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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소녀, 총을 들다…한국 최초의 여성 해병이 기억하는 한국전쟁

3시간 전
고순덕 해병 4기 한국 최초의 여성 해병
BBC 코리아/최유진

"북한군이 처음에 우리를 보고 '오, 여자네!' 하면서 비웃더라고. 그런데 우리가 총을 쐈더니 무서워서 도망갔어."

1950년 어느 가을, 산 위에서 훈련 중이던 여성들이 북한군과 우연히 마주쳤다. 총을 들고 맞선 이들 가운데는 열다섯 살의 고순덕 씨도 있었다.

고순덕(92) 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국 최초의 여성 군인이다.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BBC는 제주에 사는 고 씨를 만났다. 그의 집 입구에는 '국가유공자' 문패가 걸려 있었고, 거실 벽에는 오래된 흑백사진과 표창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총을 든 소녀는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됐지만, 해병으로 살았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해병4기 전우회' 회장인 고 씨는 해병대 마크가 새겨진 군복과 모자를 꺼내며, 꽃다운 열다섯에 군에 입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거실에 사진과 상들이 진열돼 있다.
BBC 코리아/최유진

'군대 갈 줄은 상상도 못했죠'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이후,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며 전국 곳곳에서 병력 충원이 시급해졌다. 제주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제주여자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 씨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인들에게 징집됐다.

"신체검사 한다고 줄을 서라길래 그냥 섰어요. 그렇게 군대에 갈 줄은 상상도 못했죠."

170cm이 넘는 큰 키로 눈에 띈 그는 제주 여성 126명으로 구성된 해병대 4기로 선발됐다. 이들 가운데는 여중생뿐 아니라 미혼 여교사, 그리고 육지에서 피란 온 여성들도 있었다.

고 씨는 자원 입대한 총 3000여 명의 해병 대원들과 함께 제주에서 진해 해군통제부로 이동했고, 40일간의 신병 훈련을 받았다.

한편 가족들은 그의 입대 소식에 "말로 다 못할 만큼 놀랐다"고 고 씨는 회상했다.

"아들도 아니고 딸을 군인으로 보낸다니까, 우리 아버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대요."

고 씨의 아버지는 결국 딸을 따라 진해 해군통제부까지 함께 갔다. 훈련소 앞에서 눈물을 닦으며, 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아버지가 말했어요. '마음 크게 먹고, 울지 말아라. 앞만 딱 보고, 선생님 말 잘 들으면 너는 뭐든 해낼 수 있다.'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해요."

고순덕 씨가 과거 사진을 보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BBC 코리아/최유진
제주 여성 126명으로 구성된 해병 4기는 한국 최초의 여성 해병일 뿐 아니라, 한국 군 역사상 최초의 여군이기도 하다

'여자라고 봐주는 거 없었어요'

총을 멘 해병대 참전 용사들
고순덕
여성 참전 용사들은 남성과 똑같이 총을 메고 훈련을 했다

고순덕 씨는 M1 소총을 들고 제식훈련, 총검술, 포복 훈련, 실탄 사격까지 남성들과 똑같은 강도로 훈련을 받았다. 그는 "여자라고 밥을 더 주는 것도, 훈련을 덜 하는 것도 없었다"고 전했다.

매일 새벽 5시에 기상해 밥 먹는 시간을 빼고 하루종일 훈련이 이어졌다. 생리 중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건 미리 단도리를 해야 해.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안 돼. 용서가 없거든."

고 씨는 생리 때마다 밤을 새워 팬티에 천을 꿰매어 준비했다고 회상했다.

그 와중에도 사격 실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 씨는 "총 시험 보러 가면 100점 맞았다"며 "제일 어린 내가 제일 먼저 합격해서 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남자와 같은 강도로 훈련을 받고,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며 복무를 이어간 그는 "여자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몸으로 증명했다.

"남자가 하는 일, 왜 여자가 못해요? 다 할 수 있어요. 해보니까 못하는 일이 없더라고요. 무서운 것도 없고요."

1950년 10월, 고 씨는 해병 신병대를 수료하며 제대를 했다. 당시 전황이 다소 호전되자 고 씨와 함께 일부는 귀가 조치됐고, 나머지는 행정·의무·통신 등 후방 업무에 배치돼 복무를 이어갔다.

해병4기 한국전쟁 참전유공자들
고순덕
해병 4기 여성 126명은 전쟁 중 각자 복무를 마친 뒤 무사히 귀가했다. 70여년이 지난 현재 생존해 있는 이는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제대 후 계속된 '삶의 전장'

고 씨는 제대한 뒤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군대 갔다 왔으면 학교 보내줘야지, 왜 다시 군대로 내보내냐고. 내가 훈련했던 걸 (후임들에게) 가르치래요. 분하더라고요. 만약 공부를 했으면, 내가 뭐가 됐을지 모르잖아요."

그는 서류상 제대 조치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훈련병 교육과 보조 업무 등을 맡으며 3년간 비공식적인 복무를 이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열다섯의 소녀는 열여덟이 되어서야 군복을 벗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전장'과 다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남편을 젊은 나이에 떠나보내고 여섯 남매를 홀로 키워야 했다.

"진짜 눈물도 없어. 오히려 독해져. 마음 약하면 병 나요. 더 그냥 뛰어 댕겨야 하고 잠도 없어. 생각해보면 인생살이 참 기가 막히게 살았어."

그는 남의 밭(과수원)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냈다고 말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한 공로로 1989년에 '장한 어버이'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고 씨의 삶은 고됐지만, 군대에서 익힌 단련된 의지가 그를 버티게 한 힘이 됐다.

전쟁 중 다친 어깨와 무릎은 평생 불편을 안겼지만, 그는 이를 불운이 아니라 '얻은 것'이라 여겼다.

"전쟁판에 가서 총대 메고 다쳐서 병신된 걸 섭섭해할 게 아니야… 돌아보면 다 얻은 거예요. 거기에 약이 다 들어있더라고요."

전쟁의 상처보다 '나라의 무관심'이 더 아팠다

할머니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BBC코리아/최유진
2025년 5월 기준, 생존한 6·25 참전유공자는 전국에 3만216명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돌봄 공백 속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제주에 홀로 사는 고순덕 씨의 하루 식사는 서울에 사는 막내딸이 배달앱으로 보내는 도시락 두 끼에 의존한다.

식비만 한 달에 150만 원가량. 그러나 입맛이 없고 혼자 식사하는 일이 쉽지 않아, 냉장고에는 음식이 그대로 쌓이기 일쑤다.

막내딸 박숙명 씨는 "한 번씩 제주에 내려가 냉장고에 쌓인 음식물을 버리는데, 치울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밝혔다.

고 씨의 거동은 날로 불편해지고 있지만, 공공의 돌봄은 좀처럼 닿지 않는다. 참전유공자 자격으로 국가보훈처 지정 병원에서 진료비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일상에서 자주 찾는 한의원은 감면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다. 지난 2년간 지원받던 안마 서비스도 곧 종료될 예정이다.

박 씨는 "나라에서 돌봐준다고 해도, 정작 머리 감겨주는 기본적인 일은 하나도 해주지 않는다. 결국 요양사를 사비로 부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긴급 상황에 대비한 응급벨 설치도 쉽지 않다. 그는 "신청했더니 몇 년을 기다리라 했다"며 "누가 돌아가셔야 제 차례가 온다"고 토로했다.

현재 고 씨는 매달 참전명예수당 45만 원과 생계지원금 10만 원, 총 55만 원의 지원을 받지만, 실질적인 노후 돌봄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다.

박 씨는 "지금 어머니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관심'이다. 찾아가서 안부라도 묻는 것, 외로움을 덜어주는 게 더 절실하다"고 했다.

2025년 5월 기준, 생존한 6·25 참전유공자는 전국에 3만216명이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돌봄 공백 속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최근 한 6·25전쟁 참전 용사가 생활고로 식료품을 훔치다 적발됐으며, 현재 단칸방에서 어렵게 지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고 씨는 나라가 참 무심하다며 섭섭함을 털어놨다.

"나라에서 우리를 키워주라, 봐주라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나라 일을 했으면, 그게 자기네 일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럼 다쳤거나 죽은 사람 있으면 그 과정은 살펴줘야 할 거 아니야. 그거 하나 바라는 거지. 이렇게까지 나라에 일 한 사람 어디가 있어. 나라가 너무 무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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