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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이 나를 움직였다'...목선 몰고 NLL 넘은 20대 탈북 여성 강규리

2일 전
한국 해양경찰이 동해 먼바다에서 북한 목선을 퇴거시키는 모습
뉴스1
한국 해양경찰이 동해 먼바다에서 북한 목선을 퇴거시키는 모습

2023년 10월 23일 밤 10시 30분, 동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북한 강원도 해상. 한 척의 낡은 목선이 어둠 속을 가르며 남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이 목선에는 23세 여성 강규리 씨, 그의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젊은 남성이 타고 있었다.

저 멀리 뒤편에서는 항해등을 켠 북한 경비정이 목선을 뒤쫓고 있었다. 파도에 부딪힌 목선은 심하게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전복될 듯 위태로웠다.

"북한 당국에 붙잡혀 온갖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규리 씨의 결심은 단호했다.

그의 주머니에는 탈출 직전 어머니가 구입한 극약이 들어 있었다. "잡히면 이걸 먹고 바다에 뛰어들자." 일행은 그렇게 서로 약속했다.

하지만 바다는 규리 씨의 편이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자 작은 목선은 파도를 타고 속도를 유지했지만, 거대한 추격선은 파고에 막혀 속도를 늦췄다.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국경선만 넘자!"

추격은 무려 4시간 반 동안 이어졌고, 호흡조차 가다듬을 틈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선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자, 끈질기게 따라오던 북한 경비정은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그 순간, 규리 씨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이제 살았다. 국경선이 좋긴 좋구나."

앞머리가 있는 갈색 단발머리에 분홍빛 민소매 옷차림의 강규리 씨
강규리 씨 제공
20대 규리 씨는 탈북 과정을 주도해 가족을 이끌고 한국으로 왔다

평양의 딸에서 선주로

북한 평양에서 태어난 규리 씨는 비교적 넉넉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종교 활동을 하던 사실이 발각되면서 가족은 함경남도로 추방됐다. 종교의 자유가 억압된 북한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어릴 적 꿈은 탁구 선수였다.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목표로 체육대학까지 진학했지만, 시작이 늦었던 탓에 결국 라켓을 내려놔야 했다.

"무엇보다 저는 돈을 벌고 싶었어요. 북한에서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걸 일찍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대학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규리 씨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간부들을 대상으로 일을 하던 시기에는 상당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조개잡이 잠수배를 마련한 규리 씨는 직접 선주가 됐다. 20대 초반 여성이 배를 소유하고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사례는 북한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잠수공 3명과 기관장 등 5명의 어부를 고용했다. 수심 30미터 아래로 들어가 조개를 캐내는 작업은 위험했지만, 북한에서 가장 돈이 되는 사업 중 하나였다. 신선한 바다조개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수입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당국이 조개 판매를 통제하면서 이윤은 급격히 줄었다.

북한 김일성 생일 112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해 4월 14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시민들이 망원경으로 북측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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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시민들이 망원경으로 북측을 바라보고 있다

'외부 정보는 북한주민에게 희망의 창구'

"제가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한 건 USB 속 드라마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본 한국 방송 때문이었어요."

규리 씨는 북한 당국의 검열과 단속을 피해 KBS '한국인의 밥상', '남북의 창' 같은 프로그램을 몰래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들키면 총살에 가족까지 연좌제를 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그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과 인접한 황해도는 물론 함경도 해안과 평양 인근까지, 전파가 닿는 지역에서는 한국 라디오 방송과 TV방송을 몰래 듣고 시청하는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수신기 다이얼을 납땜해 채널을 고정시키지만, 주민들은 중국산 기기를 몰래 들여오거나 고정된 주파수를 다시 조정하며 한국 방송을 봤다.

한국이 지난 2012년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한 뒤에도, 국가정보원은 대북 송출만큼은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했다. 덕분에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기존 TV로 한국 방송을 몰래 수신할 수 있었다.

"한국 방송은 우리에게 외부 세계와 현실을 보여주는 숨구멍이자, 희망의 창구였어요. 주민들이 목숨 걸고 몰래 시청하는 이유는 그걸 보며 하루를 버틸 희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주파수가 안 잡히면 숨이 막히는 것 같을 겁니다."

규리 씨는 특히 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북한 주민들은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 바란다"고 연설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불 꺼진 방에서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어요. 정말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죠."

한류 드라마도 북한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규리 씨에 따르면 함경남도에서 청년들은 한국 말투를 흉내 내고, 고백할 때도 한국식 표현을 써야 통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규리 씨는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대화에 끼기도 어렵다"고 증언했다. 다만 그는 "드라마는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이라며 "현실을 알려면 저처럼 뉴스와 탈북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정적 계기는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이순실 씨의 증언이었다. 한국 방송에서 이 씨가 북한에서 겪었던 일과 한국 정착 생활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순간, 규리 씨는 확신을 가졌다.

'아, 한국이 우리를 국민으로 받아주는구나. 나도 가서 열심히 살면 되겠구나.'

"북한에서 23년을 살았는데 자유없이 살다보니 너무 답답한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USB를 통해 몰래 한국 드라마를 보고 실시간으로 한국 방송 채널을 접하면서 한국이나 다른 나라는 이렇게 힘들게 안 사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사는 걸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탈출을 앞두고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친구는 "남조선 정부를 어떻게 믿느냐"며 끝내 남겠다고 했다.

규리 씨는 "그 친구도 실시간 방송을 통해 현실을 접했다면 선택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 친구는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설득해서라도 같이 왔어야 했는데…친구에게 미안합니다."

거친 파도 위에 선 북한 어부들의 모습
Getty Images
거친 파도 위에 선 북한 목선

'더 늦기 전에 가야 했다'

2023년 10월 14일. 낮잠에서 깬 규리 씨는 갑자기 확신이 들었다.

"잠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남조선이지, 왜 여기 있지?'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그는 즉시 어머니와 이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남조선으로 가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삽시다."

어머니는 완강히 반대했다. 붙잡히면 공개 처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의 설득 끝에 가족은 마침내 결심했다.

한국행에는 GPS가 필수였다. 북한 당국이 보급한 기기는 남쪽 항로가 막혀 있어 사용할 수 없었다. 규리 씨는 중국산 GPS를 몰래 구해 배에 설치했다.

"북한 당국의 차단이 없는 GPS는, 한국 항로가 네이버 지도처럼 보입니다."

10월 22일 오후 8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엔진 기름 100kg을 여러 통에 나눠 어창에 숨기고, 쌀과 물도 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승선 금기'를 피하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이모를 선원실에 숨기고 문을 잠근 뒤, 경계가 느슨한 작은 부두를 택했다.

엔진에 시동을 걸려는 순간 초소원이 달려왔다.

"이 시간에 어디 갑니까."

규리 씨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우리 동네 선착장으로 갑니다. 걱정마시라요."

초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선주였던 저는 배를 타는 게 흔한 일이었어요. 그들도 여자가 배를 몰고 남조선으로 간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목선은 그 길로 어둠 속을 질주했다. 항해 도중 물이 배 안으로 차올라 한 사람은 키를 잡고, 다른 한 사람은 계속해서 물을 퍼내야 했다.

"북한 목선은 몇 시간만 달려도 안에 물이 차요. 퍼내지 않으면 가라앉습니다."

추격선을 따돌리기 위해 목선은 동해에서 큰 원을 그리며 남하했다.

2023년 10월 24일 한국 강원도 속초 인근 해상에서 해경이 강규리 씨 등 북한 주민 4명이 타고온 소형 목선을 인근 군부대로 예인하고 있다
뉴스1
2023년 10월 24일 한국 강원도 속초 인근 해상에서 해경이 강규리 씨 등 북한 주민 4명이 타고온 소형 목선을 인근 군부대로 예인하고 있다

10월 24일 오전 7시 10분. 강원도 속초 동쪽 약 11km 해상, 북방한계선(NLL)에서 남쪽으로 40여 km 떨어진 지점이었다.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이 규리 씨의 목선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부는 허름한 목선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북한에서 왔어요?"

곧 신고가 접수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많은 경비정과 해양경찰 선박, 헬기까지 몰려와 목선을 포위했다. 해경은 곧장 규리 씨 일행에게 물었다.

"자유 귀순입니까?"

규리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자유 귀순입니다."

생사의 고비 끝에 마침내 자유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유엔서 마주한 북한대사

2025년 5월 20일, 미국 뉴욕 유엔 본부. 북한 인권 침해를 논의하는 고위급 전체회의장에 규리 씨가 증인으로 섰다.

연단에 선 그는 다섯 살 무렵, 할머니가 토속 신앙을 믿었다는 이유로 가족 전체가 평양에서 시골로 추방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또 친구들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사례도 증언했다.

정면에는 김성 주유엔 북한 대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저를 노려봤고, 저는 눈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규리 씨의 증언이 끝나자 김 대사는 발언권을 얻어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열린 이 회의를 강력히 규탄한다. 더 유감스러운 건 부모와 가족조차 버린 쓰레기(scum) 같은 인간들을 증인으로 불러세운 것이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규리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대사의 말에 엄청 화가 났지만, 곧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엔에서 저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북한으로 돌아가서 처벌을 받을 테니까요."

새로운 삶, 그리고 남은 이들에게

한국에서 보낸 2년 가까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규리 씨는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살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정신이 지치는 나라라면, 한국은 몸이 지치는 나라예요. 아침에 눈을 뜰 때 '왜 이렇게 바쁘게 살지?'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유가 있다는 게 제일 좋아요. 내가 어떤 드라마를 보든, 무엇을 입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운영과 강연에 나서면서 북한 사회를 알리고 있다. 또 한국에서는 배움이 필수라고 생각해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열심히 살아서 엄마에게 효도하는 딸이 되는 게 제 꿈입니다."

규리 씨는 더 큰 포부도 밝혔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유엔에서 일해보고 싶어요. 한국을 넘어 더 큰 무대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국제 사회를 향해 호소했다.

"북한 주민들이 그 땅에서 태어난 게 죄는 아니잖아요.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그들의 삶을 한 번쯤 안쓰럽게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그는 북한에 남은 친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운이 좋아 먼저 한국에 와서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그 친구들은 지금도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 속에서 버티고 있을 겁니다. 저도 그런 날들이 많았어요. 너무 힘들 때는 '그냥 죽어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지만, 끝내 버티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언젠가는 통일과 희망의 날이 올 테니, 제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줬으면 합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꿋꿋하게 버텨주길 바랍니다."

규리 씨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과 함께 자라온 친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향의 정확한 지명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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