B 원칙에서 비소비(여성 착취를 행하는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와 비돕비(비혼 여성이 서로를 돕는 것)가 더해진 개념이다.
4B에 대한 논문을 작성한 공연화 씨는 자신이 4B 원칙에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를 기억한다.
"엄청난 사건사고들로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강남역에서 23세 여성이 살해당했던 일과 여성들을 몰래 촬영하는 '몰카(몰래카메라)', 그리고 이러한 영상들이 무분별하게 공유됐던 '웹하드 카르텔' 등 일련의 사건들을 언급했다.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결혼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갖는 것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지난 2016년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은 34세의 남성이 공중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무차별하게 살해한 사건으로,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이후,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여자라서 살해당했다" 등의 슬로건을 외쳤다.
공 씨는 한국 여성가족부가 2020년 발표한 설문조사 통계에서 42%의 남성이 '최소 한 번 이상의 성매매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이 통계가 발표된 이후 그는 주변 친구들이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저도 사람인데, 당연히 가끔은 외롭기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죠. 그런데 저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관계에 투자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오히려 여성들을 돕는데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4B를 추구하는 한국 여성들
민주 씨에게 4B는 관계에서 비롯될 수 있는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정신적, 신체적으로 보호하는 방식이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들은 대개 적은 형량을 선고받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연애는 마치 남성에게 나를 해쳐도 되는, 혹은 더 나아가서 내 삶을 앗아도 되는 카드를 쥐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것도 아주 적은 대가로요."
온라인 상에서 '곰새'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30대 초반의 여성 또한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4B를 추구하게 됐다고 전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들은 모두 제 난소의 기능을 복구하는 데 집중했어요. 그들에게 가장 큰 걱정은 제 '생산성'이었죠. 의사 선생님은 저에게 혹시 모르니 난자를 얼리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제 병과는 상관 없이 호르몬을 투입하고, 난자를 채취하는 일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난자 냉동을 권유한 원천적인 이유는 여성의 몸을 생산의 도구로 봤기 때문이더라고요."
'곰새' 씨는 4B가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는 아니더라도, 조용히 자신들의 생산성을 제어하기로 결심한 여성들의 저항이라고 설명했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간과하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여성혐오와 반페미니즘에 맞서는 보이콧이죠."
이 여성들은 한국에서 4B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민주 씨는 자신의 남성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4B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공개적으로 4B를 지지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건 좀 위험해요. 비혼 여성들을 포함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입장을 인터넷에 밝히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현장을 많이 목격했어요."
연화 씨는 현재 호주에 거주 중이다. 그는 한국이 자신에게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남녀 차별을 경험하는 것에서 나아가 단순히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고 페미니즘을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위협의 대상이 되기도 했어요. 심한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4B 운동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할 때마다 저는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이 찍혔어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자체는 한국 사회에서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해요."
그는 "한국이 4B 운동의 시초가 된 이유는 여성혐오가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국가로 번져 가는 4B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임신중절 수술에 대한 반대 입장은 트럼프의 첫 임기 때 확연히 드러난 바 있다. 트럼프는 낙태권과 관련해 작년 4월 "각 주(州)에서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트럼프의 행보로 인해 낙태금지법 시행 가능성에 대한 미국 여성인권 단체들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공화당이 대통령직과 상하원을 장악하고, 대법원에서도 공화당 주류 세력이 다수 자리 잡은 지금, 일부 전문가들은 낙태금지법이 통과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한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과거 여성에 대한 발언과 성추문 사건, 그리고 대선 경쟁자였던 캐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을 향한 발언 논란 등도 재조명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일부 여성들이 남성을 "보이콧"하고 4B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4B 운동 관련 게시글들은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으며, 온라인 검색어 데이터는 4B에 대한 검색 기록이 지난 몇 달간 급증한 것을 보여준다.
연화 씨는 4B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현상이 긍정적이면서도 씁쓸하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한국 여성들이 시작한 4B 운동이 글로벌 페미니스트 담론 중 하나가 됐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씁쓸하기도 해요. 미국은 한국의 페미니즘보다 100년 정도 앞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곳에서 4B를 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미국에서조차 여성들이 안전하고 동등하게 살아가는 게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봅니다. 여성이 마주하는 어려움이 보편적임을 보여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4B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낮은 편이다. 게다가 이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썩 긍정적이지 않다.
김현중 씨(30)는 4B에 대한 개념을 3년 전, 온라인 상에서 처음 접했다고 말했다.
"4B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일부는 다른 여성들이 자신과 같이 4B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욕하기도 하더라고요. 그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부는 4B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미림 씨는 "4B를 알고 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으로 4B를 검색했다.
"방금 검색해보니까 왜 일부 여성들이 4B를 추구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요. 하지만 저한테는 삶에 있어서 경제적 어려움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물가가 계속 오르니까, 연애를 하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일부 한국 여성들에게 4B는 삶의 계획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개념이다.
지난 8년 간 4B의 원칙에 따라 살아오고 있는 '곰새' 씨는 미국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4B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4B는 일에 대한 동등한 대가, 이런 혜택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내 몸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되찾는 겁니다. 남성들이 결코 맞서 싸우거나, 애초에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던 그 권리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