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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내란범인가, 혁명가인가?' 45년 만에 시작된 재심

10시간 전
법정에 출석한 김재규
국가기록원

"탕, 탕"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밤. 전직 중앙정보부 경비원 유석술 씨의 기억은 두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다.

오후 7시 40분, 유 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술자리가 열리던 건물 옆 휴게실에 있었다. 박 대통령의 궁정동 안가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그는 정문 경비를 서다 교대근무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참이었다.

첫 총성이 울린 뒤, 더 많은 총소리가 들렸다. 놀란 경비원들은 경계 근무를 시작했지만, 명령을 기다리며 밖에 있었다.

"경비과장이 와서 총 두 정과 실탄, 슬리퍼 등을 주며 묻어달라고 했어요." 당황한 유 씨는 내용물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안가 앞마당에 묻었다.

누가 총에 맞았는지는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설마 대통령을 쏜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김재규의 동생 김정숙씨(오른쪽)와 남편 김양환(왼쪽)씨
BBC
김재규의 동생인 김정숙 씨와 남편 김양환 씨는 유족을 대표해 김재규에 대한 재심을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10.26'이 발생한 지 46년 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이 시작됐다.

그의 동생 김정숙 씨(86)는 지난 2020년 유족을 대표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이 지난 2월 이를 받아들여 16일 재심이 시작됐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고등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오빠가 절대 자기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신념 하나로 저희는 버티고 살았어요."

법원이 당시 수사 과정에서 있었던 고문 및 가혹행위 여부를 인정해 다시 열리게 된 이번 재심에서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내란죄' 여부를 다시 다투는 일이다. 김재규는 당시 법원에서 '내란목적살인죄' 및 '내란수괴미수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역적의 가족으로 역사에 남을 수는 없었어요." 정숙 씨는 김재규가 과연 내란 목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사살했는지, 나아가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재평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 재판은 공교롭게도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내란우두머리 혐의 재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시작된다. 김재규에게 '내란 목적'이 있었다고 재차 인정될지, 또는 절차 문제로 판단이 뒤집힐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판결

유석술씨가 사무실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BBC
10.26 당시 유석술 씨(76)는 김재규가 쏜 총을 은닉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여성 한두 명을 데리고 술을 마시는 걸 '대행사'라고 불렀는데요, 그 대행사를 하면 저희는 비상이 걸렸어요."

당시 유석술 씨를 포함해 20명 이상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궁정동 안가 경호를 맡고 있었다. 경비과장의 명령으로 유 씨가 묻은 총 두 정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차지철 전 경호실장을 쏜 총이었다. 유씨는 이 일로 바로 체포됐다.

수사와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사건 이틀 뒤인 10월 28일,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육군 보안사령관은 김재규가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감정 대립이 격화된 것이 범행의 원인이었다고 발표했다. 그 다음 달엔 '정권 탈취 목적의 계획된 범행'이었다고 발표했다.

1심은 12월 4일에 개시됐고, 12일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았다. 재판 시작 6개월 만인 이듬해 5월 20일 대법원은 판결을 확정했다.

법정에 출석해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김재규
국가기록원
10.26 재판 결과 김재규 등 6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유 씨는 증거은닉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그의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 경비과장 이기주, 운전기사 유성옥, 경비원 김태원 등 여섯 명에겐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김재규에겐 '내란목적의 살인죄' 및 '내란수괴미수죄'가, 나머지 5명에겐 '내란목적의 살인죄' 및 '내란중요임무종사자미수죄'가 적용됐다. 사형 집행은 최종 판결 4일 만에 이뤄졌다. 당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무력 진압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유 씨는 내란죄 판결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의 생각을 전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돌아가신 동료분들이 안타깝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에 의해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마음이지만..."

유 씨는 출소한 후 이 사건과 관련해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요시찰이 돼서 경찰이 어딜 가나 따라오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전두환 대통령 내려갔을 땐 또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어딜 취직을 해도 경찰들이 계속 와서 부모님 일이나 도우러 시골에 내려갔는데, 거기까지 따라오더라고요." 유 씨는 한동안 감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의 말처럼 10.26은 오랜 기간 금기어였다. "김영삼 정부 때부턴가 기자들이 조금씩 찾아오더라고요."

침묵하던 유족들이 재심을 결심한 이유

김재규의 가족사진
김재규 유족
김재규의 셋째 동생인 김정숙씨와 남편 김양환씨는(아랫줄 왼쪽 흰 한복을 입은 부부) 이번 재심을 통해 김재규(윗줄 가운데 남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김재규의 가족들 역시 침묵을 지켰다. "처음엔 너무 큰 사건에 말려드니까 그냥 조용히 있었죠. 그러다 나중에 오빠를 좀 더 알게 되니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거예요."

정숙 씨가 재심을 청구한 건 사건 41년이 지난 지난 2020년의 일이다. 유족들은 당시 JTBC가 입수해 공개한 약 128시간에 달하는 10.26 재판 녹음 테이프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가족 대표로 재심 실무를 담당한 정숙 씨의 아들 김성신 한양대 겸임교수는 "오래 전부터 재판이 문제가 있다는 문제제기는 있어왔는데, 그 테이프가 재판이 절차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새로운 증거라고 봤다"고 말했다.

재심을 담당한 이상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기록 전체를 검토한 결과 10.26 사건 재판이 "총체적인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법정에서 작성된 공판조서와 녹음된 테이프를 일일이 비교해 보니 조서가 너무 허술하게 기록이 되어 있더라고요. 이게 제대로 안 써있으면 나중에 2심, 3심에서 판사들이 1심 법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테이프를 들어보니 내용도 많이 비고, 변호인들이 재판을 녹음을 좀 하게 해달라고 하는데 판사가 녹음을 거절하는 것도 다 나오더라고요."

이 변호사는 이어 "당시 김재규와 부하들은 대부분 민간인이었는데 군사재판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합수부의 논리는 박 전 대통령 사망 후 비상계엄이 발령된 상황이었기에 군사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이 사건은 비상계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라 반박한다.

이번에 법원은 가족들이 청구한 여러 가지 문제들 중 '고문 및 가혹행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수사하면서 수일간 구타와 전기고문 등의 폭행과 가혹행위를 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재심 개시 사유서에 명시했다.

김재규 역시 재판에서 "연행되자마자 수사관들이 전신을 닥치는 대로 구타하고 심지어 EE8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고 전기 고문까지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숙 씨도 고문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면회를 갔을 때 오빠 몸 구석구석을 봤는데, 손가락에 일회용 밴드를 몇 군데 감아놨더라고요. 아마 고문 상처가 났어서 그랬던 건가 해서 마음이 아팠죠."

'내란죄' 뒤집힐까

유족들은 재판 과정의 문제뿐 아니라 '내란죄' 여부를 가장 중점적으로 다투고 싶다고 말한다. 정숙 씨는 "자기가 대통령을 해보겠다고 그런 짓을 한 건 절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상희 변호사는 내란죄 판결이 부당함을 주장한다. "내란이 성립되려면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 기관의 기능을 강압에 의해 정지시키거나 헌법과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켜야 돼요. 그런데 이 사건은 그런 게 없어요."

형법에선 내란을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일'로 정의한다.

"이번 윤 전 대통령의 내란죄 재판의 경우에도 대통령이 국회와 선관위의 기능을 정지하려 했는지를 밝히는 게 핵심이에요. 김재규의 내란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도 박정희를 죽인 후에 국가기관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만한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그 부분을 찾기가 어려워요."

법원에서 김재규는 대통령 암살 후 '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민주회복 혁명'을 완수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적엔 많은 의문이 남는다는 평가가 있다. 미리 초대한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 등과 안가를 빠져나온 김재규는 처음엔 남산 중앙정보부로 가려다가 정 총장의 설득에 육군 본부로 향하고 그곳에서 체포된다.

"박 전 대통령을 제거하는 판단까지는 계획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아닌가, 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성신씨는 이런 면에서 김재규의 행위가 내란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는 이상희 변호사
BBC
이상희 변호사는 이번 재심에서 김재규의 행위가 내란이었는지 여부가 가장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변호사는 "사건 기록을 검토해 보니 이렇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내란 목적으로 기소를 해서 유죄 판결을 할 수 있었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무리 법치주의가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엉터리 재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내란 혐의에 대해선 1980년 당시 재판부도 의견이 갈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14명의 재판관 중 6명이 내란목적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결국은 조작을 해서 내란 목적 살인으로 기소를 하고 유죄 판결을 받게 한 사건으로 저희는 보고 있어요."

그는 이런 절차적 문제가 많은 재판이 졸속으로 추진됐기에 10.26의 동기와 김재규에 대해 아직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1990년대 초 언론사 기자로 김재규 재판 전체 녹취를 최초로 입수해 보도했던 김재홍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교수는 "아마 국내외에서 김재규 구명 운동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질까 봐서 서둘렀던 것 아닐까"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당시 천주교를 중심으로 김재규 구명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재규는 혁명가인가, 내란범인가?

김재규가 장관인 건설부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
국가기록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재규를 신뢰해 요직에 등용했다

김재홍 교수는 김재규를 로마 황제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와 비교할 수 있다고 평한다. "상관이자 은인인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군주정으로 바꾸려고 하니까 민주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해했잖아요."

박정희와 김재규는 각별한 사이였다. 나이는 박정희가 9살이 많았지만 둘은 동향 출신에 육사 2기 동기생이었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군에서 전역한 1973년엔 그를 국가정보원 차장에 임명했고, 1974년 건설부장관을 거쳐 1976년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

그런 김재규의 행위를 민주화를 앞당긴 의로운 행위로 평가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며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동생 김정숙 씨는 "100만 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대통령 하나 제거하는 것밖에는 없겠다는 판단이 있었던 걸로 가족들은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재판 당시 김재규가 직접 작성한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당시 번지고 있던 부마 항쟁에 대해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며 강경하게 발언했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여기에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이 죽어도 까딱 없는데, 우리도 데모하는 놈들 100~200만 명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며 동조했다. 김재규는 이 대목에서 소름이 끼쳤다고 법정에서 여러 차례 진술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 전 대통령은 1972년엔 영구 집권을 위해 '유신 헌법'이란 전대미문의 헌법까지 만들며 독재를 이어가고 있었다.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이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와 연임 제한을 없앴으며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할 수 있도록 하고 국회도 해산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헌법 효력까지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까지 부여했다.

당시 군인이던 김재규는 유신 헌법을 보며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아니었다"면서 "그때부터 이 헌법을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이 제 마음속에 움텄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1974년 건설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바지 주머니에 권총을 가져갔고" 이후에도 "국기 밑에 권총을 숨기기도 했다"고 밝혔다.

건설교통부장관 시절 집무실에 앉아있는 김재규
국가기록원
김재규는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암살을 기도했었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부터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드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온 함세웅 신부는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에 저항한 학생들은 전부 민주화 운동가로 평가받는다"며, "유신 체제의 핵심을 깨뜨린 김재규도 민주화의 대표적인 업적을 이뤄낸 셈"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구속·수감된 피해자이기도 한 함 신부는 그러나 1979년 말 출소 후 김재규 구명 운동에 나섰다. 그는 몇몇 인권 변호사들과 종교인들에게 정황을 들은 결과 "김재규는 민중들을 위해서 혁명을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을 구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구명을 위한 행동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그와 광주·전남 지역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송죽회' 회원들은 매년 김재규 전 부장의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다.

반면 김재규에 대한 조심스러운 평가도 있다.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김재규가 "유신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있어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줄인 부분은 무시할 수 없다"면서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그를 "의사라고까지 평하는 것은 좀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김재규가 당시 박정희에 이은 권력의 2인자였음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국내 정치 공작의 핵심 기관이었다. 10.26 재판 당시 군 검찰관은 그가 재직하면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아들인 건수가 총 "639건"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수사권은 물론 기소권도 가진 '무소불위'의 조직이었다. 단순 정보기관 업무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 광범위하게 개입하며 여러 공안 사건들을 기획하기도 했다. 1974년 김재규가 차장이었던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정부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형까지 시키는 사법살인을 자행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며 10.26 사건을 취재한 조갑제 씨는 "김재규는 다른 추종형 관료들과는 달리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은 나쁘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그러나 "그런 고민이 행동으로 나타난 증거는 안 보인다"고 말한다. "감옥 간 사람 풀어주고, 박정희랑 다투고, 이래선 안 된다고 건의하고, 이런 흔적은 없어요."

"일부에선 김재규를 안중근과 같은 의사로 평가하려고 하는데, 박정희는 일제가 아닙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BBC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김재규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행동으로 보여준 흔적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10.26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럽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박 전 대통령에겐 한국인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한 유능한 대통령이라는 평가와 인권과 노동권을 탄압하며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여전히 잇따르고 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업적을 남긴 지도자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성공적인 근대화 과정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현재 조갑제닷컴을 운영하고 있는 조 대표는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다른 독재자들처럼 발포 명령이나 학살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희생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김두얼 교수는 "전부 박정희 정부의 공이라고 볼 순 없지만, 박정희가 집권한 18년간 연평균 10%에 가까운 경제성장을 한다는 건 놀라운 성과"라고 말한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중화학 공업화는 정말 필수적이었는데, 당시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아니었다면 그게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함세웅 신부는 "청년, 학생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문당하고 매맞는 것을 보고 들었다"며 "이렇게 인권 탄압을 한 대통령을 어떻게 좋게 평가할 수 있냐"고 물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서있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
Reuters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다

'판결보다는 역사'

이처럼 끝나지 않는 논쟁 속에서 재심을 통해 다시금 박정희와 김재규가 소환됐다. 유족들은 이번 재판이 김재규와 10.26 사건을 다시 평가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판결이 끝이 아니라 10.26과 김재규에 대해 한국 사회가 다시 평가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판결보다는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김재규의 조카인 김성신 씨는 "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행위를 내란 목적 살인이라는 기계적 법적 틀로만 단죄했던 기존 판단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나가고자 한다"고 재심의 목적을 밝혔다.

이상희 변호사도 이 재판이 판결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마침 한쪽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재판이, 한쪽에선 김재규의 재심이 이뤄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 재판들이 딱 여기에만 멈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과연 민주주의가 무엇이었냐, 과연 어떤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 민주주의가 만들어져왔고, 또 어떤 부침이 있었는지를 논의할 수 있는 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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