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생명줄'이 된 원격근무…가자지구의 IT 종사자들을 통해 엿보는 미래
"그때는 정말 바닥을 치고 있었고, 불확실성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왈라 볼리디스(24)는 이렇게 회상했다.
"하지만 저는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서 끝은 아니라고, 내 꿈을 위해 끝까지 싸워 나가겠다고요."
헤드셋을 눌러쓰고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볼리디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있는 멘토와 화상으로 연결해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늘 최신 상태로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자지구 중부의 텐트촌에서 피난 생활을 이어가는 부모님과 어린 형제자매 네 명의 생계를 홀로 짊어진 그에게 이는 매일 직면하는 시련 중 가장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데이르 알-발라의 공유 사무실에서 일하는 볼리디스는 "이번 전쟁이 시작되고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대학도, 직장도 잃었고, 심지어 세상을 떠난 가족도 있다. 여동생들은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 건강 또한 "완전히 망가졌지만" 우선 일자리를 구하는 데 집중했다고 말한다.
볼리디스는 지금 이 순간 디지털 경제에서 생계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가자지구의 청년 수천 명 중 하나다.
그는 "일종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일하러 나가고, 할 일을 끝내는 것이 내 하루의 최우선 목표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거나 현실에 좌절해 울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가자지구의 폐허 속에서 200만 명이 넘는 주민 대부분은 인도적 지원에 의존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제대로 돈을 벌 길도 거의 없다. UN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실업률은 전쟁 전 22%대에서 현재 80%를 넘어섰다.
인도주의 단체들은 이 상황에서 온라인 업무, 특히 해외 고객을 상대로 하는 프리랜서 업무야말로 최고의 기회라고 말한다.
미국 인도주의 단체 '머시 코프'의 니콜 하크는 "우리는 이를 일종의 '디지털 생명줄'이라고 부른다. 노트북과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인터넷 연결망만 있다면 일거리와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일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들은 원조에만 의존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2023년 10월 하마스가 주도한 이스라엘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으로 이번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가자지구의 기술 산업은 급성장하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안보를 이유로 하마스가 지배하는 이 지역을 봉쇄해 왔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원격으로 코딩, 디자인, 프로그래밍 등의 일을 하며 이 삼엄한 봉쇄와 국경 제한을 극복해 왔다.
'가자 스카이 지크스'는 2012년 구글과 머시 코프가 공동 설립한 단체로, 초창기 목표는 기술 스타트업 육성이었다. 이들이 운영하던 센터 세 곳에서는 코딩 강좌를 운영하고 글로벌 시장 진출에 대한 조언도 제공했는데, 늘 청년들로 북적였다. 이 중 두 곳은 이번 전쟁으로 파괴됐다.
머시 코프는 현재 가자지구 전역에 생겨나고 있는 공유 사무실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발전기와 태양광 패널을 활용해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인터넷 연결망도 유지한다.
가자지구의 전력 시스템은 거의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며, 통신 네트워크의 경우 약 75%가 손상되거나 파괴됐다.
가자시티의 한 공유 사무실에서 일하는 타릭 자임(44)은 "새로운 경력을 쌓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전쟁 전 현지 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CTO)였던 그는 현재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자임은 "노트북으로 작업할 때면 모든 것을 잊게 된다. 내 주변 상황도 잊어버리곤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이발소 예약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과 사우디아라비아 고객을 위한 발레파킹 앱을 개발했다.
이렇게 자임이 벌어들인 수입 대부분은 현재 접경국 이집트에 살고 있는 아내와 세 자녀를 부양하는 데 쓰인다. 그전에 모아둔 돈은 전쟁 초기 가족을 탈출시키는데 거의 다 써버렸다.
하지만 대금을 받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가자지구에는 현재 다시 문을 연 은행 지점이 거의 없으며, 현금 부족 사태도 심각하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은 국제 은행 거래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고, 가자지구 주민들은 대부분 디지털 결제 플랫폼에 접근할 수 없다.
일부는 해외에 있는 친척을 통해 돈을 받기도 한다. 혹은 높은 수수료를 내고 가자지구 내 중개업자들을 통해 전산으로 받은 돈을 현금으로 바꾸는 이들도 있다.
자임 또한 이로 인해 원래 받은 대금의 절반 정도만 손에 쥐는 경우도 흔하다고 토로했다.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그는 "그저 겨우 먹고살 정도의 수준"이라고 했다.
지난해 미국의 중재로 휴전이 성사되고,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위원회'와 하마스가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계획안을 추진해 나가자고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은 여전히 거의 매일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자지구 내 하마스 산하 보건 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휴전 이후로도 아동 265명을 포함해 최소 1250명이 사망했다. UN은 이 통계가 신뢰할 만하다고 보고 있다.
자임은 지난 6월 가자시티에 있는 자신의 공유 사무실 밖에서 발생한 공습을 떠올렸다. 당시 온라인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던 한 팔레스타인 여학생이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요원을 표적으로 삼았으며 민간인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했다고 말한다.
가자지구의 또 다른 IT 종사자인 마흐란 바예드는 이러한 위험이 있기에 늘 고객들에게 자신과 팀원들은 모바일 앱·웹사이트광고 제작 등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안심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바예드는 "3~4개월 정도 소요되는 IT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면 고객들에게 '모든 작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되니, 설령 우리가 사망하더라도 고객님의 작업물은 안전하게 확보된다'고 설명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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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예드는 가자시티의 알-시파 병원 폐허 근처에 자리한, 자신의 집터 근처에서 아내와 어린 자녀 셋을 데리고 텐트에서 살고 있다.
이 병원은 이번 전쟁 기간 여러 차례 이스라엘의 공습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이곳을 지휘통제 센터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마스는 이를 부인했다.
바예드는 "장비도, 집도, 사무실도 전부 잃었다"며 "가자지구에는 세상의 종말이 온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현재 바예드는 모바일 앱, 웹사이트, 광고 등을 제작하는 프리랜서로 변신해 삶의 탈출구와 목적을 찾고 있다.
그는 "가자지구에서도 전 세계 완전히 다른 지역에 사는 팀원들과 협업하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며 "그게 바로 내가 기술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점 중 하나"라고 했다.
한편 바예드의 노트북은 이스라엘의 공습 당시 화면이 망가졌다. 이로 인해 그는 늘 모니터를 따로 들고 다닌다.
가자지구의 수리점들은 파손된 기기에서 나온 부품을 활용해 컴퓨터를 수리하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이마저도 한계가 있다.
가자지구 경계선 통제를 담당하는 이스라엘 국방부 산하 기구 '코가트'는 컴퓨터와 컴퓨터 부품을 민간 및 군사 목적 모두에 사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 품목으로 분류해 반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자지구의 IT 업계 종사자들은 자신들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라고 강조했다.
데이르 알-발라의 볼리디스는 팔레스타인-네덜란드 비정부기구인 'TAP'의 도움을 받아 멘토·진로 코칭 등을 받고 잠재적 고용주를 만날 기회를 얻었으며, 최근 두바이에 본사를 둔 기업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다.
이제 그의 목표는 형제자매들의 삶을 개선하고, 13살 생일을 앞둔 여동생이 가자지구에서 후송돼 치료를 받는 것이다. 외상 후유증으로 인해 여동생은 다리가 심하게 붓는 만성 질환인 림프부종을 앓고 있다.
"제 첫 번째 소망은 바로 가족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라는 볼리디스는 "그리고 동생이 가자지구를 빠져나가 의료적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또 저 자신을 위해서는 장학금을 받아 해외로 나가고 싶습니다."
가자지구의 전반적인 재건 속도는 더디지만, 이곳의 IT 종사자들은 더 밝고 희망찬 미래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추가 보도: 말락 하수네, 존 머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