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헌재 '총리 해임' 결정, 유출된 전화 한 통에...

태국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또 한 명의 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태국에서 임명직으로 구성된 9인 재판관은 패통탄 시나왓 총리가 6월 캄보디아의 베테랑 지도자 훈 센과의 통화에서 윤리 기준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문제의 통화는 훈 센이 유출했다.
해당 통화에서 패통탄은 양국 간 국경 분쟁과 관련해 훈 센에게 화해적인 태도를 보였고, 자국의 한 군 지휘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패통탄은 자신이 훈 센과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훈 센은 그의 아버지 탁신 시나왓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패통탄은 또한 통화 내용은 비밀로 유지됐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이번 통화 유출 사건은 패통탄과 그가 속한 퓨타이 당 모두에게 치명적이자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다. 통화가 공개된 이후 사퇴 요구가 빗발쳤고, 가장 큰 연정 파트너가 정부에서 이탈하면서 그는 아슬아슬한 과반만 간신히 유지하게 됐다.
지난 7월, 9명의 재판관 중 7명이 패통탄의 직무 정지를 찬성했다. 이로써 패통탄이 네 명의 전임자들이 걸었던 운명을 그대로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 상황에서 29일 내려진 결정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패통탄은 이 법정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다섯 번째 태국 총리가 됐다. 이들 모두가 그의 아버지 탁신이 뒷받침했던 정부의 수장이었다.
이 때문에 태국에서는 헌법재판소가 보수적이고 왕실주의 세력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세력에게 거의 항상 불리한 판결을 내린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금까지 112개 정당을 해산시켰는데, 소규모 정당들도 많지만 탁신의 퓨타이당 전신 두 곳과 2023년 총선에서 승리한 개혁 성향의 무브 포워드도 그 중 하나다.
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정치가 이토록 사법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번의 경우에는 유출된 전화 한 통이 패통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훈 센이 왜 시나왓 가문과의 오랜 우정을 저버리기로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패통탄이 캄보디아 지도부가 국경 문제를 홍보하기 위해 SNS를 활용하는 방식을 "비전문적"이라고 언급한 데 훈 센은 크게 격분한 바 있다.
훈 센은 이를 "전례 없는 모욕"이라고 규정하며, 자신을 "진실을 폭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결정은 태국에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다. 양국 간 국경 긴장을 악화시켰고, 지난달에는 5일간의 전쟁으로 번져 4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태국 헌법에 따르면 이제 국회의원들은 제한된 후보들로 구성된 명단에서 새로운 총리를 선택해야 한다.
각 정당은 지난 총선 전에 세 명의 후보를 지명해야 했는데, 퓨타이당은 이미 두 명을 소진했다. 지난해 쎄타 타위씬 총리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임된 데 이어 이번에 패통탄마저 같은 길을 걷게 됐기 때문이다.
세 번째 후보는 차이카셈 니티시리로, 전 장관이자 당 원로이지만 대중적 인지도가 거의 없는데다가 현재 쇠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대안은 전 내무장관 아누틴 찬위라꿀인데, 그의 부미자이 당은 문제의 통화 유출을 명분으로 연정을 떠난 상태다.
두 당의 관계는 현재 냉랭하다. 아누틴이 총리가 되려면 훨씬 많은 의석을 가진 퓨타이 당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는 안정적인 정부 운영과는 거리가 멀다.
의회 최대 세력은 이미 해산된 무브 포워드 당 출신의 의원 143명으로, 현재는 인민당으로 재편됐다. 이들은 어떤 연정에도 참여하지 않고, 새 총선이 열릴 때까지 야당으로 남겠다고 공언했다.
현 상황에서는 새로운 총선이 정치적 난국을 풀 수 있는 가장 명확한 해법처럼 보이긴 하나 퓨타이 당은 이를 원치 않는다. 집권 2년 동안 경제 회복 공약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젊고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패통탄은 결국 국가를 장악해내는 데 실패했다. 대부분의 태국인은 여전히 아버지 탁신이 그동안 주요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탁신 시나왓의 정치적 마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듯하다. 퓨타이 당의 대표적 공약이었던 '디지털 지갑', 즉 모든 태국 성인에게 1만 밧(약 43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정책은 제자리에 멈춰섰고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다른 거창한 구상들이었던 카지노 합법화,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랜드브리지' 건설 등 역시 진전이 없었다.
캄보디아와의 국경 전쟁으로 태국 내 민족주의 정서가 들끓는 시점에서, 시나왓 가문이 훈 센과 오랫동안 이어왔던 이 친분은 보수 진영 사이에선 그들이 언제나 국가보다 사업적 이익을 앞세울 것이라는 의심을 더욱 키웠다. 그러나 이 친분 역시 이제는 끊어졌다.
당의 인기는 급락했고, 지금 총선이 치러진다면 보유 의석 140석 중 상당수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퓨타이 당은 20년 넘게 선거에서 무적의 존재로 군림하며 태국 정치를 지배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 지배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