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어야만 하는 압박… 호감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 사는 페이트(24)는 그날도 어김없이 출근해 회의에 참석했다.
긴장된 상태였지만 회의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페이트는 상사들이 던지는 어설픈 농담에도 성실히 웃어 보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곧 불편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 선배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제안을 내놨다. 이에 페이트 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던 순간, 다른 동료가 갑자기 이름을 언급했다.
"그리고 페이트도 제 의견에 동의합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페이트를 향했고, 해당 동료는 이어 "그렇지? 너도 동의하지 않아?"라고 물었다.
실제론 동의하지 않았지만, 압박감을 느꼈다.
페이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까다롭거나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었다"며 "미소 짓고, 동의하고,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당시 처한 상황을 되짚으며 페이트는 모두가 선망하는 회사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고작 2년 차였고,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여성으로서 이루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고 설명했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동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발전할지 고민이었다"고 말했다.

페이트 또한 케냐 사회가 '2025 직장 내 여성 보고서'에서 지적한 '끊어진 사다리'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는 사다리처럼 보이는 기업 내 계층 구조 속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초급 직책에서 관리직으로 올라갈수록 여성 비율이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의미한다.
올해 발표된 연간 보고서에서 경영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기존 북미 지역을 넘어 케냐, 나이지리아, 인도까지 조사 범위를 확대한 결과, 이들 국가 모두 고위직 내 여성 비율이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특히 케냐의 경우, 헬스케어 및 금융서비스 분야 초급 직책에서 여성 비율이 50%에 달했지만, 고위직으로 올라가면 이 수치는 26%로 떨어졌다. 나이지리아와 인도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났다.
그날 회의실에서 페이트는 동료의 발언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미소만 지으며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와 같은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용어도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호감 노동(likeability labour)'이라 부른다.
'호감 노동'이란?
해당 용어를 고안한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업체 '굿 샤우트(Good Shout)'의 에이미 킨은 이를 "매우 암울한 현실을 표현한 재미 있는 용어"라고 설명했다.
"여성들은 직장에서 호감을 사고자 매일 자기 자신을 의심하거나, 과도하게 고민하거나, 불안감에 시달리거나, 성향을 바꾸거나, 가면을 쓴다는 뜻입니다."
'쉐이프시프터: 직장에서 호감을 얻고자 우리가 하는 일들'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에서 진행된 킨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56%가 직장에서 호감을 얻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고 응답한 반면, 남성은 36%에 그쳤다.
영국 전역의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을 바탕으로 작성된 이 보고서는, 직장 내에서 호감을 사야 한다는 부담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려 있는지, 그리고 이 부담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여성에게 집중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보고서는 여성들이 자신 있는 내용에 대해서조차 '이해되실까요?', '죄송해요, 간단히 말하자면' 등의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며 어조를 부드럽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킨은 이러한 지속적인 자기 검열이 공격적이거나 지나치게 단호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영국의 경우 "계급적 요인도 생각해 볼 수 있다"면서, "다양한 상황이나 환경에 맞춰 자신을 조절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노동계급 여성들은 직설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리며 회사 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킨은 개인적으로도 자기 주장을 펼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많은 여성들에게 이 문제가 단순히 회사에 잘 적응하거나 호감을 얻는 수준을 넘어선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인기를 얻고 싶은 게 아니라, 안전하게, 목소리를 내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올해 초 킨은 '비호감인 여성'이라는 주제로 런던에서 세미나를 열었고, 약 300명의 여성이 참석해 각자의 경험담을 공유했다.

전 세계적인 현상
사실 영국에서 진행된 해당 연구는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사회학자들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호감을 얻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미국의 인재 채용 플랫폼 '텍시오(Textio)'가 지난해 발표한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기업체 253곳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여성은 성격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고,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은 여성은 전체의 56%에 달했다. 반면, 남성은 16%에 그쳤다.
또한 남성은 여성보다 '호감이 간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확률이 4배나 높았다.
케냐 멀티미디어대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글래디스 니아치오 박사는 "여성들이 호감 노동을 하게 되는 이유에는 사회적, 문화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여성들은 대체로 타인을 돌보고, 도우며, 타인의 필요를 자신의 것보다 우선시하도록 사회화된다. 그리고 이 점이 직장 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스와힐리어에는 '오피스 마테(office mat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무실 엄마'라는 뜻이죠."
'오피스 마테'는 차를 끓이거나 간식을 챙기는 등 조직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다양한 업무를 추가로 도맡는 존재를 의미한다.
여성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에 대해 니아치오 박사는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대부분 이런 일에는 별도의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여성들은 본래 맡은 업무 외에도 이러한 추가 역할까지 자연스럽게 요구받는다"고 지적했다.

해결책은?
니아치오 박사는 호감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에 대한 유연 근무제 허용 등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와 더불어 멘토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케냐 사회 초년생 여성들을 위한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니아치오 박사는 "나는 이 멘토 역할을 매우 진지하게 여긴다"면서 "항상 친절하게만 굴면 어디도 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자신을 위해 협상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니아치오 박사의 멘티 중 한 명이 바로 페이트다.
페이트는 "박사님은 내가 언제나 미소 짓고 친절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가르쳐준다"면서 "이 점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