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군용 가방에 숨어 콜롬비아에 밀입국했던 한국인 아이

카를로스 아르투로 가욘은 태어났을 당시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한국전쟁 때 군용 가방에 숨어 콜롬비아로 온 후, 카를로스 아르투로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의 본명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선이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종종 철자가 뒤바뀌거나 오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 중 본명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윤우철이다. 그의 나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콜롬비아 군인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던 그를 발견했을 때, 군인들은 그를 7~8세 정도라고 추측했다.
그로부터 7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군용 가방에 숨어 콜롬비아로 건너간 한국인 소년. 평생을 남미에서 살다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고국에도 돌아왔던 그 소년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콜롬비아 언론인 안드레스 사닌 역시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다. 최근 사닌은 머나먼 타지에서 펼쳐진 이 한국인의 삶을 책으로 펴냈다. 흥미롭게도 이 한국인은 콜롬비아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결혼을 비롯한 개인의 삶이 현지 언론에 보도될 정도였다.
사닌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다른 군인들과 카를로스 아르투로의 아들 중 한 명인 윤크를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분단과 버려짐, 과거의 아픔 등이 복잡하게 어우러진 한 인생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유용한 자산이 됐다.
카를로스 아르투로의 복잡한 여정은 1951년에 시작한다. 라우레아노 고메즈 당시 콜롬비아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약 5,000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반도에 온 콜롬비아 군은 지금의 남한 및 미국과 함께,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에 맞섰다.
콜롬비아 부대
그 시절은 초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의 이념적, 경제적, 군사적 패권을 놓고 다투던 냉전 시대였다. 그 냉전 시대 최초의 군사 분쟁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5년 전인 1945년에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했다.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한국은 수십 년간 받아야 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후 국제사회는 '한국인들이 통일된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한반도를 일시 분할했다. 한반도의 북쪽 절반은 소련군이, 남쪽 절반은 미군이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북쪽과 자본주의 이념이 장악한 남쪽의 차이는 더욱 커져갔다. 결국 한반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치 체제로 나뉘어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등에 업고 남한을 침공했다. 한반도에 단일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남한은 미국과 UN의 지원을 받아 북한에 반격했다.
그렇게 시작된 잔혹한 전쟁은 3년간 400만~6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냈다. 수천 명이 전쟁 난민이 되었고, 수많은 가족이 생이별했다. 결국 한반도는 두 개로 쪼개졌다.
콜롬비아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국가였다. 콜롬비아군은 '바타욘 콜롬비아'(콜롬비아 부대)라고 불렸다.
당시 한국에 온 콜롬비아 군인 중에는 "미쳤다"는 평을 들을 만큼 모험 성향이 강한 오렐리아노 가욘도 있었다. 가욘은 한국에 왔다가 어른들과 떨어져 굶주리는 한국인 아이를 보며 부성 본능을 느끼게 됐다.
'파파산, 콜롬비아 가고 싶어요'
나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콜롬비아에 데려온 한국인 아이에 대해 줄곧 침묵해왔다.
(...)
매일 산책을 하면서 나는 쓰레기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쌓아두는 곳을 지나곤 했다. 어느 날이었다. 눈 위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
발자국을 따라간 곳에는 아이들 일곱 명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 아이들의 손에는 쓰레기가 들려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이들은 그곳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했다. 한국인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한 아이가 유독 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대로 돌아와 통역을 해줄 사람을 찾았다.
나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과 함께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한국인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자리에서 나는 어린 우철이를 부대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이라는 우철이는 매우 활기차고 재미있는 아이였다. 나는 이후 몇 달간 우철이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쳤다. 우철이는 많은 단어를 빠르게 익혔고,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파파산, 콜롬비아에 가고 싶어요.
(...)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를 콜롬비아로 데려갈 수 있게 허가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아이를 밀입국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휴전 조약이 체결되고 11년이 지난 후인 1964년, 카를로스 아르투로의 양아버지인 아우렐리아노 가욘이 신문 '엘 에스펙타도르'에 전한 이야기다.
콜롬비아 부대의 아들
사닌에 따르면, 콜롬비아 부대원들과 어린 우철이가 만난 경위에 대한 유일한 공식 기록은 이것뿐이다.
사닌은 다른 참전 용사들을 인터뷰해 콜롬비아 군인들과 한국인 아이가 만나게 된 이야기의 신뢰도를 검증했다.
사닌은 BBC 문도에 "가욘의 동료이자 내가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눈 참전용사 라몬 로하스도 아이가 콜롬비아 부대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고 말했다"며 "전쟁 중에는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카를로스 아르투로의 친어머니는 그를 비롯해 다른 자녀들을 남겨두고 집을 떠났다. 그래서 가장 나이가 많은 누나가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고 한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서 군인들은 아이를 보게 되면, '붙잡아' 부대로 데려갔습니다."
부대를 자주 드나들던 아이는 아우렐리아노 가욘과 특히 가까워졌다. 아마도 그가 주방을 담당하고 있어서 다른 병사들보다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아이는 군인들 사이에서 지낸 뒤 콜롬비아로 갔다. 하지만 아이는 한동안 그 여정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군인들은 아이가 기꺼이 콜롬비아로 가기를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됐을 때 군인들이 아이에게 제안한 것이죠. 하지만 군인들은 아이의 정확한 나이도 몰랐습니다. 아이는 영양실조에 공적 서류도 없었고, 콜롬비아가 어떤 나라인지, 그곳에 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미성년자였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면, 아이의 동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닌은 "아이가 콜롬비아행을 원하지 않았다면 군인들도 그 마음을 쉽게 알아챘을 것인 만큼, 아이가 동의했던 것 같다"며 "이는 납치라기보다는 파멸과 굶주림으로 인한 군인들과 아이의 충동적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남한과 북한의 휴전 협정은 1953년에 체결되었다.
한반도가 휴전으로 전쟁을 중단하던 무렵, 가욘은 아이를 군용 가방에 넣고 다른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콜롬비아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욕을 시키고, 틈틈이 카드 놀이를 하며 28일간 배에서 아이를 보살폈다.
그렇게 콜롬비아로 간 아이는 약 반세기가 지나 다시 한국을 찾았다.
한국인 아이의 콜롬비아 생활
아우렐리아노 가욘은 아이의 양아버지가 되었다. 이 가족은 처음에는 가욘이 태어난 안티오키아 지역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아이는 카를로스 아르투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사닌은 카를로스 아르투로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새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며 "자주 집을 나가는 반항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쟁에 시달리다가 이역만리로 떠나온 이 아이는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릴 뻔했다.
아우렐리아노 가욘을 비롯한 파병 군인들이 콜롬비아로 돌아왔을 때, 콜롬비아는 정부와 좌익 게릴라가 분쟁 중이었다.
사닌은 "아이가 다른 군인들과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이 있다"며 "그중에는 분쟁 상황 속에서 아이가 양아버지와 콜롬비아 곳곳을 떠도는 모습도 있다"고 말했다.
콜롬비아 사람들이 "군용 가방 속 아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이가 콜롬비아로 오고 11년이 지난 후인 1964년이다. 아이의 양아버지가 '엘 에스펙타도르'에 이 이야기를 공개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카를로스 아르투로는 유명세를 치르게 됐다.
그의 삶에 대해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그의 인지도를 활용하기 위해 그를 사칭하는 이들도 있었다.
카를로스 아르투로는 양아버지처럼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전투 요원은 아니었지만, 국방부 기록 보관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콜롬비아 여성과 결혼했다. 당시 이 결혼은 전국 일간지 '엘 티엠포'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결혼 후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사닌은 카를로스 아르투로를 자신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 은둔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삶은 버려짐이나 헤어짐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카를로스 아르투로는 처음에는 한국인 어머니와 헤어지는 경험을 했고, 그다음에는 아내가 그를 떠났다.
사닌은 "그의 아내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다른 사람에게 갔다"며 "한반도가 분단된 것처럼 그와 아이들을 갈라놓았다"고 말했다. "아들 중 한 명은 어머니와, 윤크는 아버지와 더 가까웠어요."
윤크의 도움으로, 사닌은 예상치 못한 큰 반전으로 이어진 1999년의 이야기를 책에 담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1999년, '한국방송공사'(KBS) 소속의 언론인들이 태평양을 건너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는 카를로스 아르투로의 집을 찾아왔다. 그가 거의 환갑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의 삶을 TV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 위함이었고, 이를 위해 한국행을 제안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첫 반응은 냉담했다. 사닌의 책에 따르면, 카를로스 아르투로는 한국에서 온 이들을 반기지 않았고, 그들 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하지만 아들 윤크는 아버지가 반드시 한국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오직 아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한 마음 하나로 KBS의 제안을 수락했다.
윤크의 증언에 따르면, 카를로스 아르투로는 비행기 안에서도, 한국에 도착한 후에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부자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서울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지 5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눈부신 재건이 가능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디를 가든 기자들이 그를 따라붙었다. 텔레비전 인터뷰를 하던 날, 그는 긴장과 불안으로 몇 분간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생방송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스튜디오에 전화벨이 울렸고, 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카를로스 아르투로의 누나라고 말했다.
상상조차 못 했던 재회
사닌은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극적인 연출을 위해 일부 장면에 연극적 요소를 더했다고 전한다. 제작진은 카를로스 아르투로에게 한국의 시골을 보여주겠다며 서울 외곽의 한 주택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과 마주했다. 한 여성이 다가와 그의 셔츠를 들추려 했고, 그의 가슴에서 흉터를 찾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실수로 끓는 물을 엎지르며 남긴 상처였다. 흉터를 확인한 여성은 눈물을 쏟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게, 남매의 포옹은 거의 50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후 며칠 동안, 그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조각난 기억들이 퍼즐처럼 이어졌고, 한국 음식을 맛보았으며, 가족들의 기억 속 자신을 들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음을 이해하게 됐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집을 떠났고, 이후 그가 한국을 떠난 후에도 죽는 날까지 아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그는 또 다른 의문도 풀 수 있었다. 콜롬비아행이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 누나는, 동생이 떠나는 날 자신에게 "축복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군용 가방에 담겨 콜롬비아로 향했던 소년은, 결국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긴 세월의 상처를 치유했다.
마지막 여정
카를로스 아르투로 가욘은 2013년 콜롬비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를 직접 기억하는 이들도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아들 윤크, 그리고 언론인 사닌 같은 사람들 덕분에 그의 이야기는 잊히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윤크는 보고타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며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 땅에 묻는 것이 그 소원이다.
군용 가방 속에 담겨 낯선 땅으로 건너갔던 그 아이의 마지막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