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리스크 털어낸 삼성 이재용, '위기의 삼성' 구할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불법 승계' 관련 무죄 판결 확정으로 모든 사법 리스크를 털어냈다.
17일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부당합병·회계부정 의혹으로 기소된 이 회장 사건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이 회장이 재판에 넘겨진 지 4년 10개월, 2심 선고 후 5개월 만이다.
3세 경영 승계
이 회장은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최소 비용으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승계하기 위해 부정거래와 시세조종, 회계부정 등 일련의 행위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에 관여한 혐의로 2020년 9월 기소됐다.
원활한 경영 승계를 위해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미전실)을 중심으로 당시 부회장이었던 이재용이 보유한 제일모직의 주가를 의도적으로 부양시키고, 삼성물산 주가를 낮췄다는 것이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은 1대 0.35로, 제일모직 1주를 삼성물산 약 3주와 맞바꾼다는 뜻이다.
재판부는 지난해 2월 1심에 이어 올해 2월 2심에서도 이 회장을 비롯해 미전실과 회계법인 임직원 등 피고인들의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 업무상 배임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합병이 이 회장의 승계만을 목적으로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게 산정돼 손해를 끼쳤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검찰은 법원과 검찰 간의 견해차가 있고, 1심과 2심이 주요 쟁점을 두고 서로 다른 판단을 내렸으며, 국정농단 사건 등 이전 판결과도 배치되는 부분이 있다며 지난 2월 대법원에 상고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뒤 10년 가까이 이어진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해소됐다.
삼성 측 변호인은 "오늘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통해 삼성물산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가 적법하다는 점이 분명히 확인됐다"라며 "5년에 걸친 충실한 심리를 통해 현명하게 판단하여 주신 법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경제효과' vs '재벌 봐주기'
이 회장의 사법 리스크 해소 소식을 재계는 크게 반기는 분위기인 반면, 일각에서는 자본시장 공정성을 훼손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기는 측은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관세 협상과 글로벌 경쟁 심화 등 대외 여건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적극적 역할을 통한 파급 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삼성이 사법 리스크로 인한 경영상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투자 확대와 일자리 창출로 우리 경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반면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재판 결과가 경영권 승계 합병 목적과 분식회계를 인정한 과거 법원 판단과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단체는 "삼성 불법 합병은 대기업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민연금과 세금 등 전 국민의 수천억 원 피해를 제물로 삼은 악질적인 범죄행위"라며 "승계 목적에 대해 앞뒤가 다른 판례를 내놓으면서까지 사회정의를 훼손하는 수치스러운 결정을 내린 사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라고 밝혔다.

앞으로의 행보는
이번 판결은 사법 리스크가 절차상 완전히 해소됐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 회장이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경영 활동에 나서고 과감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 회장은 불법 승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100여 차례 재판에 출석했고, 이에 앞서 2017년 2월에는 박근혜 정부에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2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수감생활은 560일에 달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BBC에 "그동안 이 회장의 운신 폭이 좀 좁았을 것으로 본다. 법원에 출두하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경영) 집중도가 많이 떨어졌을 수 있다"라며 "(이 회장이) 그동안 경영 일선에서 다소 소극적이었다면, 앞으로는 적극적인 리더십 행보가 예상된다"라고 밝혔다.
앞으로 이 회장이 등기이사 복귀, 컨트롤타워 재건, 지배구조 개편 마무리 등을 서두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배구조 개편의 관건은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이 확보하는 것이다.
다만 지난 6월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하는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황 교수는 "(이재명 정부 들어서) 상법 개정이 이뤄지는 등 기업 오너 경영 체제가 많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삼성도 여기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삼성은 4세 경영을 하지 않겠다고 과거에 선언한 적이 있는데, 이건 어느 기업보다도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며 "어떤 의미에서는 이재명 정부와 이재용 회장의 지배구조 개선 의지가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위기의 삼성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묶여 있는 동안 삼성전자는 부침을 겪었다.
특히 반도체 사업부인 DS(디바이스솔루션)의 부진이 지속됐다. 증권가 분석에 따르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와 시스템LSI(설계)를 포함한 비메모리 부문에서 적자가 이어졌고, 고부가 제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도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 8일 잠정 실적 발표를 통해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74조원, 영업이익 4조6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영업이익의 경우 지난해 2분기보다 55.9% 줄었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의 박주근 대표는 "사법 리스크는 (삼성의) 핑계 아닌 핑계"라며 "이재용 회장이 리더로서 적절한 경영상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술 경쟁력과 신성장동력 확보, 지배구조 불확실성이 하루 빨리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삼성전자의 사업 구조가 25년 넘게 고착화했다며 변화와 혁신이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또 "(삼성전자는) 빅테크 기업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AI 분야나 새로운 기술과 관련한 신성장 동력 사업이 없다"라고 지적했다.
황 교수도 "지금 삼성을 글로벌 경쟁사들이 바짝 추격하고 있거나, 아니면 삼성이 이미 추격을 당한 상황"이라며 "전체적인 사업 단위와 전략을 재정비하고, AI로 인한 여러가지 변화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제는 (이 회장의) 경영 실책이라든지 경영 부진이 있어도 사법 리스크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삼성이 오롯이 가질 수 있는 경쟁력이 무엇인가'를 물을 겁니다. 이제부터 본게임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