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의 FBI·CIA 요원용 보험사 인수 …1조달러 규모의 국외 투자
2018년 이후 미국은 경쟁국들이 반도체부터 통신 분야에 이르기까지 자국의 민감한 산업에 대한 경쟁국들의 투자를 막고자 법률 제도를 강화해왔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게 엄격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16년, 미국 정보 기관을 취재하는 베테랑 기자 제프 스타인은 제보 하나를 받게 된다. 미 연방수사국(FBI)과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에게 배상 책임보험을 전문으로 판매하던 소규모 보험사가 중국 기업에 매각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스타인 기자는 "이에 대해 직접 아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정보국 요원들의 보험사가 중국 소유라는 걸 알고 있었냐'라고 물었다"면서 "듣자마자 정말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해당 보험사인 '라이트 USA'는 중국 지도부와 밀착 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민간 그룹인 '푸싱 그룹'에 조용히 인수되었다.
미국이 우려해야 할 바는 명백했다. 라이트 USA는 미국 내 수많은 비밀 요원 및 정보국 관계자의 개인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보험사와 그 모회사인 '아이언쇼어'가 중국 기업의 손에 넘어간 이상, 그 정보에 누가 접근할 수 있는지 미국은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이트 USA 매각 사건은 결코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다.
BBC는 중국 국영 자금이 어떻게 부유한 국가들로 흘러들어 미국, 유럽, 중동, 호주 등에서 자산을 매입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최신 데이터를 독점적으로 사전 입수할 수 있었다.
지난 20년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해외 투자국으로 부상하며, 민감한 산업, 기밀 혹은 핵심 기술 등을 장악할 잠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규모나 대상 등 자국의 해외 투자 지출에 대한 세부 사항은 국가 기밀로 취급한다.
그러나 스타인 기자에 따르면 라이트 USA 매각 조건과 관련해서는 "불법적인 요소가 없었다.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밀접하게 얽혀 있기에, 결국은 (그 정보를) 중국 정보국에 넘겨주는 셈"이다.
실제로 중국 정부가 해당 거래에 관여한 정황도 드러났다. BBC가 최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중국 국영 은행 4곳이 케이맨제도를 통해 12억달러(약 1조7000억원) 가량의 대출을 제공함으로써 푸싱 그룹은 라이트 USA를 인수할 수 있었다.
스타인의 이 보도는 미국의 주간 뉴스 잡지 '뉴스위크'를 통해 공개되며 미국 내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재무부 산하 투자 심사 기관인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는 조사에 착수했다.
그 직후 라이트 USA는 다시 한번 매각되며 이번에는 미국 기업의 손에 넘어갔다. 누가 그 매각을 지시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현재 라이트 USA를 소유한 '스타 라이트 USA'와 푸싱 그룹 모두 BBC의 의견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미국 고위 정보국 소식통들은 라이트 USA 매각이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투자 규제를 강화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고 인정했다.
당시에는 대부분 사람이 중국의 이 같은 투자가 전 대륙에 걸쳐 투자 및 매각을 진행하는 중국 당국의 훨씬 더 큰 전략의 일부였음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이드데이터의 브래드 파크스 전무는 "수년간 우리는 중국 측 자금이 주로 개발도상국으로 향한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러다 문득 수백억달러가 미국, 영국, 독일과 같은 (부유한) 국가들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바로 우리 눈앞에서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에이드데이터는 미국 버지니아 소재 연구소로, 각국 정부가 국외에서 국유 자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추적한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윌리엄 & 매리 대학' 산하로 전 세계 여러 정부 및 자선 단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된다.
지난 12년간 에이드 데이터의 주요 관심사는 중국이었다.
120명의 연구진이 4년 동안 수행한 이번 조사는 중국의 국유 자금 투자를 전 세계적으로 집계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전체 데이터세트는 오픈 소스로 공개되나, BBC는 미리 볼 수 있는 독점 권한을 얻었다.
에이드데이터가 밝혀낸 핵심 내용은 이렇다. 2000년 이후 중국 정부는 국외에서2조1000억달러를 투자했으며, 투자 비중은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간 거의 차이가 없다.
미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의 '21세기 중국 센터'를 이끄는 빅터 시 소장은 "중국은 전 세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융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중국의 은행 시스템 규모는 미국, 유럽, 일본의 것을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규모와 더불어 정부가 국영 은행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기에 중국은 독보적인 금융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
시 소장은 "중국 정부가 금리도 통제하고, 어디에 대출해줄지도 결정한다"면서 "이는 자본 통제가 매우 엄격한 환경에서만 가능한 일로,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이를 지속할 수 없다"고 했다.
부유한 국가에 대한 중국의 투자 중 일부는 건전한 수익 창출이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일부 투자는 10년 전 중국 당국이 '중국제조 2025'라는 대형 프로젝트에서 제시한 전략적 목표와 일치한다. 당시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로봇공학, 전기차, 반도체 등 10개 첨단 산업을 자신들이 주도하겠다는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핵심 기술을 자국으로 끌어들이고자 해외에서 대규모 투자를 벌이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에 대한 전 세계적 우려가 커지며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삼가고 있으나, 시 소장은 이 계획이 마치 가이드라인처럼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고 말한다.
시 소장은 "인공지능(AI)과 스마트 제조 계획" 등 "여러 계획이 여전히 발표되고 있다"면서 "그러나 모든 계획의 뿌리는 바로 제 15차 5개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지난달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중전회)에서는 향후 5년간(2026~2030년) 국가 발전의 청사진을 담은 '제 15차 5개년 계획'을 확정했다. 2030년까지 "고품질 성장과 과학기술 자립·자강"을 핵심 목표로 내세웠다.
이번 에이드데이터의 신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중국 국유 투자 흐름이 2015년 당국이 지정한 10개 분야와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BBC는 이전 보도에서 중국 정부가 영국의 반도체 기업 인수에 어떻게 자금을 지원했는지 상세히 다룬 바 있다.
라이트 USA 보험사 매각과 같은 거래에 허를 찔린 듯한 모습을 보였던 미국, 영국 및 기타 주요 경제국들은 이후 투자 심사 체계를 강화했다.
파크스 전무는 이러한 국가들이 처음에는 자국 내 중국 투자가 중국 정부의 대규모 전략의 일부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개별적인 중국 기업들의 프로젝트로 여겼다"는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각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이 배후에서 자금을 대며 이를 추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듯하다"고 덧붙였다.
다만, 비록 종종 유령회사나 역외 계좌를 통해 불분명해보일 때도 있으나, 이러한 투자와 인수가 겉으로 보기에는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영국 중국 대사관은 BBC에 "중국 정부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자국 기업들에 현지 법규를 엄격히 준수하라고 항상 요구해왔으며, 상호 이익을 기반으로 하여 이들이 국제 협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기업들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현지 경제 성장, 사회 발전,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에이드데이터의 조사에 따르면 국유 자금이 이를 환영하는 국가들로 흘러 들어가는 등 중국의 투자 패턴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현재는 중국 소유가 된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에이드데이터의 자료에서도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난다. 지난 2017년, 중국 국영 은행들은 중국 컨소시엄이 넥스페리아를 인수할 수 있도록 8억달러를 대출해 주었다. 2년 후, 넥스페리아의 소유권은 또 다른 중국 기업인 '윙테크'로 넘어갔다.
넥스페리아의 전략적 가치는 지난 9월 네덜란드 당국이 해당 기업의 운영을 관리하게 되면서 더욱 드러났다. 네덜란드 정부는 넥스페리아의 기술이 모기업인 윙테크 내 다른 곳으로 이전될 위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과감한 조치로 넥스페리아는 사실상 2개로 쪼개지며, 네덜란드 운영 부문과 중국 제조 부문이 분리되었다.
넥스페리아 측은 BBC에 자사의 중국 사업부는 더 이상 넥스페리아의 거버넌스 체계 내에서 운영되지 않으며, 지시도 따르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핵심 반도체를 글로벌 시장으로 다시 수출하겠다는 중국 측 약속을 환영한다고 전했다.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클링엔달 연구소' 소속 샤오쉬에 마틴 연구원은 네덜란드 정부가 이번 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에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놀랐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늘 신중하게 다루어왔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무역으로 번영해 온 국가다. 그리고 이는 네덜란드 정책의 상업적인 특징"이라는 마틴 연구원은 "그러다 최근 들어서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하면 더 많은 산업 정책과 투자 심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마틴 연구원은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과의 잦은 거래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식의 지나친 두려움으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기업들을) 모두 단일한 존재로 보며, 이들 모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유럽과 미국을 잡는 일이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분명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특히 민간 기업들은, 그저 수익 창출을 향해 달리는 존재입니다. 정상적인 기업처럼 대우받고 싶어 하고, 유럽에서처럼 부정적인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아 합니다.".
한편 중국이 민감한 분야의 기업 인수에서 이미 경쟁국들을 훨씬 앞섰다면, 이러한 분야 내 주도권 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하는 것일까.
이에 파크스 전무는 "절대 아니다. 여러 경쟁 사이클이 있을 것"이라면서 "여전히 이런 종류의 인수를 시도하는 중국 기업들이 많다. 다만 차이점은, 이제는 각국 정부의 해외 자본에 대한 감시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중국도 이제 행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제 추종자가 아니라 선도자입니다. 이 판의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죠. 그러나 저는 G7 국가들이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자세로 전환하리라 기대합니다."
"방어만 하는 게 아니라 공격적으로 나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