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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모스크바 공연장 총격 사건'을 뒤집어씌우려 하는 이유

2024.04.09
모스크바 공연장 총기 난사 사건 현장에 헌화하는 남성
Getty Images
모스크바 공연장 총기 난사 사건 발생 전, 러시아 당국은 공격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받았다

사실 이미 그러리라는 암시는 있었다.

그리고 이젠 거리낌 없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지난달 말 145명의 목숨을 앗아간 모스크바 외곽 크로커스 시청 공연장 테러의 배후에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있다며 공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미 사건 직후 ‘이슬람국가(IS)’는 신속하게 배후를 자처했다.

그러나 용의자들이 체포된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연루됐다고 암시했다.

지난 주말 러시아 국영 TV는 용의자 4명의 심문 영상을 방영했다. 이들은 모두 타지키스탄 국적자로, 이 중 1명은 카메라 앞에서 공격 후 “우크라이나로 향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용의자들의 발언은 매우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체포 후 법정에 나타난 이들의 모습에선 고문의 흔적이 보였다.

이러한 발언을 전한 러시아 TV의 특파원은 계속해서 이상한 주장을 이어갔다.

“테러 이후 서방 소식통과 많은 러시아의 ‘외국의 대리인’들의 초점은 우크라이나와의 연관성에서 전적으로 IS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에선 다수의 정부 비판론자들이 ‘해외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거나, “외국의 영향력을 받는” 일명 ‘외국의 대리인’으로 지정돼 있다.

사실 IS로 “초점을 옮겼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선 IS는 자신들이 배후라고 밝혔을 뿐만 아니라, 총기 난사 사건의 영상도 공개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전혀 관련 없다며 부인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알려진 바로는 이란 또한) 러시아에 이미 공격 발생 가능성을 경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3분짜리 이번 러시아 국영 TV 보도에선 IS의 배후 주장에 대해선 언급하지도 않았다.

대신 해당 언론사의 기자는 서방 언론이 “140여 명의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을 살해한 테러 공격을 자행한 이들에게 희생자들보다 더 많은 동정심을 느끼고 있다”는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는 러시아 대중들에게 서방 세계를 악마화하려는 명백한 시도다.

한편 이는 러시아 방송국만의 주장이 아니다. 러시아 외교부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외교부는 ‘텔레그램’에 올린 성명서를 통해 서방에선 “테러 공격의 희생자 수, 사망한 아동의 수는 물론이거니와, 이번 참사의 실제 규모를 언론에 보도하지 말라는 엄격한 명령이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국민에 대한 인류애와 동정심을 보이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마치 러시아만 다른 평행 우주에 살고 있는 듯하다. BBC는 그런 명령을 받은 바 없으며, 다수의 국제 언론사들은 이번 총기 난사 및 방화 사건의 충격적인 결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아울러 여러 서방 외교관들이 러시아 외교부를 방문해 조의를 표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크로커스 시청 밖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꽃을 놓아두기도 했다.

그런데도 러시아 관료들은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비난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알렉산더 보르트니코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은 자국 TV에 출연해 “우리는 이번 사건이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준비됐으며, 서방 특수부대에 의해 추진됐다고 본다. 우크라이나 특수작전군이 직접적으로 이번 사건에 연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주 “러시아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대상이 될 수 없다”면서 “러시아는 종교 간, 민족 간 단결과 조화를 잘 보여주는 특별한 국가”라는 주장을 펼쳤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Getty Images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 외곽 크로커스 시청 공연장 테러 사건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리고자 한다

그러나 바로 지난달 FSB는 모스크바 내 유대교 회당을 공격하려는 IS의 음모를 저지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 지도부는 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발생한 이번 사건의 책임을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일까.

이에 관해선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적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우선 러시아 크렘린궁은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한 이후 줄곧 국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주적은 우크라이나와 “집단적 서방 세계”라고 호소한다.

러시아 당국은 이러한 메시지를 바꾸고 싶지 않아 한다. 만약 러시아 국민들이 우크라이나 정부나 서방 세계보다 급진적인 이슬람주의가 자국의 안보에 더 큰 위협이라고 결론짓게 된다면, 왜 당국이 이 위협 요소에 집중하지 않고 대신 우크라이나와 싸우길 택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의를 돌릴 수 있다

지난달 푸틴 대통령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미국 대사관의 경고를 공개적으로 일축했다. 이러한 테러 주의보는 “명백한 협박 …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불안정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며칠 뒤, 공연장에서 실제 테러가 발생했다.

이후 미국 관리들은 러시아 당국에 “구체적이고, 시기적절하며, 신뢰할 만한” 정보를 공유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책임을 뒤집어씌운다면 사전에 어떤 정보가 전해졌으며, 이에 대해 러시아 당국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묻는 질문에서 주의를 돌릴 수도 있다.

확전의 구실로 삼을 수 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와 서방 세계가 이번 공격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은 향후 필요시, 러시아 당국엔 우크라이나 전쟁을 확대할 수 있는 구실로 사용될 수 있다.

러시아 당국에 진짜 적을 구분 짓지 못하는 건 정치 체제 유지에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이들도 있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명예 선임 연구원이자 정치학자인 블라디미르 파스투코프는 “이런 정치 시스템이 보통 이런 식으로 멸망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적이라 믿는 세력에 집중해 다른 곳에 있는 진짜 적을 놓치게 됩니다. 현재 [러시아 당국은] 우크라이나, 서방, 자유민주주의자들에 집중할 것입니다. 그리고 뒷문을 열어 놓겠죠. 그러나 진짜 위험은 뒷문을 통해 들어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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