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로 파괴됐던 일본 해안 지역은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이와테현과 후쿠시마현은 2011년 끔찍한 원전 사고로 이어진 거대한 쓰나미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을 가진 이 지역에 요즘 다시 여행자들의 발길이 향하고 있다.
희망은 혼슈 북동부에서 운행을 재개한 산리쿠 철도 리아스선을 따라 봄의 새싹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기차역 플랫폼에 세워둔 화분에는 여름꽃이 가득했다. 나무 사이로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집이 보였고, 얼음처럼 푸른빛의 강에서는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파를 씻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탄 기차가 한때 황량했던 해안선을 달리는 내내 수확을 앞둔 벼들의 황홀한 황금물결이 기차 안을 가득 채웠다.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 북동쪽 해안에 리히터 규모 9.1의 지진이 발생해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일어났다. 이 쓰나미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해안선으로 밀려온 바닷물은 기반 시설을 뒤집어 엎었고, 숲에서도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물이 빠진 자리에는 산산이 부서진 부유물만 가득했다.
단층선 위에 위치한 이 열도 국가 일본은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연재해를 겪었다. 2024년 1월에도 이시카와현 노토 반도에서 규모 7.6의 지진이 발생했다.
일본인들에게 추모란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고 승화하는 일종의 의식과 같다. 혼슈만 해도 추모 목적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및 쓰나미 피해를 입은 500km의 해안선을 따라 줄지어선 “재난 추모 시설” 지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철로 아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자연의 난폭함을 경고하는 안내판들이 세워졌다.
안내판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졌다. “이 지점 밑으로는 집을 짓지 마십시오. 몇 년이 지나더라도 쓰나미를 주의하십시오.”
이와테현 센다이 북쪽으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해변 마을인 나미이타카이간까지 가는 동안 우리가 본 바다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나미이타카이간역에 도착하니, 인근 주택 정원마다 꽃이 가득했다. 우리가 해변에서 오르막길을 오르자, 266m 높이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이런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었다. “이곳은 쓰나미가 도달한 곳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에 망자와 교감하는 전화 부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찾아왔다. 재난이 발생하기 전, 나미이타카이간의 주민이던 사사키 이타루가 만든 전화 부스다.
사사키는 영국풍 전화박스에 연결이 끊긴 전화기를 두고 이 전화기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사촌과의 연결망이라는 서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6년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에 나와 이 전화 부스를 통해 세상을 떠난 사촌과 대화를 한다며, 그의 생각은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사사키의 이야기는 이내 입소문을 탔다. 그러자 쓰나미를 비롯한 비극으로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사람들이 ‘바람의 전화’로 위안을 얻고자 이곳을 찾아왔다.
사사키의 정원 방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향했지만, 우리가 정원에 갔을 때 정원에는 나와 친구뿐이었다. 정원에는 일렁이는 백일홍과 천천히 물들어가는 단풍나무 사이를 새들이 날아다녔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조용히 잠길 수 있는 공간이자, 삶의 에너지만큼 슬픔이 가득해 가슴 한 켠이 아릿해지는 장소였다. 나는 전화 부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떠나버린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정원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은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활기를 찾았다. 페이스트리 카트를 밀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한 여성에게 커스터드가 가득한 도넛 두 개를 사서 먹은 덕이었다.
나와 친구는 도넛을 먹으며 일본어로 “맛있다!”를 연발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룻밤을 묵을 숙소인 민슈쿠 타카마스로 가는 길에 “쓰나미 침수 구간”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표지판을 보자 우리의 마음은 또다시 무거워졌다. 하지만 우리를 맞이한 숙소 주인 야스코 나카무라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쓰나미로 인해 료칸 지붕이 파손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몸짓과 번역 앱, 그리고 내 친구의 서툰 일본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그는 “쓰나미 당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내륙 지역 트로노에 머물고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외국인 여행객은 드물지만, 나카무라는 요즘도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료칸에는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하숙생과 바다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 다이버, 이곳으로 오는 길에 지나쳤던 인근 오츠치 마을의 재건 작업을 하는 건축업자 등이 장기 숙박을 하고 있었다.
쓰나미로 인해 이곳에서는 주택 절반과 상업용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다. 나카무라는 미역 샐러드, 고등어 구이, 된장국 등 한때 원망했던 바다의 결실을 저녁 식사로 대접하면서, 건축업자들의 노력이 오츠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 뭔가요?” 나는 나카무라의 번역 앱을 사용해 물었다.
“생선을 반죽해서 만든 거예요.” 그가 우리 앞에 놓아둔 가이세키 그릇만큼이나 우아한 일본어로 말했다.
우리가 이 숙소에서 만난 어부 다이버는 고향인 아오모리현에 사과 과수원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고향은 눈이 많이 와서, 새로운 영감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다행히도 그는 쓰나미가 덮쳤을 당시 나미이타카이간 바다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던 우리는 모두 함께 몸서리를 쳤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밀려드는 공포를 굳이 말로 옮길 필요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나카무라로부터 섬세한 무늬의 술병에 담긴 일본 술을 이별 선물로 받았다.
그는 “이 술은 카마이시에서 온 유명한 술”이라고 말했다.
나미이타카이간을 떠난 열차는 잔잔한 파도가 넘실대는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도저히 철도 터널이 침수되고 대들보가 휘고 고이시하마역 전체가 떠내려갔던 2011년의 이미지와 연결 지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재건된 역 플랫폼에는 가리비 조개껍데기로 만든 화환이 종교적 의미를 가진 장식물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선 유치원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조개 껍데기로 장식한 깃발을 받치고 있었다.
“기도를 하는 겁니다.” 우리 눈에서 질문의 의도를 읽은 기차 안의 한 여성이 말했다.
추모 분위기는 이내 우아한 오마주로 변신했다. 우리가 찾아간 다음 목적지인 리쿠젠타카타에는 히로시 나이토가 디자인한 ‘이와테 쓰나미 전승관’이 해안선을 따라 눈부신 하얀 비석처럼 세워져 있었다. 현관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바닥 물웅덩이에 반사돼 춤을 췄다. 옆에 있는 전시 공간에서는 생존자의 증언과 멀티미디어를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찌그러진 소방차와 진흙이 묻은 어린아이의 키보드, 종잇장처럼 접힌 버스 정류장 안내판 등 대지진에서 수습된 물건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 공간에서 추모는 재난 대처에서 드러난 행정적 과실을 지적하고, 향후 재난에 대비한 전략을 설명하며, 전 세계에서 쏟아진 지원과 슬픔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전시물들을 통해 깊이 있는 성찰이 되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 키노 사토코는 “이것이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지혜”라고 말했다.
방문을 마친 우리는 버스를 타야 했다. 하지만 키노는 한때 거친 파도에 맞서 도시를 지켰던 수백 년 된 소나무 농장 자리에 세워진 방파제에 가볼 것을 권했다. 이 농장의 소나무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나무에는 ‘고독한 기적의 소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이 소나무마저 바닷물 침수로 인해 2012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화학약품 보존 처리와 강철 지지대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소나무는 넓고 평평한 풍경 위에 우뚝 서서 강력한 회복력을 상징하고 있다. 소나무 근처에는 쓰나미로 무너져 내린 리쿠젠타카타 유스호스텔의 폐허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방파제에서 다시 전승관을 돌아봤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우리가 다녀온 걸작 건축물이 다카타 마쓰바라 쓰나미 재건 기념 공원의 정갈한 초목에 둘러싸여 있는 게 보였다.
리쿠젠타카타는 그렇게 흙탕물의 잔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당시 거대한 바닷물로 갈기갈기 찢긴 도시 남쪽의 철도 노선은 아직도 수리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케센누마로 가는 간선급행버스를 거쳐 센다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다. 그리고 다시 후쿠시마현으로 향하는 JR조반선의 빈 객차에 탑승했다. 기차에 몸을 실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날 밤 어디에서 묵어야 할지 몰랐다. 이 노선이 닿는 곳에는 우리가 머물 만한 호텔이 드물었고, 노선이 지나는 해안선은 쓰나미로 인한 원전 사고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 하라노마치역에 도착했다. 거리는 지나는 사람 한 명 없이 황량했다. 라멘 가게의 옻칠한 외관은 붉게 빛나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는 우리 말고 다른 투숙객은 없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원전 사고 현장과 가까운 후타바 역에는 셔틀버스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의 방사능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후타바 예술 지구’로 재탄생한 마을의 일부에는 쓰나미 때도 살아남은 건물을 중심으로 밝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버스 기사가 우리를 ‘동일본 대지진 원전 재해 전승관’으로 안내하는 동안 수십 제곱미터에 달하는 황무지가 우리를 스쳐갔다. 그런데 그 황량한 들판 한가운데에 입체파 스타일의 하얀 건축물이 서 있었다.
우리는 이곳이 소풍 온 고등학생들로 가득 찬 것에 놀랐다. 학생들은 재난 당시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에 눈을 크게 뜨고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폐허가 된 이 지역 산업 기반을 재건을 위해 후쿠시마 혁신 해안 프레임워크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재건 모형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모형도는 푸른 농지와 활기찬 거리, 휴가를 즐기는 가족들로 가득한 해변 등 “미래의 도시”로 재건된 후타바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이곳의 가이드 켄이치로 히라모토는 “마을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타바 마을로 돌아온 주민은 70~80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커뮤니티를 조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로 온 사람들, 젊은이들이 주류를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고 있어요. 지자체에서도 이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후타바 남쪽으로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이와키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친구와 나는 20년 후 이곳을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다짐했다. 이 도시들은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다시 일어섰다.
그날 밤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막 문을 닫으려던 술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인 카즈야 하나자와는 마지막 주문으로 칵테일 두 잔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흔들고 젓고 라임을 자르면서, 그는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수백 명의 이와키 주민들을 애도했다. 그는 재난 이후 6개월 동안 피해 복구를 도왔고, 잔해에서 건져 올린 나무로 바에 조그마한 탑을 세웠다.
그는 주먹을 가슴에 대고 “일본인은 매우 강인하다”고 말했다. “저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조그마한 시작이지만 오키나와와 홋카이도, 일본 전역의 사람들이 이와키를 다시 찾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카즈야는 우리에게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반짝이는 보드카 칵테일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