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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화산재 구멍에서 탄생한 기발한 와인

2024.04.22
란사로테 섬에는 원뿔 모양으로 파인 화산재 구멍이 있다
Turismo de Islas Canarias
란사로테 섬에는 원뿔 모양으로 파인 화산재 구멍이 있다

스페인 란사로테섬에서는 화산재층에 원뿔형으로 구멍을 파고 와인을 생산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인 독창성과 노력이 담긴 와인이다.

멀리서 스페인 란사로테섬에 있는 포도밭을 바라봤을 땐, 거의 생명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새까맣고 컴컴한 지형에 흡사 신화 속 거인이 엄지손가락으로 누른 듯 원뿔 모양으로 움푹 팬 구멍들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조금 가까이 다가서면 그 구멍 한 가운데서 포도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란사로테는 카나리아 제도의 가장 동쪽 섬으로, 아프리카에서 약 127km 정도 떨어져 있다. 300여 개의 분화구가 있어 ‘화산섬’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 섬의 풍경은 달의 풍경에 비유되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인류가 출현하기 전 지구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티만파야 국립공원 화산이 마지막으로 폭발한 것은 1824년이었다. 하지만 1730년부터 6년간 이어진 화산 폭발이 이 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이 지역의 4분의 1이 용암에 뒤덮였고, 마을을 파괴됐다.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어 기근이 생긴 터라,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엔 두꺼운 ‘피콘(화산재)’ 층이 내려앉았다.

이곳의 와인 생산은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처음 들어온 15세기부터 시작됐다. 그중 테네리페섬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셰익스피어조차 ‘헨리 4세 2부’에서 “당신도 카나리아 군도의 와인은 너무 많이 마셔봤겠지만, 정말 놀라운 와인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다만 테네리페와 달리, 란사로테에선 1730년 화산 폭발 전까지는 개인 소비용으로만 와인을 생산했다.

하지만 재난 후에도 이곳에 남아 있던 소수 주민은 살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다. 곡물을 생산하던 경작지를 찾기 위해 손으로 피콘을 파헤쳤지만, 토양은 더 이상 곡물을 키울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달랐다. 자랄 수도 있었고, 심지어 번성할 수도 있었다. 곡물 재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무시무시한 화산재가 비결이었다.

원뿔형으로 파인 구멍, ‘호요’는 포도나무가 흡수할 수 있도록 수분을 붙잡아준다
Turismo Lanzarote
원뿔형으로 파인 구멍, ‘호요’는 포도나무가 흡수할 수 있도록 수분을 붙잡아준다

전 세계 와인 산지 대부분은 연 강수량이 최소 300mm 이상인 곳에 있다. 하지만 란사로테의 연 강수량은 약 150mm고, 그보다 적게 내리는 경우도 많다. 설상가상으로 섬 북동쪽에선 강한 무역풍이 자주 불어온다.

일 년에 여러 차례, 때로는 며칠씩 지속되는 먼지 폭풍 ‘칼리마’도 난관이다. 칼리마는 사하라 사막의 모래와 흙을 몰고 와, 뜨겁고 건조한 공기를 떠다니며 하늘을 적갈색으로 물들인다. 그래서 칼리마가 몰려오면, 현지인들은 ‘모로코에서 누군가 축구를 하는 게 틀림없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농부들은 창의력을 발휘해야 했다. 란사로테 와인 위원회의 기술 코디네이터인 네레이다 페레즈는 “밭이 하루아침에 화산재에 묻히며, 농부들이 할 수 있는 전혀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폭 3미터, 깊이 3~4미터의 원뿔형 구덩이 호요라는 해법을 찾아냈다. 농부들은 호요에 포도나무를 심은 후, 피콘을 덮었다. 호요 북동쪽에는 용암석으로 나지막한 반원형 벽도 둘렀다.

공학적으로 매우 영리한 시도였다. 원뿔 모양은 간헐적으로 내리는 비와 이슬을 모아서 식물 뿌리에 공급했다. 피콘은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고,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호요 주변에 두른 벽은 바람으로부터 포도를 보호해 줬다. 경사면의 침식이나 붕괴를 막아, 화산재가 포도나무 뿌리를 질식시키지 않게 막아준 것도 이 벽이다.

말 그대로 잿더미에서 일어선 게 이 섬의 와인 산지다. 와이너리엘 그리포 소속 젊은 기술 감독인 엘리사 루데냐는 “(호요로 포도나무 재배를 개척한) 그들은 선구자였고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1775년에 설립된 엘 그리포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이자, 이 섬에 있는 28개의 와이너리 중 하나다. 또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10대 와이너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스트라트브스 와인(왼쪽)과 화산재에서 자라는 포도(오른쪽) (Credit: Sofia Perez; El Grifo)
Credit: Sofia Perez; El Grifo
스트라트브스 와인(왼쪽)과 화산재에서 자라는 포도(오른쪽)

이곳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포도 품종은 말바시아 볼카니카다. 이 제도에서만 발견되는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섬 전체 생산량의 60%가 이 품종이다. 다른 품종으로는 화이트 와인 품종인 리스탄 블랑코, 비하리에고 블랑코, 모스카텔 데 알레한드리아와 레드 와인 품종인 리스탄 네그로와 시라 등이 있다.

특히 이곳에는 수령이 200년 가까이 된 포도나무도 있다. 1800년대 유럽의 여러 와이너리를 괴멸시켰던 곤충 필록세라에 감염되지 않은 것들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필록세라 때문에, 저항력이 강한 미국 포도나무를 가져다 접붙이기해야 했다.

북위 30도선 가장자리라는 란사로테의 위치를 고려할 때, 고품질 와인을 생산한다는 말은 바보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원시적 풍경과 잦아들지 않는 바람은 온도를 조절해 줄 뿐만 아니라, 해충도 막아준다.

스페인 지로나에 있는 와이너리 엘 셀러 데 칸칸 로카의 소믈리에 호셉 로카는 “이곳 대부분은 화산재 토양이라서 필록세라가 서식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덕분에 여기 포도나무는 병충해를 겪지 않고, 준사막 기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신선한 와인을 생산해내죠.”

로카는 이 섬의 화이트 와인이 대담한 산미와 함께 재스민과 오렌지꽃, 풋사과, 라임의 노트를 자랑한다고 말했다. 화산 와인에선 미네랄의 향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미네랄은 토양의 미생물과 발효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로마(와인이 숙성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유의 향기)를 더해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 란사로테의 토양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네랄은 질감에 영향을 미쳐서 입속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더하고 약간 쌉싸름한 여운을 남겨줍니다.” 이를 통해 산뜻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마시기 쉬운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란사로테 와인도 와인인 만큼, 떼루아(포도를 통해 표현되는 환경 조건의 총합)에 좌우된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가 또 있다. 인간적인 요소다. 인터뷰에 응한 모든 사람은 ‘이곳 와인의 특별한 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와인 재배자들과 척박한 지형에서 열매를 맺기 위한 그들의 엄청난 노력을 꼽았다.

각 분화구의 조감도를 보면 그 중심에 덩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Turismo de Islas Canarias
각 분화구의 조감도를 보면 그 중심에 덩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포도밭에서는 모든 업무가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농부들은 원뿔형 구조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좁은 통로로만 다닌다. 7월 말 수확이 시작되면 27도의 더위 속에서 포도를 따서 상자에 담는다. 페레즈는 “20kg짜리 포도 상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포도밭을 가로질러 500m 떨어진 트럭까지 걸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상자를 비우고 다시 돌아가기를 30~40번 정도 반복합니다.”

화산 활동의 진원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포도밭에서는 호요 대신 야트막한 참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도 기후와 토양 조건 때문에 기계로 수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루데냐는 “와인은 포도밭에서 만들어지며, 최고급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가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엘 그리포는 자체 포도밭을 갖고 있지만, 소규모 포도밭을 갖고 있는 농부들과도 협업한다.

“저희 와인 중에는 포도를 재배한 농부를 기리는 ‘핀카 라몬’이라는 단일 포도밭 와인도 있어요. 라몬은 매일 포도밭에서 포도나무에 빗질을 해주는 농부입니다. 우리는 그가 생산한 포는 절대로 다른 포도와 섞지 않을 겁니다.”

2001년에 문을 연 보데가스 로스 베르메호스의 또 다른 젊은 와인 생산자도 란사로테에 있는 300여 명의 포도 농부들을 칭송했다. 물론 그 역시 그중의 한 명이다. 란사로테 출신인 다니엘 마르틴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포도를 재배했고, 지금은 스페인 본토로 건너가 유명 와이너리 베가 시칠리아에서 일하고 있다.

“저는 란사로테 포도 농부들이 보여준 사랑과 희생을 표현하는 와인을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포도를 키우는 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마르틴과 루데냐는 차세대 와인 생산자의 대표 주자다. 와이너리 보데가 스트라트브스의 와인 생산자 라울 페레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란사로테에서 포도를 키우는 농부들의 평균 연령은 70세이다. 그리고 이들을 이을 후속 세대는 아직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루데냐와 마르틴은 젊은이들이 포도 농사에 뛰어들어 란사로테섬의 와인 명맥을 이어가리라 전망하고 있다. 루데냐는 더 많은 수입을 얻게 해 포도 농부들을 유입시켜야 한다며,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지금은 란사로테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더 비싸게 구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르틴의 생각도 비슷하다.

“지금은 란사로테 와인의 황금기인데, 포도 가격이 상승하면 더 많은 젊은이가 이 풍경의 정원사가 되겠다고 나설 겁니다.”

란사로테섬의 와이너리가 차세대 농부 유치에 성공하더라도, 앞으로는 기후 변화와 같은 과제와 싸워야 할 것이다. 페레즈에 따르면, 이 섬은 비가 대부분 겨울에 내린다. 그런데 올해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고,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농경의 적응력이라면, 바로 란사로테일 것이다. 루데냐는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적은 수분으로 식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절로 겸허해진다”고 말했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이 포도덩굴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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