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반대! 중국 반대!'…중간에 끼인 한국, 경쟁하는 강대국들을 맞이하다
"트럼프 반대!" 수백 명의 참가자들은 서울 중심부에 자리한 미국 대사관에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버스를 이용한 차벽이 설치되어 있어 시위대가 정문에 접근하지는 못했으나, 연단과 확성기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는 광화문 광장 위로 울려 퍼졌으며, 미국 측 인사들의 귀에도 닿았을 것이다.
활발한 시위 문화를 자랑하는 한국의 기준에서는 소규모 집회였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유일한 시위도 아니다.
북쪽으로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경복궁 정문 앞에서는 또 다른 시위대가 마찬가지로 큰 소리로, 그러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중국 반대!"와 함께 '중국 공산당은 나가라'라는 구호도 간간이 들렸다. 이 반중 시위 또한 수백 명 정도의 규모로 한국 기준으로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25일 토요일 서울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이들의 행진은 이번 주 미국과 중국 정상들이 속속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펼쳐야 할 외교적 줄다리기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사실 한국은 오랫동안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었다. 양국 지도자가 종종 언급하듯, 1950~53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침공한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주며 "피로 맺어진" 우정을 자랑한다.
여전히 한국은 미국의 보호가 필요하지만, 핵심 수출 시장이자 최대 교역국인 중국도 한국에는 필요한 존재다.
미국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달시 드라우트-베자레스는 "특히 우려가 깊어지는 순간이다. 한국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여 있다"고 표현했다.
"해마다 한국은 전 세계 여러 국가가 처한 딜레마의 전형적인 예시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은 물론 미국과도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대통령은 이들 초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발을 내딛고자 합니다."
게다가 오는 30일에는 현재 진행 중인 무역 전쟁에서 돌파구가 마련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미중 정상회담이 한국에서 열릴 예정이다.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상황
올해 61세의 이재명 대통령은 경험 많은 정치인이지만, 그의 앞에는 힘겨운 과제가 가득하다.
올해 6월 대선에서 확실히 승리했으나, 이는 6개월간의 정치적 혼란을 딛고 얻은 결과였다. 전임자인 윤석열 대통령은 짧게 끝난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대규모 시위와 헌정 위기를 촉발했고, 결국 탄핵당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국가는 깊게 분열되었다.
이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관세 조치를 발표하며 동맹국과 경쟁국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상태였다. 협상이 시작되었고, 8월, 이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하여 친화력을 한껏 발휘했다. 이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한국은 강력한 우방국인 미국을 달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3500억달러(약 48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1000억달러 규모의 액화천연가스(LNG)를 구매하겠다고 밝혔다. 그 대가로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율을 25%에서 15%로 인하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다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공장에서 대규모 이민 단속으로 한국인 30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이후 대부분이 귀국했으나, 특히 현대가 미국의 주요 한국 투자사라는 점에서 양국 관계가 요동쳤다.
미국대사관 앞에서의 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시위 참가자 이혜연(23) 씨는 "현재 한미 관계가 깨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상당히 훼손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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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악관은 무역 협상의 일환으로 요구 사항을 늘려나갔고, 트럼프 대통령은 대미 투자금을 현금으로 받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공식적인 협정을 체결하고자 여러 번 시도하고 있음에도 최종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29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합의에 이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의 싱크탱크 '아시아소사이어티' 미중관계센터의 존 델러리 선임연구원은 "이번 방문에 한국의 번영과 안보과 관련하여 정말 많은 것이 걸려 있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짧을수록 이 대통령에게 유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한미 간 무역 협상에서 돌파구가 마련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하여 회담을 진행하고, 순조로운 분위기 속에 마무리된 후 24시간 안에 떠난다면 한국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편 분노와 환멸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논쟁적인 정치 스타일이 그 원인 중 하나이다.
이날 시위 현장을 찾은 대학생 김솔이(22) 씨는 트럼프 대통령이 돈다발을 토해내는 만평이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김 씨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머니 머신(돈 기계)'라고 불렀을 때 정말 화가 났다"며 "미국은 한국을 그저 자신들의 캐시카우(돈벌잇감)로 보고 막대한 투자를 요구하는 것 같다. 솔직히 화가 나며, 미국이 우리를 동등한 파트너로 생각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가 올해 초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0명 중 9명 가까이가 미국을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꼽았다. 다만 이 조사는 조지아주 이민 단속 이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 주 한국을 찾는 또 다른 초강대국 손님인 중국에 대한 여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응답자의 3분의 1이 중국을 한국의 최대 위협으로 꼽은 것이다.
중국이라는 난제
반중 시위에 참여한 박다솜(27) 씨는 "오늘 나는 한국을 사랑해서,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박 씨는 "한국이 점차 중국 영향력에 잠식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면서도 "물론 중국과는 어느 정도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CCP)"이라며 현실적인 발언을 덧붙였다.
한국이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THAD, 사드) 배치를 허가한 이후 이에 분노한 중국이 경제적 보복에 나선 지난 2016년 이후 한국에서 반중 정서는 꾸준히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역사적 원한도 더해지며 한중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탄핵을 계기로 한국 내 특히 우파 진영의 중국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중국 개입설은 윤 전 대통령이 선거 사기를 당했다는 음모론의 단골 소재다.
수만 명이 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가운데에서도 훨씬 적은 수이지만 목소리가 큰 지지자들은 끝까지 탄핵에 반대해왔다. 지금도 극소수 보수 세력은 윤 대통령의 복귀를 꾸준히 외치고 있는데, 이들은 반중 시위의 주역이기도 하다.
주말 시위에는 '대한민국은 대한인의 것', '중국 배를 막아라'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등장했다. 서울의 한 카페는 중국인 손님은 받지 않겠다고 온라인에 공지하며 비난받기도 했다.
이는 인종차별 의혹으로 이어졌으나, 시위에 참여한 수빈(27) 씨는 "우리는 민주적 자유와 자유시장 경제를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결사, 집회, 종교, 표현 등 모든 자유가 보호되는 한국을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라며 이에 반박했다.
관측통들에 따르면 이러한 견해는 한국 유권자 중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근 이 대통령이 중국인 단체관광객에 대한 비자 규제를 완화한 이후 반중 발언이 다소 증가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 대통령은 증오나 차별을 조장하는 집회를 금지하는 법안을 도입해 이러한 시위를 억제하고자 한다.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열린 태도로 알려진 그는 취임 후에도 이렇게 추진할 의지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시진핑 주석은 1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오는 11월 1일 이 대통령과 단독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베이징에서 한국까지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11년 만의 방한이다.
델러리 연구원은 "이 대통령이 경제 분야에서 성과를 내면 극우라고 할 수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관대하게 넘어갈 것"이라면서 "실제로도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중도 쪽에 가까우며, 한국의 중도층은 중국과 잘 지내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초강대국들 사이 줄타기
시 주석은 오는 30일 한국에 도착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한 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옛 수도인 경주에서 3일간 머물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보다 한국에 더 오래 머무는 일정으로, 시 주석에게는 중국을 보다 안정적인 교역국이자 글로벌 강대국으로 부각할 수 있는 중요한 외교적 기회다.
중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윤석열 정부 아래 악화된 한중 관계를 개선한다면 이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대화는 그와 여당인 민주당이 추진해 온 것이기도 하다. 이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역시 같은 당 출신 한국 대통령의 도움으로 성사된 바 있다.
이번에도 그런 성과가 가능할까. 트럼프 대통령은 대화를 원한다고 밝혔으나, 북한 측에서는 아직 답이 없다.
김정은을 제외하더라도 이번 주는 한국과 이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한 주다. 음악부터 종교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한국에 미친 영향력을 작지 않지만, 한국 또한 이제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지닌, 부국이자 소프트 파워(문화적 영향력)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의 거리에는 한복을 입은 서양인들이 최근 넷플릭스 히트작 '케이팝 데몬 헌터스' 관련 상품을 찾아다니고, K-뷰티 매장들은 마스크 팩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경제 역시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이 대통령이 세계 두 초강대국 사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든, 어느 한쪽을 등질 여유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