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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여섯 개 다녀요'…아이돌 꿈꾸며 'K팝 조기교육' 받는 아이들

2024.05.11
무대 의상을 차려 입은 아이돌 지망생
BBC
아이돌 지망생 박소율(11)·김서희(12)·이연주(12) 양이 한 행사장에서 K팝 댄스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걱정되는 거요? 가끔 코피가 나요. 열 시간 동안 연습한 적도 있어요.” (K팝 아이돌 지망생 박지율 엄마)

대구에 사는 박지율(10) 양은 정식 오디션 반에서 K팝 아이돌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약 1년 반 동안 댄스, 보컬, 작사, 작곡, 기타, 연기 등을 배웠다.

박 양은 국내 유명 기획사인 JYP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이 되는 것을 목표로 평일 방과후뿐만 아니라 주말에는 하루 종일 연습에 매진한다.

박 양의 엄마 정모 씨는 한 달에 약 300만 원이 넘는 학원비를 부담하고 있다. 또한 서울에 있는 연기학원에 딸을 데려다주기 위해 매주 대구와 서울을 오간다.

“제가 힘들죠. 아이는 힘들어하지 않아요. 워낙 좋아하니까요" 정모 씨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모 씨가 가장 걱정하는 건 아이가 다치는 것. 박 양은 하루 종일 연습하다 코피를 쏟거나, 안무 연습 중 인대 부상으로 한 달간 깁스를 한 적도 있다.

어린 나이에 가혹한 트레이닝을 받는 게 아니냐는 걱정과 의심의 눈초리에 그는 “부모가 단순히 시켜서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못 이긴다”며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아이돌 지망생 박지율 양
BBC
박지율 양은 K팝 아이돌이 되기 위해 학원을 여러 군데 다니고 있지만, 그 과정이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K팝, '엘리트 예체능' 되다

“나는 하고 싶은 거 못했으니까, 너는 해." 당진에 살면서 아이돌을 꿈꾸는 딸, 강소율(가명·13) 양의 엄마가 말했다.

강 양은 K팝 ‘주말 입시반’에 들어가 있다. 주말 입시반은 예체능계 고등학교 입시를 대비해 보컬, 댄스를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입시 선곡과 입시작품 안무를 준비하고, 모의 실기 및 모의 면접도 함께 대비한다.

강 양은 입시와 함께 오디션도 준비 중이다. 학원에서 월말 평가를 보고 모니터링과 피드백을 받는 등 체계적으로 아이돌 준비를 하고 있다.

K팝 주말 입시반의 수업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강 양의 어머니는 “해야 하니까” 하는 공부가 아니라 “아이가 좋아해서” 자발적으로 춤과 노래를 배운다고 말한다.

강 양의 엄마도 서울에 있는 학원으로 딸을 데려다주기 위해 두 시간 반 거리를 오가며 ‘픽업 맘'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10~20년 전 사회 분위기와 달리 “이제 유튜버나 아이돌과 같은 직업이 인정받고, 많이 안정화 되어서 (자식의 꿈이 아이돌이라면) 부모가 말리기보다 서포트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아이돌 문화를 연구하는 이종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는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K팝 아이돌의 글로벌한 성공은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하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님도 변화시켰다"며 “K팝 관련 학원도 이러한 부분을 강조해 마케팅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는 K팝이 “엘리트 예체능화” 됐다고 주장했다.

피겨, 축구, 피아노 등과 같은 예체능 분야에서 어린 나이에 재능을 발견하면 일찍 전문 교육을 받고 성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K팝 시장이 커지면서 아이돌 육성 시기가 일찍 당겨지고, 방법은 더 전문화됐다는 설명이다.

또한 차 평론가는 요즘 아이돌 지망생 부모는 “중산층 이상에 학력도 높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며 “시장 이해도가 높고, 아이들이 체계적으로 잘 관리받을 수 있는 학원을 선별해서 고른다”고 덧붙였다.

블랙핑크 무대
Getty Images
이종임 외래교수는 4세대 아이돌 육성 방식이 "방식이 더 고도화되고, 과정이 세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4세대 아이돌은 어떻게 육성되나

4세대 아이돌 육성 시기는 더 앞당겨지고, 트레이닝 강도도 더 세지고 있다. 물론 실제 아이돌 데뷔로 이어지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아이돌 지망생 위하리(13)의 롤모델은 걸그룹 아이브(IVE)의 안유진. 위 양은 학원 여섯 개를 넘게 다니고 있다. 보컬과 댄스는 기본, 뮤지컬, 연기 학원, 기타 학원, 그리고 언어 공부까지 병행하고 있다.

지금의 아이돌 육성 과정은 한국의 사교육 중심 입시 문화와도 닮은 부분이 있다.

1세대 아이돌은 길거리 캐스팅 등 지역에서 춤이나 노래로 이미 유명한 10대들을 캐스팅하는 방식이었다. 2세대부터 본격적으로 K팝 아이돌 ‘육성’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4세대라고 해서 (아이돌 육성 방식이) 다르게 운영되는 건 아니”라면서도 "기존의 방식이 더 고도화되고, 과정이 세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약 8세에서 10세 사이 아이가 춤과 노래에 흥미를 보이면 부모는 아이를 지역 소규모 단과학원을 보낸다. 아이가 재능을 보이면 3대 기획사 보컬리스트 출신 학원이나 학원형 기획사로 옮긴다. 학원에선 기획사 오디션을 잡아주고, 오디션을 합격을 하면 그때서야 아이돌 기획사 ‘연습생’ 신분이 된다.

이처럼 K팝 아이돌 연습생은 단계별 성장 과정을 거친다.

한편 대안학교 역할을 하는 아이돌 육성 학원도 있다. 작년 3월 SM엔터테인먼트는 보컬·댄스·프로듀싱·모델·연기 전공생을 키운다는 목표로 대치동에 ‘SM유니버스(SMU)’ 학원을 열었다.

SMU는 법적으로 학원이지만 사실상 학교처럼 운영된다. 주 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업이 이어진다. 그래서 SMU에 합격하면 학교를 자퇴해야만 한다.

역설적으로, 아이돌 육성 학원은 아이돌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들의 일자리가 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나 아이돌로 데뷔를 해도 큰 성공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매년 늘어나고, 그들이 일할 직장으로서 단과학원이나 학원형 기획사 등이 부상하면서 케이팝 관련 학원이 증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건강한 성장 방해할 수도'

한국 가요계 2세대 전성기를 거친 가수 김모 씨는 같은 소속사에 많은 아이돌 후배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봐왔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가수는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건강한 자아가 형성되기 전 컨셉이란 틀에 자신의 인격을 맞추는 걸 경계해야 한다”며 “모든 스태프가 아이돌을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쓰며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공장 상품으로 키운다면 아이돌 개인은 자립할 힘을 잃는다"고 지적했다.

“모든 것을 컨셉에 맞춰 관리를 받아온 아이돌 친구들은 혼자가 되어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립하는 일을 어려워해요. 컨셉이라는 언어로 자신을 대하다 보니 진짜 자기를 드러내는 게 되려 어색해지고, 그 부작용들이 쌓여 우울증이 오기도 하죠.”

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이돌 사교육 열풍을 K팝 시장의 “과성장 증후군"의 한 형태로 진단했다. 빠르게 성장하고 빠르게 결과를 내려는 K팝 시장의 문제점이 아이돌 육성 방법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설명이다.

그는 “희박한 가능성을 향해 어린 나이에 영혼과 육체를 갈아 넣는 행위는 위험하다”며 K팝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 확대 및 과몰입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아이돌 시장의 경우 경쟁은 심한데 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기보다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목표에만 집중하고, 성공을 위해 완벽한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우울증의 위험이 높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청소년들에게 “또래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과 교류도 중요한데, (아이돌 준비에 매진하면) 상업의 최전선에 있는 기획사 관계자들과 주로 소통을 하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와 성공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학습하게 된다"는 문제점도 짚었다.

최근 조사 결과, 아이돌 준비 단과 학원은 보컬과 댄스 같은 기술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멘탈 관리 수업은 병행하고 있지 않았다. 한편 SMU와 같은 큰 종합학원에선 멘탈 관리 수업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아이돌 지망생 강소율 양의 엄마는 “아이돌은 남이 나를 사랑해줘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지 않냐며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게 어렵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모두가 널 사랑할 순 없다”고 미리 알려주고 있으며, “힘든 일이 있을 때 항상 가족이 뒤에 있다"고 응원해주는 등 아이의 멘탈 관리를 위해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아이돌이 “성공하지 못할 확률이 높은 직업이라는 걸 알지만, 본인이 원하는 걸 성취하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을 겪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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