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엡스타인 전략', 충성 지지층과의 충돌 가능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문건 대응을 둘러싼 의문에 시달리는 가운데 또다시 익숙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제프리 엡스타인은 지난 2019년 사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뜻밖에도 가장 충성도 높은 지지자들과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16일(현지시간) 오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장문의 글을 올리며 늘 하던 전략을 펼쳤다. 이번 논란 역시 "급진 좌파 민주당"의 탓이라는 주장이다. 트럼프는 이번 사건도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정적들이 조작한 수많은 "사기극"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민주당이 잘하는 건 이런 사기극과 허위 주장뿐"이라며 "민주당은 정치도 못하고, 정책도 못 내고, 이길 수 있는 후보도 못 고른다"라고 썼다.
과거 트럼프는 이 같은 '편 가르기 전략'으로 지지층의 결속을 다졌다. 자신을 특권층과 부유층에 맞서는 외부자이자 소외된 자들의 대변자로 설정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략의 허점은 글의 중반부터 드러났다. 트럼프는 오히려 공화당과 자신의 지지층을 비판하며 이들이 좌파의 '음모'에 넘어갔다고 주장한 것이다.
트럼프는 "내 '예전' 지지자들이 이 '헛소리'를 낚싯바늘, 줄, 추까지 통째로 삼켰다"며 "그들은 교훈에서 배운 것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못 배울 것"이라고 적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자신의 진영을 계속 비난하며 "어리석은 공화당원들, 바보 같은 공화당원들 몇몇이 그물에 걸려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 사안을 두고 내부 균열을 만드는 셈이 됐다. 이런 태도는 그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 수 있다.
트럼프의 정치적 성공은 두 가지 메시지에 기반한다. 부패한 기득권과 싸우는 외부자이며, 진실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입장을 바꾸면서 그럴듯한 소리만 늘어놓는 정치인에게 많은 유권자가 피로감을 느끼던 가운데, 트럼프 지지층은 트럼프가 진정성이 있다고 받아들였다. 때로는 논란을 일으키더라도 꾸밈없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트럼프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나 음모론 신봉론자와도 거리를 둔 적이 없지만, 이번에는 엡스타인 관련으로 부유층과 권력층을 연결 지을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호구거나 바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며 엡스타인 문건을 공개하자고 했다가, 아예 문건이 없다고도 했다가, 남은 문건은 전부 사기라고 주장하는 식의 말 바꾸기는 트럼프를 솔직한 인물이 아니라 숨길 것이 있는 인물로 보이게 만든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문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현재 일부 지지층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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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강경파 논객 로라 루머는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노선을 바꾸지 않으면 엡스타인 사건이 그의 임기를 전부 "삼켜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루머는 독립 조사관 임명을 조언했지만, 트럼프가 과거 특별검사 제도에 극렬히 반발해온 점을 감안하면 이를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다만, 트럼프가 이번에도 정적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전략으로 위기를 넘기려면, 민주당이 이 프레임에 걸려들어야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고위 보좌관을 지낸 댄 파이퍼는 최근 뉴스레터에서 민주당이 이 함정을 피하려면 트럼프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 내 분열을 확대해야 한다고 썼다.
또한, "이 문제가 민주당의 반트럼프 공세로 인식되면, 결국 공화당 내 분열을 심화시키고 불만을 품었던 '마가' 유권자도 다시 트럼프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엡스타인 관련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미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초당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유거브(YouGov)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9%가 정부가 "모든 관련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공화당 응답자의 75%, 민주당 응답자의 85%가 이에 동의했다.
폴리티코가 입수한 민주당 내부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8%가 트럼프가 "아마도 또는 확실히" 은폐에 관여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여론이 트럼프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여 직업 생명을 이어가는 공화당 정치인들은 대부분 트럼프의 편에 서 있다.
공화당 의원들은 이번 주 주요 표결에서 과반을 간신히 확보한 상황에서도 트럼프의 입법 추진을 지지했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투명성 강화를 요구했으나, 하원 보수파 의원들은 민주당이 추진한 엡스타인 문건의 전면 공개 시도를 여러 차례 무산시켰다.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도 힘을 보탰다. 존슨 하원의장은 문건 추가 공개를 요구했던 과거 발언을 번복하면서, 자신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만 대중에 공개돼야 한다는 뜻이었으며 언론이 이를 잘못 인용했다고 해명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트럼프가 반복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현재 엡스타인 논란은, 뉴스 흐름과 전국적 관심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좌우해온 트럼프 대통령에게 짜증나는 방해물이 되고 있다. 공화당이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이 사안이 대통령직을 뒤흔드는 이슈로 번질지는 결국 트럼프의 동맹들 손에 달렸다.
하지만 트럼프의 충성 지지층 사이에서 불만과 이탈이 지속된다면,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정치적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중간선거는 어느 당의 지지층이 더 적극적으로 투표장에 나오는지가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당이 상·하원 중 하나라도 장악하게 되면, 그래서 의회 조사권을 얻는다면, 엡스타인 문건과 트럼프와의 연관성이 지금과 같은 부가적 사안이 아닌 정국의 핵심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