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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아이돌' 탄생할까...'거리의 꽃제비'가 무대 위에 서기까지

2024.09.23
댄스 트레이닝 중인 유혁 씨
최정민/BBC코리아
탈북민 유혁 씨는 K팝 보이그룹 1VERSE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북한에서 처음 K팝을 들었을 때)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들게 그 노래가, 가사가 전달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냥 K팝이 좋았어요. (북한에서는) 장군님, 그러니까 누구 한 명을 칭송하는 그런 노래만 부르고 들으니까…”

K팝 열풍은 가장 폐쇄적인 나라인 북한도 피해 가지 않았다. 여러 보고와 증언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K팝을 비롯해 드라마, 영화 등 한국 문화 콘텐츠를 접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탈북한 김석(24)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접경 지역에 살았던 김 씨는 중국으로부터 밀수된 CD, USB, SD카드 등을 통해 K팝을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남성 듀오 UN의 '선물'이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엄마 생각이 났어요. 제가 커서 엄마랑 좀 오래 떨어져 살았거든요. 엄마한테 뭔가 힘이 되지 못하고,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그런 감정이 들었어요."

하지만 2013년 탈북한 유혁(24)을 비롯한 많은 북한 주민에게 K팝은 '사치'에 불과하다. 유 씨는 어릴 때부터 소위 말하는 거지, 즉 '꽃제비' 생활을 했다. 당시 그의 최대 목표는 굶지 않고 매일 살아남는 것이었다.

같은 북한 출신이어도 생활 환경이 크게 달랐던 두 사람. 한국에서 같은 K팝 그룹 멤버로 데뷔하는 건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들은 중국계 미국인 케니(영문명 에릭 하오, 22), 일본 출신 무라타 아이토(19)와 함께 K팝 그룹 '1VERSE'(유니버스)로 연말 미국 데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음악이 없는 삶

유 씨는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4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 유 씨는 아버지와 친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다행히 집은 있었지만, 거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 씨는 9살 때부터 거리로 나가 잡일을 하고 구걸도 했다. 여름이면 아예 잠을 지하철역이나 거리에서 자면서 돈을 벌었다.

하루는 역에서 행방(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상행위를 하는 것) 상인들의 도시락을 몰래 훔치다가 들켜서 흠씬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도시락에 들어있던 건 쉰 밥 한 덩이뿐이었다. 유 씨는 "그때는 쉰 밥도 소다랑 식초를 넣어서 다시 꾸려서 먹곤 했다"고 회상했다.

"(도둑질이) 잘못된 행위이긴 한데,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올바르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저한테는 올바른 상황이었다고 할까요. 그렇게라도 안 하면 굶어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요...북한은 한국처럼 일하면 돈을 받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에요. 내가 뭔가를 해야 돈을 벌 수 있어요. 그게 올바른 행동이 아닐지라도요. 불법적인 일들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고 할까요."

유 씨는 "오늘 일해서 저녁 한 끼 먹는 삶을 살았다"며 "(북한에 있을 때) 음악을 들으면서 여유롭게 생활한 적은 열흘도 안 됐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 함경북도 정평리 해안가의 한 마을 전경
Getty Images
유 씨는 북한 함경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북한에서의 K팝

유 씨는 북한에 있을 때 K팝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아무래도 북한에서 못 듣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한국 음악을 듣다가 처벌받은 사람은 (주변에) 없었는데, 우리 동네에 CD에 담긴 영화를 보다가 추방당한 가족이 있었어요. 북한에서는 그들이 반동분자라고 했죠."

김정은 집권 후 북한에서는 한국 문화 검열이 더욱 심해졌다. 2020년 12월 제정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는 한국 영상물 유포자는 사형, 시청자는 최대 10년 이상 노동교화형에 처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한국식 말투와 창법까지 금지한 조항도 있다.

올해 초 BBC 코리아가 입수한 2022년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에는 한국 드라마를 유포 및 시청한 중학생에 수갑을 채우고 12년 형을 선고하는 장면이 담겼다.

유 씨는 한국에 와서야 K팝을 접했다. 그는 TV 속 K팝 가수들을 보고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저는 그분들이 다른 세상 사람인 줄 알았어요. 밥도 저희가 먹는 밥이 아니라 엄청난 그런 밥을 먹을 것 같고...그런데 제가 지금 그걸 준비하고 있네요."

종이에 가사를 쓰는 유 씨
최정민/BBC코리아
유 씨는 자작곡 '보통 사람(Ordinary Person)'을 통해 깊은 외로움과 일반적인 삶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다

랩 가사를 쓰는 이유

유 씨가 처음부터 K팝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유 씨는 북한에서 소학교(초등학교) 4학년까지 교육을 마쳤지만, 한국에 와서 초등학교 6학년 과정을 바로 따라가기란 어려웠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과목이 국어, 그중에서도 글쓰기였다.

"처음에는 시를 썼어요. 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직설적으로 얘기할 수 없어서, 뭔가 나만의 암호처럼 내가 혼자 보고 해석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유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랩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라며 그를 독려했다.

17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거의 쉰 적이 없다는 유 씨는 시간을 쪼개어 랩 가사를 써야 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아버지와의 추억 같은 것들을 많이 생각했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바로 휴대폰에 (짧은 글로) 저장해 놨죠."

그러다 유 씨는 2018년 국내 교육 방송 EBS의 한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해 짧게 랩을 선보이게 됐는데, 우연히 이를 본 업계 관계자의 눈에 띄었다. 바로 현재 음악 프로듀싱 기업 씽잉비틀의 대표로 있는 조미쉘 씨다.

다국적 그룹

"처음 한 1년 동안은 대표님이 저한테 사기치는 줄 알고 안 믿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공들인다고?'라는 생각이 들었죠."

유 씨는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를 잘 모르기 때문에 사기를 당한다는 얘기를 종종 들어왔다. 그래서 조 대표의 제안을 늘 의심했다. 하지만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나자 "나 하나 속이자고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유 씨가 씽잉비틀 연습생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3년 전. 현재 1VERSE 연습생 네 명 중 가장 처음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약 1년 6개월 후 김 씨가, 이어서 케니와 아이토가 팀에 합류했다.

케니와 아이토는 탈북민 연습생 2명과 그룹 데뷔를 준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이토는 "북한 사람이라고 처음 들었을 때는 진짜 놀랐다"며 "사실 이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북한 사람이 좀 무서운 느낌이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과) 일본이 관계가 나빠서 북한 사람들이 다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두 연습생은) 진짜 착하고 재밌는 사람이어서 안심됐죠. (탈북자로서) 어려운 일이 많았을 것 같은데, (K팝 아이돌로) 성공하면 진짜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케니는 탈북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었지만, 그들이 자신과 같이 K팝 아이돌을 준비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탈북민이 (아이돌처럼) 매우 공개적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며 "혹시라도 (이들이) 이 일을 하다가 상처나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 걱정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북한 출신인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었을 어려움에 공감한다고 덧붙였다.

"문화적으로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다른 사회에 동화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중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아직도 이런 문제를 많이 겪고 있죠. 물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에게도 (한국 사회에 동화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백지 같은 연습생'

어려서부터 K팝을 비롯한 음악을 듣고 춤·노래를 연습한 케니와 아이토와는 달리, 혁과 석은 제대로 된 교육은커녕 음악을 많이 접한 적조차 없었다. 모든 것을 바닥부터 새로 배워야 했다는 뜻이다.

유 씨는 "여기서 배우는 게 다 처음 배워보는 거라서 진짜 너무 힘들었다"며 "노래를 불러만 봤지 음악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다 처음 배우는 것들이다 보니까 거부 반응이 생겨서 초반에 더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일했던 조 대표를 비롯해 국내 K팝 연습생에 익숙해져 있던 트레이너들도 당혹스런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다. 조 대표는 "(혁과 석은) 마치 백지와도 같았다"며 "이런 연습생은 우리도 본 적이 없었다"며 웃었다.

"한국이나 다른 곳에서 온 연습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K팝이나 다른 대중문화를 소비하면서 살잖아요...그런데 이러한 문화에 한 번도 노출이 된 적 없었던 친구들이 댄스나 보컬을 새로 배워간다는 점에서 시작점이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조 대표는 초반에 북한 출신 연습생들이 많이 힘들어했다면서도 배움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는 "몸 힘든 거는 정말 잘하더라"라며 "어떻게 보면 좀 무식하게 연습한다고 보일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두 연습생이 체력적으로 힘든 트레이닝보다 문화 이해나 토론 수업 등을 더 어려워했다고 덧붙였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토론하는 걸 되게 어려워했어요. 질문을 하거나 자기 생각을 말한 경험이 별로 없다고 해야 할까요. '왜 이런 생각을 했냐'고 하면 '예전에 선생님이 그렇다고 해서요'라고 하더라고요."

건물 옥상에 서 있는 유혁 씨
최정민/BBC코리아
현재 한국에 사는 탈북민 수는 3만 명이 넘는다

K팝,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서 K팝을 비롯한 한국 문화 콘텐츠의 인기는 일종의 '양날의 검'으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프트 파워'가 될 수 있지만, 콘텐츠를 접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처벌받을 수 있어서다.

동국대 북한학연구소의 하승희 교수는 현재로선 BTS나 블랙핑크처럼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는 탈북민 출신 K팝 아이돌을 상상하기 어렵다면서도, 만약 그런 아이돌이 나온다면 북한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하 교수는 최근 젊은 탈북민의 직업 선택이 자유로워지고 있지만, "탈북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 씨도 "탈북민 중에 알게 모르게 K팝 아이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라며 자신도 "북한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K팝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탈북민으로서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일반적으로 탈북민이 생각했을 때 아이돌과 본인 사이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이 아이돌이 된다면 (다른 탈북민들도) 더 많은 용기와 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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