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세계 미디어 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워너브라더스 인수전
재앙, 참사, 그리고 악몽. 헐리우드의 창작자들은 한때 막강했던 워너브라더스의 몰락을 이렇게 표현한다. 넷플릭스와 파라마운트가 유서 깊은 이 스튜디오 인수를 놓고 맞붙는 가운데, 헐리우드는 더 큰 격변과 일자리 소멸을 앞두고 있다.
파라마운트가 회사를 통째로 사들이든, 넷플릭스가 쪼개서 인수하든 워너브라더스의 쇠락과 임박한 매각은 이미 심각한 제작 침체로 타격을 입은 헐리우드에서 애도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카사블랑카, 굿펠로스, 배트맨,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이콘을 만들어온 이 스튜디오의 소멸은 추가적인 구조조정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고, 영화와 TV 프로젝트의 '구매자'가 하나 줄어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BBC가 수십 명의 배우, 프로듀서, 촬영 스태프를 인터뷰한 결과, 업계는 '차악'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영화관을 죽였다는 비판을 받아온 테크 거인 넷플릭스의 지배냐, 아니면 트럼프 대통령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억만장자들의 지배냐를 두고서다.
한 카메라 조연출은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의 CEO이자 오라클 공동창업자이며 트럼프의 측근인 억만장자 래리 엘리슨의 아들 데이비드 엘리슨에 대해 "그는 우익 성향의 트럼프 지지 억만장자"라고 말했다. 그는 "넷플릭스는 역사적으로 제작에 과도하게 간섭하지 않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넷플릭스가 원하는 대로 거래가 성사될 경우, 이들은 워너브라더스에게 '왕관의 보석'이라 할 수 있는102년 역사의 스튜디오, HBO, 그리고 방대한 영화·TV 아카이브를 인수하고, CNN, TNT 스포츠, 디스커버리 같은 워너의 전통적 TV 네트워크는 다른 매수자에게 넘어가게 된다.
한편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의 1,080억 달러(약 159조원) 규모 워너브라더스에 대한 적대적 인수 제안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부다비, 카타르,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설립한 펀드의 자금이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검열과 정부 개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CNN은 반드시 매각돼야 한다"고 말하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워너브라더스 거래는 팬데믹 이후 헐리우드를 뒤흔든 대규모 구조조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2023년에는 배우와 작가가 동시에 파업에 나서며 영화·TV 제작이 전면 중단됐다. 코로나19 봉쇄 이후 스튜디오와 스트리밍 서비스가 창작에 총력을 기울였던 2022년에는 헐리우드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일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노동 파업이 끝난 뒤에도 제작 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여파로 많은 미디어 기업들이 문을 닫거나 합병을 택해야 했다. 데이비드 엘리슨의 스카이댄스 미디어는 올여름 또 다른 전설적 스튜디오인 파라마운트를 인수했고, 그 과정에서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워너브라더스가 매각 의사를 내비치자 파라마운트는 적극적인 인수전에 나섰다. 그러나 스튜디오는 결국 넷플릭스와의 잠정적 합의를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파라마운트는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주주들을 상대로 "넷플릭스와의 거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적대적 인수를 직접 제시했다.
파라마운트든 넷플릭스든, 혹은 또 다른 잠재적 인수자든 누구를 지지하든 간에, 헐리우드 사람들이 공통으로 꼽는 이 이야기의 '악역'은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CEO 데이비드 자슬라브다. 그는 지난해 워너브라더스가 110억 달러(약 16조원) 이상의 손실을 내고 주가가 약 7% 하락한 가운데서도 5,190만 달러(약766억원)를 벌어들였다.
집을 잃고 일이 끊긴 한 배우는 "데이비드 자슬라브가 CEO가 된 이후 워너브라더스가 어떻게 고전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는지를 지켜봤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넷플릭스와 파라마운트에서 일하길 희망하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여러 사람은 자슬라브를 1987년 영화 월 스트리트에서 "탐욕은 선이다"라고 외치는 가상의 인물 고든 게코에 비유했다.
자슬라브는 자신이 이끌던 디스커버리와 AT&T의 워너미디어를 합병해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출범시키며 2022년 취임했다. 이 통합 과정에서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자슬라브에게는 후한 보수가 지급됐다.
워너브라더스에서 일하던 한 프로듀서는 "자슬라브는 그냥 고든 게코다. 와서 다 부수고 전부 팔아치웠다"며 "그는 '주주들을 부자로 만들겠다'고 했고, 이곳의 역사 따위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고 말했다.
워너브라더스는 이런 평가에 반박했다.
워너의 커뮤니케이션 총괄 로버트 깁스는 BBC에 보낸 성명에서 "데이비드와 워너브라더스의 재능 있는 팀의 리더십 아래 지난 3년 반 동안 스튜디오는 독창적인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독보적인 영화 라인업으로 리더십을 회복했고, 단일 통합 리더십과 10년 계획 아래 DC 유니버스를 재출범시켰으며, 스트리밍 서비스는 글로벌 출시 이후 사상 처음으로 흑자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많은 영화 노동자들에게는 누가 워너브라더스를 사느냐가 거의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들은 대신, 산업이 통합과 AI 활용 확대 속에서 산업 전체가 축소되는 가운데 어떻게 자신을 재정의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모든 면에서 실패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지금은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집을 잃고 친구들의 도움과 푸드뱅크에 의지하며 잡일을 하고 있는 한 배우의 말이다. 그는 향후 일에 영향을 미칠까 봐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외국 자본보다는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를 인수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는 1927년 워너브라더스가 유성영화를 최초로 내놓은 이래 업계를 가장 크게 뒤흔든 파괴자로 평가받아왔다.
한 영화관 운영자는 "재앙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회사는 극장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공개적으로,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건 무섭다. 악몽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넷플릭스와 일하고 있기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않았다.
미국의 많은 극장은 스트리밍 우선 전략 때문에 넷플릭스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
세 회사 모두와 일해본 한 프로듀서는 "적어도 파라마운트라면 영화가 대형 스크린에 걸릴 것이라는 걸 안다. 그들은 영화관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넷플릭스는 이런 우려를 완화하려 애쓰며 "영화의 극장 개봉을 포함해 워너브라더스의 현재 운영을 유지하고 강점을 확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헐리우드의 많은 이들은 넷플릭스의 이 주장을 믿고 싶어 한다.
사운드 기술자이자 배우·작가·프로듀서로도 활동하는 존 에번스는, 넷플릭스가 헐리우드 대로에 있는 '이집션 씨어터'를 정성껏 복원한 사례를 선의의 신호로 꼽는다.
1922년에 지어진 이집션 씨어터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로빈 후드로 세계 최초의 영화 시사회가 열린 곳이다. 한때 방치됐던 이 극장은 넷플릭스가 2020년 매입해 7,000만 달러를 들여 새롭게 단장했다.
에번스는 "좋은 신호라고 생각한다"며, 스트리밍은 영화 노동자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워너브라더스 세트장에서는 관광객들이 프렌즈의 센트럴 퍼크 카페 세트 앞에서 셀카를 찍고,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를 대신하는 건물 외관 사이를 거닌다. 여전히 일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사무실과 작가실 안에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워너브라더스 부지에서 새 쇼를 개발 중인 한 프로듀서는 "나는 일곱 번의 합병을 겪었다"며, 스튜디오 하나를 잃는 건 슬픈 일이고, 구매자가 하나 줄어들면 작품을 만들고 판매하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좋은 걸 만들면, 결국 좋은 걸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가 적대적 인수 제안을 발표한 날 익명을 조건으로 인터뷰한 그는, 매각을 걱정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당장 방송에 올릴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이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억만장자나 조(兆)만장자가 스튜디오에 새로운 제안을 들고 나타나도 놀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농담 삼아 일론이 들어와서 이걸 해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테슬라와 X의 소유주 일론 머스크를 언급하며 말했다. "재산이 조 단위인 사람들이 등장하면, 규칙이란 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