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기름값 잡힐까…30년 만에 꺼낸 '석유 최고가격제'
정부가 치솟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이번 주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에 나섰다.
시행되면 1997년 유가 자유화 이후 처음으로 정부가 석유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하는 사례가 된다.
국제유가 급등 속에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2000원 선을 위협하는 가운데 이번 조치가 실제로 소비자 부담을 낮출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기름 찾아 삼만리
10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전날 오후 4시 기준 서울 주유소 휘발유 평균 가격은 리터(ℓ)당 1949원을 넘어섰다. 경유 가격은 1971원으로 휘발유보다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이 발생하기 전날인 지난달 27일과 비교하면 휘발유는 약 11%, 경유는 18% 넘게 상승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돌파하면서 국내 기름값도 2000원대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됐다.
유가가 급등하자 한국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른바 '주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주유소 정보를 공유하며 '기름 성지'를 찾는 게시글이 잇따르고 있다. 휘발유 가격이 싼 주유소 인근 도로에는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일시적인 교통 정체가 발생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는 석유 가격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석유 제품 가격에 상한선을 설정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격이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에 근거해 가격 급등 등으로 국민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경우 정부가 개입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10일 국무회의에서 "외부 충격이 민생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석유 최고가격제 집행과 에너지 세제 조정, 소비자 직접 지원 등을 포함한 대책을 신속히 검토하라"고 주문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도 전날 브리핑에서 "석유사업법에 근거해 고시 제정 등 관련 절차를 신속히 진행할 예정이며 이번 주 내 시행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아직 구체적인 시행 방식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정유사 공급가에 상한선을 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몇 주간의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 평균에 일정 마진을 더해 정유사가 팔 수 있는 최고 가격을 정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MOPS)은 국내 정유사들이 아시아 시장의 벤치마크로 삼고 있으며 국내 공급가 산정의 기준이 된다.
정부가 주유소 판매가가 아닌 '정유사 공급가'에 상한을 두는 방안을 검토하는 이유는 주유소 운영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지역별 임대료와 물류비 차이가 커 일괄적인 가격 통제가 어려운 것도 이유로 꼽힌다.
김 실장은 "2주 간격으로 최고가격을 조정하면서 유류세 인하 등을 통해 가격 출렁임을 완충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서는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을 두고 반대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가격을 법으로 묶는 것은 정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게으른 방법"이라며 "국제 유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국내 판매가만 인위적으로 억누르면 그 손실은 정유사와 주유소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철수 의원도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 추진을 비판했다. 안 의원은 "주유소 가격을 잡겠다면서 모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엇박자 행보를 중단하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독과점의 폐해를 방지하고 시장 질서 교란을 단속하기 위한 정책적 개입은 필요하다"면서도 "최고가격제는 불공정한 처방"이라고 주장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 자체는 가격 상승세를 진정시키는 데 일정 부분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평가한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단기적인 가격 안정 효과 가능성을 언급했다.
강 교수는 "지금 가격 상승은 실질적으로 도매 가격이나 수입 가격이 올라서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에 의한 측면이 있다"며 "정부가 가격 통제를 한다는 측면에서는 안정되는 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정부가 가격 통제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시장 심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그런 카드를 꺼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시장에는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유가 상승에 정부가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 교수는 "지금 시중 유가가 많이 올랐지만 지금 당장 공급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다"며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 같다는 심리나 미리 주유를 해두려는 행동 같은 것들이 나타나면서 수요가 부풀려진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석유 가격은 다른 생산품 가격과는 다르다"며 "국가 안보와 국민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부가 가격 급등을 그대로 방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시장 왜곡 우려도 있어
가격 상한제가 장기적으로는 시장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격이 급등한 시기에 단기적으로 아주 짧게 시행한다면 가격을 묶어두는 효과는 있을 수 있겠지만 최고가격제는 부작용이 매우 큰 정책이어서 (장기적) 실효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공급 축소 가능성을 우려했다.
송 교수는 "최고가격의 수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당연히 공급 축소가 이어질 것"이라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려고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차들을 보게 될 텐데 이 또한 경제적 손실을 유발한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유류세 추가 인하가 거론되기도 한다. 현재 유류세 인하율은 휘발유 7%, 경유와 LPG 부탄은 10% 수준이며 적용 기한은 오는 4월 말까지다.
송 교수는 "세수가 줄어서 정부의 재정에는 부담이 되겠지만 기존에 실행했던 정책이고 시장에 주는 충격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효과를 보려면 유류세 인하폭을 한시적으로 대폭 늘려서 원유가격 인상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은 1997년까지 정부가 석유 가격을 관리하는 체계를 운영해 왔다. 이후 경제 자유화 정책에 따라 석유 가격을 시장에 맡기는 체계로 전환했다. 이번 조치가 시행될 경우 약 30년 만에 정부가 석유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