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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양쪽 다 멈췄으면'... 남북한 확성기에 밤낮없이 시달리는 주민들

2024.10.25

"24시간 동안 소음에 고통받고 있으니 이게 전쟁이 아니면 뭡니까?"

파주시 대동리 주민 김현호 씨는 전날 밤 북한의 대남방송 소음 때문에 "1시간도 제대로 못 잤다"고 털어놨다.

김 씨의 집은 한국군의 대북 확성기와 불과 500m 남짓, 강 건너 개성에 설치된 북한군의 대남 확성기와는 4km 남짓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1일 찾아간 김 씨의 집과 마을에는 한국군이 북한을 향해 틀어놓은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이 지난 6월 대북 방송을 재개한 이래, 접경지역 주민들은 김 씨처럼 남북 양쪽에서 들려오는 확성기 방송으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수면제 없으면 잠을 못 자'

자택 마루에 앉아 인터뷰 중인 강화 당산리 주민 안수영씨
BBC
강화 당산리에 사는 안수영 씨는 수면제 없이 잠을 잘 못 이룬다고 말한다

"진통제도 먹고, 수면제도 좀 먹어보고, 별짓 다 하는 거지 뭐..."

강화도 송해면 당산리에 사는 안수영 씨는 북한의 대남 확성기 방송이 재개된 이후에 잠을 잘 수 없어 "수면제를 자주 복용한다"고 말한다.

"나이 먹으니까 한숨 자면 잠이 안 온다"는 80대 안 씨는 "서너 시간 자다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하는 일상이 세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북한 개풍군의 대남방송 스피커와 불과 4~5km 떨어진 안 씨와 아내 이옥란 씨의 집에선 북한이 틀어놓은 사이렌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루에 앉아 콩을 까는 안수영, 이옥란 부부
BBC
북한의 스피커를 마주한 안수영 이옥란 부부의 집에선 인터뷰 내내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려왔다

아내 이 씨는 이밖에도 "짐승 울음소리"나 "귀신소리" 등이 난다며, "어떨 때는 정말 거북스러운 소리도 나고 아주 진짜 듣기 싫다"고 말했다.

이 씨는 통유리로 된 창을 가리키며 "우리 아들이 (대남방송 재개 후) 두꺼운 유리로 바꿔준 건데도 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고 하소연했다.

"짜증도 나고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최근에도 병원 가서 주사도 맞았어."

당산리 이장 박효철 씨도 북한이 하루에 "못해도 20시간 정도는 방송을 한다"며 특히 "주변에 소음이 없는 밤에 더 시끄럽다"고 호소했다.

박 씨의 집은 당산리에서도 북한의 대남방송 스피커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북한이 내보내는 사이렌 소리는 박 씨가 요란한 트랙터 소리를 내며 벼를 베는 와중에도 들려왔다.

박효철 강화 당산리 이장의 집에선 건너편 북한 개풍군에 설치된 대남 확성기가 곧바로 보인다
EPA
박효철 강화 당산리 이장의 집에선 건너편 북한 개풍군에 설치된 대남 확성기가 곧바로 보인다

중단과 재개 반복된 확성기 역사

남북의 확성기 방송은 남북의 관계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되풀이하며 이어져왔다.

1962년 북한이 먼저 "사회주의 지상 낙원으로 오라"며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고, 이듬해 한국도 서해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에 따라 양측은 방송을 중단했지만, 1980년대 들어와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등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확성기 방송도 다시 시작됐다.

그러다 2000년 남북 양측은 첫 남북정상회담의 후속조치로 2004년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으나, 6년 뒤 천안함 침몰 사건을 계기로 남측은 다시 확성기를 가동했다. 그러다 보름 만에 다시 양측이 합의해 방송을 중단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인 2016년 1월 한국은 대북 확성기를 다시 가동했고, 약 2년 3개월 만인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중단했다.

지난 6월 북한의 오물풍선 살포에 대한 대응으로 다시 한국이 대북방송을 재개하고 북한도 응수하면서 양측의 확성기 공방은 다시 이어지고 있다.

대북ㆍ대남 방송 같이 들리는 마을

김현호 씨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한국군의 대북 확성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BBC
김현호 씨의 집은 한국군의 대북 확성기로부터 불과 400~500m 거리에 있다(사진 왼쪽 검은 위장막 안쪽이 대북확성기)

“어쩔 땐 대북방송이 더 짜증나요.”

파주 대동리 주민 김현호 씨는 이 지역 주민들은 대남방송뿐 아니라 한국 군의 대북방송에도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저 성능 좋은 스피커를 밤낮으로 저렇게 틀고 있으면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한국군은 대북방송을 재개하며 약 40개의 확성기를 운용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김 씨의 집에서 약 400~500m 떨어진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들어섰다.

스피커는 맞은편인 북한을 향하고 있지만 김 씨의 말처럼 높은 출력 탓에 방송은 마을 전체에 마치 학교 교내방송처럼 울려퍼지고 있다.

김 씨는 대북방송이 "비슷한 방송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고 "내용도 유치하다"고 전했다.

"얼마 전엔 탈북민들이 자기들끼리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걸 계속 틀어줬어요. 이런 방송이 무슨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북한이 대동리 건너편인 개성에 대남방송용 스피커를 설치하면서, 대동리는 양측의 확성기를 모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마을이 됐다.

"낮에는 우리나라 방송에 시달리고, 밤에는 재난방송(북한의 사이렌 소리)에 시달려요."

김 씨는 그러면서 이 소리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군인들이 가장 걱정된다"고 말한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어디 짐 싸서 도망이라도 갈 수 있죠. 그런데 가장 가까운 데서 밤낮으로 저기(소리)에 노출돼있으니 정신적으로 멀쩡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국군이 파주시 대동면 민통선 지역에 설치한 대북 확성기
BBC
대동리의 대북확성기는 북한을 향하고 있지만 출력이 높은 탓에 뒷편 마을에서도 큰 소리로 들린다

밤마다 귀신소리, 기괴한 소리, 사이렌 소리에 불안한 주민들

"모스크바에 깃발을 놓고 시카고에 노랫소리 크도다."

당산리 주민 문정분 씨와 안효애 씨는 기억나는 북한 노래가 있냐는 질문에 과거 북한에서 널리 불리던 '적기가'를 들려줬다. 분단 이전부터 쭉 당산리에서 살아온 이들은 북한 노래들을 외울 정도로 대남방송에 익숙하다.

안효애 문정분 씨가 기억하는 북한 노래를 취재진에게 불러주고 있다
BBC
당산리 주민 안효애 문정분 씨는 '북한 노래를 외울 정도'로 오랜 기간 대남방송을 들어왔다

문 씨는 그러나 지금의 대남 방송은 다르다고 말한다. 이전의 대남방송은 사람 말소리가 시끄러운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기괴한 소음이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나오고 있다고 문 씨는 전했다.

"그전엔 서로 말을 해서 똑똑하게 들렸지. (그런데) 지금은 무슨 소리야, 말을 안 해."

박 이장 역시 "80, 90년대엔 양쪽 다 집 만한 스피커로 방송을 해서 소리가 대단했다"면서도, "그때는 노래 틀어주고 그러니까 (지금보다는) 괜찮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짜증나는 소리 아니에요 저거. 이런 적은 없었어요."

북한이 소음 위주의 대남방송을 하는 의도에 대해 아직 공개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일부 '한국의 대북방송을 접경지 주민, 군인들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한 대응'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박 이장은 "괴롭히려는 게 아니면 이럴 수 없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당산리 주민도 "대북방송을 못 듣게 할 목적이면 왜 한국이 방송을 안 하는 새벽시간에 이렇게 시끄럽게 방송을 하겠냐"며 "한국인들을 괴롭히려는 목적일 것"이라고 답했다.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대동리 주민 신나리 씨
BBC
신나리 씨는 매일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대해 "어떤 날 저 소리가 진짜여도, 내가 진짜인줄 알 수 있을까" 불안하다고 말한다

"사이렌 소리에 무뎌질 때쯤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대동리에서 태어나 40여 년을 살아온 신나리 씨는 최근 들려오는 여러 소리 중 "공습경보 같은 사이렌 소리가 제일 불안하다"고 말한다.

북한은 그동안 귀신, 늑대 울음소리, 기계음, 나팔소리 등 여러 소리를 내왔지만, 대동리 주민들은 북한이 남북 연결도로를 폭파한 지난 15일 이후부터 '사이렌 소리'를 주로 틀고 있다고 말한다.

신 씨는 평생 대남방송을 들어왔지만, 이 "공습경보 같은" 사이렌 소리에 대해선 "어떤 날 저 소리가 진짜여도, 내가 진짜인줄 알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신 씨는 이어 "9살인 둘째는 울기도 하고 여기에 살기 싫다고도 한다"며, 자신이 어린 시절 겪었던 불안이 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음을 우려했다.

"어렸을 때 악몽을 꾸면 저는 항상 그게 전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제 아이들도 전쟁 나는 악몽을 꾸더라고요."

'제발 양쪽이 같이 멈췄으면'

평생 대남, 대북 방송을 듣고 살아온 접경지 주민들은 남북 양측이 합의해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던 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4년 6월 15일 양측이 방송을 중단했을 당시 북한은 “통일의 그날 우리 만납시다. 기쁨과 감격에 울고 웃으며 서로 얼싸 안읍시다"라며, 한국은 “그 동안 우리 방송을 들어준 인민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무궁한 행운을 빕니다”라며 각각 마지막 방송을 마무리했다.

북한 개풍군을 배경으로 인터뷰 중인 당산리 박효철 이장
BBC
당산리 박효철 이장은 남북이 확성기방송을 멈췄던 순간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당산리의 박 이장도 "공동선언으로 확성기를 떼어갔던" 당시를 떠올리며 "조용하니 아주 좋았다"고 말한다.

그는 평생 들리던 소음이 들리지 않자 당산리가 "아주 살기 좋은 곳"임을 알게 됐다.

"(방송만 안 들리면) 여기는 가축도 얼마 없고 조용해서 살기가 아주 좋아요.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잠기지도 않고."

신나리 씨도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방송을 멈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음 방지, 피해보상, 이런 얘기를 하는데, 저는 그런 건 의미가 없다고 봐요."

BBC와 만난 다른 주민들 모두 보상도, 북한에 대한 더 강한 응징도 아닌 '방송 중단'을 원한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군은 이에 대한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주민 피해를 고려해 방송 중단 또는 축소를 고려한 적 없냐는 BBC코리아의 질문에 국방부는 "군사작전과 관련된 내용이라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지자체들도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지만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인천시 관계자는 BBC에 "국방부와 행정안전부에 대책 마련을 요청했지만, 어떠한 답변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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