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시민권' 제한하겠다는 트럼프…전 세계의 시민권 부여 원칙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 영토에서 태어난 모든 이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 시민권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한 법적으로 제동이 걸린 상태로, 이민자 가족들은 불확실성에 불안해하고 있다.
거의 160년간 미국의 수정헌법 제14조는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자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보장해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이번 행정명령은 해당 조항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어 미국에 불법적으로 혹은 임시 비자로 들어온 이들이 미국에서 낳은 자녀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고자 한다.
해당 정책은 2025년 2월 19일 이후에 출생한 유아에게만 적용되며, 그 이전에 태어난 자녀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전 세계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원칙은 무엇일까.
출생지주의 채택 국가는?
사실 속지주의, 즉 출생지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보편적인 원칙이 아니다.
출생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은 미국을 포함한 약 30개 국으로, 대부분 아메리카 대륙에 속해 있다. 자국 영토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반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경우 다수의 국가가 출생지와 관계없이 자녀가 부모의 국적을 물려받는 속인주의, 즉 혈통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이 외에 두 가지 원칙을 병용해 영주권자의 자녀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국가들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존 스크랜트니 교수는 출생지주의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흔하긴 하지만, "각 국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이를 발전시켰다"고 언급했다.
"예를 들어 노예나 해방 노예들도 시민으로 인정한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았던 국가들도 있다. 역사는 복잡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해방된 노예와 그 후손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고자 수정헌법 제14조가 탄생했다.
그러나 스크랜트니 교수는 이러한 국가 대부분이 "과거 식민지에서 국가로 거듭난 국가"라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건국 당시) 누구를 포함하고, 배제할지, 어떻게 국가를 통치할지 전략이 필요했다"는 스크랜트니 교수는 "많은 경우, 영토에서의 출생을 기반으로 한 출생지주의가 국가 건설 목표에 부합했다"고 덧붙였다.
"일부 국가에서는 유럽에서의 이민을 장려했고, 원주민이나 해방된 노예 및 그 후손들이 무국적자가 아닌 온전한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 국가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건국이라는) 특정 시대에 필요했던 특정한 전략으로, 그 시대는 이제 지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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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정책과 늘어나는 제한 사항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이민자 유입, 국가 정체성, 특정 국가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이른바 '원정 출산'에 대한 우려로 인해 여러 국가에서 시민권법을 개정하여 출생 시민권 관련 제도를 개정 혹은 강화하거나, 폐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도 또한 한때 출생지주의를 채택해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했으나 점차 불법 이민자, 특히 방글라데시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우려로 인해 제한하게 되었다.
이에 2004년 12월부터 인도에서 태어났을지라도 부모가 모두 인도인이거나, 부모 중 한 명은 시민권자이고 다른 한 명이 불법 이민자가 아닌 경우에만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식민지 시절 법률 시스템상 속지주의를 따랐던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 또한 독립 이후 속지주의를 철폐했다. 이에 오늘날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가 부모 중 1명 이상이 시민권자 혹은 영주권자여야만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아시아의 경우 시민권 관련 원칙이 더 까다롭다.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시아 국가들은 주로 부모의 혈통을 따진다.
한편 유럽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우선 아일랜드는 가장 마지막까지 아무런 제한 없이 출생지주의를 채택한 유럽 국가였으나, 2024년 6월 투표 결과 79%가 부모 중 1명 이상이 시민권자, 영주권자 또는 합법적 임시 거주자이어야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한다는 헌법 개정안에 찬성했다. 결국 이 제한 없는 원칙은 폐지되었다.
당시 아일랜드 정부는 외국인 임부들이 태어날 자녀에게 EU 여권을 주고자 아일랜드로 여행하러 와 출산하고 있기에 이러한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시민권 제도가 가장 급격하게 변한 국가 중 하나로 카리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을 꼽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 2010년 시민권 정의 헌법을 개정해 서류 미비 이민자의 자녀들에게는 시민권을 주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2013년 대법원이 이 같은 판결을 내렸고, 1929년부터 소급 적용되어 수만 명(대부분 아이티 이민자의 자녀)의 도미니카공화국 국적이 박탈되었다.
인권단체들은 아이티 시민권도 없는 이 수많은 사람들이 무국적자로 남겨질 수 있다고 경고했고, 여러 국제 인도주의 단체와 '미주 인권 재판소'도 비난하고 나섰다.
대중의 반발이 이어지자 도미니카공화국 측은 2014년 새 법을 제정해 이민자들이 자국 영토에서 낳은 자녀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이티 출신 이민자의 자녀들이 특히 환영했다.
스크랜트니 교수는 이러한 시민권 법령 개정을 전 세계적인 광범위한 트렌드로 보고 있다.
"현재 우리는 바다를 건너 쉽게 이주할 수 있는 대량 이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개인이 시민권에 대해 전략을 짤 수 있는 시대이지요. 미국에서 이 같은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입니다."
법적 제동
한편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발표된 지 몇 시간 만에 민주당이 주도하는 22개 주, 샌프란시스코시, 컬럼비아 특별구 및 여러 인권 단체들은 이에 반발하며 연방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4일째, 존 쿠게너 미 시애틀 연방지법 판사가 "명백한 위헌"이라고 표현하며 해당 행정명령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했다. 이에 이 행정명령에는 처음부터 제동이 걸렸다.
법률학자 대부분이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출생 시민권을 폐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헌법학자이자 버지니아 대학교의 로스쿨 교수인 사이크리쉬나 프라카쉬는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이들의 반감을 살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는 법원에서 결정할 사안"이라면서 "이는 대통령 본인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기존 헌법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상·하원 모두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 주 4분의 3이 찬성해야 한다.
이번 행정명령은 앞으로 법적 절차가 진행될 때까지 현재 집행이 정지된 상태이나, 연방 정부의 변호인단은 항소할 계획임을 밝히며, 연방대법원까지 사건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