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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거래, 스파이, 사보타주…러시아가 '그림자 선단'을 이용해 서방 제재를 피하는 방법

1일 전
순찰함 HSwMS 칼스크로나의 승조원이 망원경으로 먼 거리의 화물선을 지켜보는 모습
AFP
NATO의 '발틱 센트리' 임무의 일환으로 스웨덴 해안에서 순찰함 HSwMS 칼스크로나가 화물선을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자국 최대 석유 기업 2곳을 제재 명단에 올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조치에 대해 자신들은 "면역" 상태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석유를 떠받치는 것은 저렴한 가격의 석유를 찾는 전 세계 구매자들에게 제재도 뚫고 수백만 배럴씩 운송하는, 이른바 '유령' 혹은 '좀비' 유조선으로 구성된 '그림자 함대'다.

이러한 그림자 함대의 고객은 러시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란의 지도자들, 베네수엘라 군부 인사들, 심지어 환경 파괴나 선원들의 안전 및 자유보다도 이익만을 좇는 기회주의적이고 비양심적인 서방 사업가들도 이들과 거래한다. 선원들이 바다에 표류하는 선박에서 수개월, 심지어 수년간 방치되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 어둠의 함대 활동이 급격히 증가한 계기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며, 비밀스러운 이 선박들의 주요 수혜자는 푸틴 정권이다.

푸틴 정권은 그림자 함대를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대로 자신들의 "전쟁 기계"에 돈을 대고자 자국의 주요 수출품인 석유 수출에 이용할 뿐만 아니라 유럽 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과 그들의 해저 케이블 및 송유관을 대상으로 한 '하이브리드' 스파이 및 사보타주(의도적인 파괴 및 방해) 작전에도 활용한다.

싱가포르에 정박 중인 선박들
AFP
분석가들은 서방의 대러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함대가 러시아 해상 원유 수출의 80%를 운송하고 있다고 추산한다

러시아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세계 3대 원유 수출국 중 하나다. 미국 에너지관리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산 원유는 전 세계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해상 원유 수출은 대부분 서방, 그중에서도 그리스 유조선이 담당했다. 거래는 스위스에서 처리되었으며, 보험은 런던 보험사를 이용했다.

그러나 금융 서비스 기업 'S&P 글로벌' 소속 전문가들은 현재 러시아산 원유를 수송하는 유조선의 경우 5척 중 최대 4척꼴로 전 세계 해상 화물의 약 90%를 보장하는 '국제 P&I 보험 클럽'의 공인 보험사 12곳 어디에서도 보험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이는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산 원유의 80%가 그림자 함대에 의해 운송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경제대학원 연구소의 벤자민 힐겐스톡 선임 경제학자는 "러시아는 제재를 회피하고자 그림자 유조선 함대를 구축했다"며 "하지만 이들 선박은 노후화했고, 제대로 유지보수도 되지 않았으며, 유류 유출에 대한 보험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러시아 해상 원유 수출의 약 4분의 3은 발트해와 흑해 항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이러한 선박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유럽 해역을 통과한다는 뜻입니다."

2024년 4월 25일 중국 산둥성 옌타이항에서 포착된 초대형 유조선
Getty Images
중국 산둥성 옌타이 항구의 모습. 이란산 원유 대부분이 이러한 항구로 운송된다

S&P 글로벌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해상 유조선 5척 중 거의 1척은 제재 대상국에서 석유를 몰래 운반하고자 노후화된 선박으로 불분명한 국기를 달고 항해하는 그림자 함대에 속한다.

이 가운데 50%는 러시아산 원유 및 석유 제품만, 20%는 이란산만, 10%는 베네수엘라산만 운송하지만, 나머지 20%는 특정 국가와 연계되지 않은 채 제재 대상인 여러 국가에서 생산된 원유를 실어 나른다.

이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선박들은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실어 주로 인도와 중국으로 향한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석유 및 석유 제품의 최대 해상 수입국인 국가들이다.

러시아산 원유의 소규모 구매국으로는 튀르키예,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UAE) 등이 있다.

해질녘 바다 위 유조선
Corbis via Getty Images
이른바 '좀비 선박'들은 폐선 예정인 선박에 부여된 국제해사기구(IMO) 등록번호를 사용한다

자신들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그림자 선단의 선박들은 다음과 같은 수법을 동원한다:

  • 항만 관제의 감시가 비교적 약한 공해에서 선박 간 유류 환적을 실시한다. 때로는 화물의 출처를 은폐하고자 악천후를 틈타기도 한다
  • 선박의 위치, 속도, 항로, 이름, 기국(선박의 국적이 등록된 국가) 등의 정보를 전송하는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을 꺼두거나 조작한다. 때로는 선박의 위치를 조작할 때 너무 형편없는 엉터리로 표시함으로써 때로는 선박이 "육지 위를 항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유령' 선이 된다. 소유권 정보를 은닉하거나, 등록된 기국을 바꾸거나, 아예 무기국 상태로 항해하거나, 심지어 유조선의 이름을 한 달에도 여러 번 바꾸는 식이다
  • '좀비' 선박이 된다. 실제로는 폐선 예정인 선박에 부여된 국제해사기구(IMO) 등록번호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죽은 이의 신분을 도용하는 것과 같다
2024년 7월 29일 이란 남부 부셰르 항구 도시 인근 걸프 해역에 정박 중인 유조선
Getty Images
해상 분석 기업 '윈드워드'는 그림자 선단의 규모가 현재 1300척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의 해상 분석 기업 '윈드워드'는 올해 8월까지 허위 국기를 단 선박의 수는 최소 65% 증가했으며, 현재 그림자 선단의 규모가 1300척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선박의 기국 등록 서비스 시장도 호황이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가 사기이며, 합법이라 하더라도 국적을 발급해 준 국가들이 이 시장에 갓 진입한 상태로 자국 깃발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감시할 의지나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힐겐스톡은 "글로벌 해운 규제상 선박이 기술적으로 기준을 잘 준수하고 있는지, 기름 유출 보험은 적절히 들어놨는지 확인할 책임은 선박에 국적을 부여한 기국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그림자 선단의 경우 이러한 감시 기능을 수행하리라 신뢰할 수 없는 관할국들입니다."

바다 위의 유조선
Reuters
선박 '보라카이'호의 모습. 이전에는 푸슈파, 오디세우스, 바루나, 키왈라 등의 이름으로 항해했으며, 지금껏 무려 7개국의 국기를 달았다

한편 올해 정체불명의 드론이 출현하여 덴마크 내 다수의 공항이 폐쇄된 사건이 있었다. 해당 드론을 날린 것으로 의심받는 베냉 국적 유조선은 지난달 프랑스 해안 근처에서 나포됐다.

프랑스 서부 해안 도시 브레스트의 스테판 켈렌베저 지방검사는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선박은 원래 선원들이 "협조를 거부"하고, "선박의 국적을 정당하기 입증하지 못하여" 체포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선박의 이름은 최근 '푸슈파'에서 '보라카이'로 변경된 상태였는데, 그 이전에도 오디세우스, 바루나, 키왈라 등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게다가 지금껏 무려 7개국의 국기를 달고 항해하였다.

프랑스 해군이 나포할 당시, 보라카이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프리모르스크의 항구 터미널에서 인도 서부 바디나르로 원유 75만배럴을 운반 중이었다.

한편 러시아 드론이 NATO 가입국인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상공을 침범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지난 6일, 벨기에 내 군사 기지 등 여러 지역에서 드론이 포착되며 브뤼셀 공항이 일시 폐쇄되는 사건이 있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우크라이나 동맹국에 대한 "하이브리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보라카이호 사건을 조사한 NATO 국가들은 발트해를 감시하고자 '발틱 센트리' 임무에 착수했다. 마르크 뤼터 NATO 사무총장은 "선장들은 우리 인프라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가할 경우, 승선하여 검사하거나, 체포되거나, 압류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영국,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당국은 현재 영국해협, 덴마크해협, 핀란드만, 스웨덴-덴마크 사이 해협에서 선박들의 보험 서류를 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에스토니아, 핀란드, 독일,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당국 또한 발트해 핵심 인프라 주변에서 발생한 여러 설명되지 않은 케이블 절단 및 해저 사고에 대응하고자 러시아의 그림자 함대를 "차단 및 억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림자 함대는 자국의 항구 혹은 해안에서 12해리 이내의 영해에서만 제지할 수 있다.

공해에서는 가로막기 훨씬 어렵다. 특히 서방 국가들이 항행의 자유를 가장 강하게 옹호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무해 통항'의 원칙에 따라 국가들은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되는 선박만 제지할 수 있다.

러시아 정치인들은 자국산 원유를 수송하는 유조선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러시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올해 5월 에스토니아가 무기국 상태로 핀란드와 자국 사이를 지나가려던 유조선을 가로막으려 하자 러시아는 전투기를 출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림자 함대는 단순한 국제 안보 위협을 넘어, 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기름에 뒤덮인 새를 닦는 자원봉사자의 모습
Reuters
50년 된 유조선 2척이 케르치 해협에서 사고를 일으켜 기름 5000톤이 유출된 이후 자원봉사자가 새를 닦아주고 있다

주요 해운사들은 일반적으로 유조선의 운항 수명을 15년 정도로 계산하고, 25년이 되면 해체한다.

그러나 그림자 선단의 유조선들은 이러한 일반적인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러시아 당국은 50년 된 유조선 2척이 케르치 해협에서 폭풍을 만나 발생한 사고로 유출된 원유 5000톤을 수습하고자 안간힘을 써야 했다.

러시아의 어느 고위 과학자는 해당 사건을 2세기 러시아 최악의 "환경 재앙"이라 평가했다. 빅토르 다닐로프-다니리얀 러시아 과학원 원장은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토록 많은 양의 연료가 유출된 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우주에서 보이는 케르치 해협 기름 유출 사태에 관한 그래픽. 위성 데이터 부족으로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으나, 남쪽까지 확산된 정황이 있다
BBC

두바이 같은 관할권에 자리한 간판회사들은 수명이 다한 선박들을 사들여 시장을 불안정하게 하고, 신규 유조선에 대한 투자 의혹을 저해한다. 파이낸셜 타임즈에 따르면 이러한 간판회사 중 일부는 러시아산 원유 기업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한다.

익명으로 운영되거나 혹은 급히 설립된 이러한 기업들이 빠르게 선박을 사고팔면서 책임 소재는 더욱 모호해진다. 이러한 유조선들은 유지보수 상태도 부실하여 기계 고장과 유출 사고도 잦다. 아울러 트랜스폰더(전파 송수신기)도 고장 나거나 꺼둔 채 항해하기에 좁은 해역에서 다른 선박들과 충돌할 위험이 커진다.

그럼에도 이 위험천만하고도 은밀한 사업은 수익성이 막대하다. 'X클루시브 쉽브로커스'에 따르면 15년 된 수에즈막스급 유조선 가격은 약 4000만달러(약 580억원)이며, S&P 글로벌은 흑해에서 인도까지 러시아 원유를 싣고 한 달만 항해해도 선주가 500만달러 이상 챙긴다고 추산한다.

이 어둠의 선주들은 이익을 챙기면서 잠재적 손실은 전 세계에 전가한다. 보험이 없기에 선박 사고 혹은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 비용은 다른 누군가가 떠안게 된다.

제재가 사라지더라도 이 그림자 함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해상 운송의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로 계속 등장할 것이다.

업계 전문지 '로이드 리스트'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점령지와 튀르키예 이스탄불 간 항로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된 중국의 '헝양 9호' 컨테이너선을 언급하며 이미 '그림자 함대 2.0'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추가 보도 및 편집: 올가 사우추크, BBC 월드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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