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924년 그리고 2024년까지… 과거 올림픽의 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는 프랑스 파리
“그리스가 올림픽의 요람이라면, 프랑스 파리는 올림픽의 고향이죠.”
2012년 올림픽 유치 경쟁을 앞둔 (당시 런던에 패했다) 시점, 파리와 올림픽의 오랜 인연에 대한 다소 편협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파리야말로 올림픽 정신이 “오랜 역사적 기억상실증 이후 활기를 되찾은 곳”이며, “근대 올림픽으로 성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계인 사건이 벌어진” 곳이라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894년 6월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 귀족 출신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의장을 맡아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창설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2, 3단계는 파리에서 개최된 제2회, 제8회 하계 올림픽을 가리킨다.
사실 오늘날 파리에선 여전히 과거 하계 올림픽의 ‘유산’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파리에서 첫 올림픽이 열린 지 124년이 지난 지금도 ‘뱅센 삼림공원’ 내 거대한 경륜장인 ‘라 시팔’은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0년 당시 사이클링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였다. ‘라 시팔’은 사이클링 외에도 체조, 축구, 럭비는 물론 무려 크리켓 경기장으로도 사용됐다.
이곳은 (지금까지 단 1번뿐인) 올림픽 크리켓 경기가 펼쳐진 신성한 곳이다. 1900년 당시 경기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맞붙었다.
승리의 주인공은 잉글랜드였다. 그래도 프랑스는 여전히 유일한 올림픽 크리켓 은메달 보유국인 셈이다. 그러나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크리켓이 다시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 이 기록 또한 끝이 날 테지만,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라 시팔’은 수년간 보수 공사를 거쳤으나, 지붕을 제외한 관람석은 여전히 과거 모습 그대로다.
양쪽 끝의 곡선으로 올라가는 콘크리트 트랙도 그대로이며, 구석 덤불 뒤 소변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00년 파리 올림픽 경기는 오늘날 관점에서 특이했고, 공식 올림픽의 일환으로 인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당시 펼쳐진 이색 종목으로는 포격, 페탕크(불), 낚시, 통 굴리기, 장거리 열기구 레이싱(이 종목의 우승자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근처에 착륙했다) 등을 꼽을 수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 시기에 열렸다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경기 참가한 선수 등 수많은 이들이 그저 스포츠 경기가 만국 박람회 프로그램의 일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첫 근대 올림픽 대회인 1896년 그리스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그리스가 아닌 곳에서 열렸기에, 올림픽이 국제 대회라는 인식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회이기도 하다.
또한 스포츠가 시시한 취미 거리가 아닌, 진지하게 접근할 분야로 받아들여지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 출신 과학자 에티엔-쥘 마레가 이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수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담은 사진 기술로 유명한 마레이는 당시 여러 선수를 설득해 자신의 야외 스튜디오(현재 ‘스타드 롤랑 가로스’의 1번 코트가 자리한 곳)에서 포즈를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그리 완벽하진 않았으나,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수염의 색깔, 조부의 체력, 모유를 먹었는지 여부 등이 적힌 인류학적 설문지를 돌리기도 했다.
한편 1900년 올림픽에선 처음으로 (소수이지만) 여성들이 참가해 골프, 테니스, 요트, 크로케 종목에서 활동했다. 1924년엔 수영, 다이빙, 펜싱 종목에서도 여성들이 참가하며 여성 선수 총 135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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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올림픽이 남긴 유산 중에서도 파리 북서쪽에 자리한 콜롱브의 ‘스타드 이브-뒤-마누아르’ 경기장은 단연 중요한 곳이다. 당시 개막식은 물론 수많은 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경마장이었던 곳에 지어진 이 경기장은 지난 세월 프랑스 최고의 축구 및 럭비 경기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이후 ‘파르크 데 프랭스’, 뒤이어 ‘스타드 드 프랑스’가 그 명성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콜롱브의 이 경기장은 이번 올림픽에서 필드하키 경기장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스포츠 역사가 미카엘 델레핀은 “스포츠를 사랑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콜롱브 경기장은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곳”이라면서 “수많은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 이곳에서 뛰었고, 공을 차고, 태클을 걸었다. 이곳은 과거의 유령으로 가득하다”고 설명했다.
영국 스포츠 팬들에게 이 경기장은 자국의 전설적인 육상 선수 해럴드 에이브러햄스와 에릭 리들이 금메달을 획득한 곳으로, 영화 ‘불의 전차’를 통해 재현되며 불멸의 명성을 얻은 곳이다.
영화 제작진이 영국 리버풀에 그대로 재현한 이곳 콜롱브 경기장의 트랙은 100년 전 그대로이며, 트랙을 내려다보는 철제 스탠드도 그때 그대로다.
한편 1924년 올림픽은 통신 기술의 발전을 최초로 활용한 대회로, 승리를 거둔 선수들은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 됐다.
핀란드 출신의 파보 누르미와 빌레 리톨라 선수는 중장거리 육상계를 지배하며 ‘플라잉 핀(‘하늘을 나는 핀란드인’이라는 듯)’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멀리뛰기 선수 윌리엄 드 하트-허바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쟁취했다.
또한 콜롱브 경기장은 1930년 자국에서 열린 첫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우루과이 축구 대표팀이 1924년 승리한 곳이며, 미국과 프랑스 간 치열한 럭비 결승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당시 경기장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로 인해 럭비는 이후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됐다.(미국 팀이 승리했다)
아울러 1924년 올림픽은 올림픽의 모토인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를 처음 선보인 무대이기도 하며, 바닥에 레인이 그려진 50m 수영장이 처음으로 등장한 대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영장의 혜택을 입은 올림픽 영웅 중엔 이후 배우로 변신해 영화 ‘타잔’ 등으로 명성을 얻은 수영선수 조니 와이즈뮬러도 있다.
이처럼 최초의 50m 올림픽 수영장이었던 파리 20구의 ‘투렐 수영장’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이번 올림픽에선 수영 선수들의 훈련 장소로 사용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