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게 원하냐 묻지 않았다'…탈북 여성이 말하는 북한의 성과 사랑
"북한에서 성관계를 하고 싶어서 한 적은 없어요. 남편이 하자고 하면 하는 거였죠."
60대 탈북 여성 A에게 성관계는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아이를 낳기 위한 의무였고, 결혼한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일상이었다. 20대와 40대인 탈북 여성 B와 C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원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들은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도 없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국가와 가족을 위해 존재했다. 순종하는 딸, 헌신하는 아내, 희생하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사랑과 결혼, 출산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국가가 요구하는 삶에 가까웠고, 그 과정에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북한 여성들의 성(性)에 대해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취재를 할수록 그들의 성 이야기는 그 너머의 것들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넘어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 고르기, 내 몸에 맞는 속옷 입기,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고르는 일까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 기사는 '성'을 통해 북한이라는 국가와 사회가 여성의 몸과 욕망, 그리고 자기결정권을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내 몸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성욕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연구하는 전주람 서울시립대 교수는 다수의 탈북 여성을 인터뷰하면서 가장 놀랐던 점으로 '욕구'라는 단어를 꼽았다.
그는 BBC에 "북한 사회엔 '성욕'이라는 개념이 없다"며 "성욕뿐 아니라 '욕구'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하다"고 말했다. 남성 위주의 성관계가 이뤄지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이, 또 자신의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박영자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저서 '북한의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Ⅰ: 여성과 섹슈얼리티'를 통해 "북한에서 성교육과 재생산 건강 정보가 거의 없어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주체가 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실제 북한 체제에서 주민들은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도, 직업이나 직장을 고를 수도 없다. 그저 당국의 결정과 명령에 따를 뿐이다.
전주람 교수는 "어릴 때부터 이미 '야, 너 키 크고 이쁜 애 일어나' 이렇게 막 뽑아서 '5과'로 데려가지 않나. 출신 성분에 따라 직업이나 대학 진학 여부도 결정되는데,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불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들이 한국에 정착한 이후에도 다양한 선택지에 피로감을 느낀다"면서 "국가가 정해주는 역할과 삶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북한 내 성 정보의 공백은 탈북 여성들의 증언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모두 북한에 있을 때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입에 담기 어려운 '남세스러운 일'로 치부됐다는 것. 탈북 여성 A는 해당 질문에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전혀 몰라요. 배란기도 몰라요. 무지해요. 손만 잡으면 임신일 줄 알아요."
"진짜 스무살까지 그렇게 알았어요. 성교육이 없어서 그래요. 전혀 없어요."
성에 관한 무언가를 처음 접한 것은 탈북 이후 한국의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였다. 탈북 여성 B는 하나원에서 처음 성교육을 받았지만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좀 부끄러웠다"고 했다.
"자세히 듣고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욕할 것 같아서 일부러 자는 척했어요."
박경숙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 '북한 사회의 국가, 가부장제, 여성의 관계에 대한 시론'을 통해 "북한의 공식 담론에서 성은 부끄럽고 숨겨야 할 대상이자, 오직 결혼과 출산이라는 국가적 필요 안에서만 허용되는 기능적 행위"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이들의 과거 북한에서의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남편이 술 마시고 들어오면 해야 했어요." "생리할 때도 상관없어요. 남자가 원하면 그냥 해야 돼요." "애무, 배려 같은 거 전혀 없어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넘겼어요. 거기는 다 그랬어요. 이혼은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요."
탈북 여성 B는 특히 "여자가 먼저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고 전했다.
창고와 산자락, 그리고 보자기
이들이 공통으로 기억하는 장소가 있었다. 마을마다 있다는 좁은 창고, 그리고 인적이 드문 산기슭이다.
탈북 여성 A는 "옆에 어디 마을에 가면 간판도 없는 여관이 있었는데 거기 가면 소문이 짠하게 났다"며, 그래서 "주로 산이나 저 흙간, 창고 같은 데를 이용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열악한 환경 탓에 여성들은 매번 보자기 같은 준비물을 챙겨야 했다.
"흙바닥에 깔아놓고 하지, 아니면 그냥 서서. 남자는 아무것도 안 해요. 여자가 다 준비해서 가는 거예요."
한국에 와서 처음 모텔이라는 공간을 접했을 때의 충격도 여러 차례 언급됐다.
"처음에 한 5년은 모텔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어요. 가보니까 엄청 좋더라고. 너무 깨끗하고 신기했죠. 아, 이런 데가 다 있구나."
성관계 시간과 방식에 대한 경험도 털어놨다.
"5분도 안 걸려요. 키스 몇 번 하다가 남자가 훅 올라와서 그걸로 끝이에요. 좋고 싫고 뭐 없어요, 너무 짧으니까." "남자는 여자가 뭘 원하는지 생각도 안해요." "체위요? 그냥 남자가 위, 여자가 밑. 그거밖에 몰라요." "지금 생각해보면 오르가슴이라는 거, 뭔지도 몰랐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보낸 젊은 시절이 너무 한탄스럽죠."
이와 관련해 최설 북한대학원대학교 심연북한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이렇듯 위계질서 속 꽉 막힌 북한의 성 생활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훨씬 더 큰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언제든 남편에게 몸을 주는 것을 마치 공민의 의무처럼 생각하고, 성관계를 할 때 '여자는 항상 왜 밑에 깔리는가' 라는 점을 문제로 여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만 이러한 문제 의식이 아무 때나 자라는 것은 아니라면서 "기본적인 생존권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이 같은 2차적 사회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고리, 침묵, 그리고 생존
BBC가 만난 여성들은 북한에서 피임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라고 말했다. 가장 흔했던 방법은 자궁 내 삽입 기구, 이른바 '고리'였다.
"동으로 만든 고리, 형편이 되는 사람은 은 고리를 병원에서 넣었어요. 중국에서 넘어온 것을 장마당에서 사다가 병원에 가서 넣어달라고 했어요."
재질과 관계없이 부작용은 흔했다고 한다.
"출혈하는 사람도 있고 허리가 몇 달씩 아픈 사람도 있었어요. 하혈을 막 하는 거예요."
남성용 피임, 즉 콘돔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최설 연구원은 "콘돔이 201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남성이 피임하는 경우는 잘 몰라요. 무조건 여자가 했어요."(60대 탈북 여성 A)
"장마당에 숨겨놓고 콘돔을 팔긴 했는데, 비쌌어요. 콘돔 하나에 4명 밥값인데 남자들이 쓰겠어요? 안 쓰지." (20대 탈북 여성 B)
2000년대까지만 해도 콘돔이라는 존재 자체가 낯설었고 이후 누가 어떤 경로로 들여왔는지조차 불분명한 채로 장마당을 통해 은밀히 퍼져 나갔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더 나아가 피임을 원하는 배경에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다.
"자꾸 애가 생기면 어떻게 키우겠어요. 그러니까 여자가 (마음이) 더 바빠져서 고리를 넣는 거죠. 애가 생겨도 남자는 도망가면 끝이에요."
"그래도 낙태해요. 개인이 다 해요. 집에서 해요. 제가 같이 가줬어요. 군인 놈의 새끼가 진짜. 이놈 새끼 오면 죽여버린다 했는데…"
최설 연구원은 이러한 개인의 피임 실태 이면에는 국가가 직접 개입한 '산아 제한 정책'의 역사가 있다고 부연했다. 1970년대 인구가 급증하고 식량 수급 불균형이 나타나자 북한은 '다산 장려'에서 '다산 억제'로 정책을 전환했다. 당시 평양산원에 "하나가 딱 좋습니다. 둘은 많습니다. 셋은 양심 없습니다"라는 김일성의 발언이 내걸릴 정도였다고.
한편 신한대학교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의 권금상 박사는 이 같은 북한 내 피임의 풍경이 과거 극한의 시기에는 더 참혹한 형태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중반 시작된 '고난의 행군' 시기, 여성들이 밀수를 위해 강 건너 며칠씩 집을 비우는 동안 어린 딸들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것. 당시 북한 경제가 무너지면서 대다수 남성들은 종일 집에 머물렀다고.
"제가 인터뷰한 대상 중에 엄마가 어린 딸에게 피임하는 법을 가르쳐준 사례가 꽤 있었어요. 그러다가 피임도 안 되니까 아이에게 고리를 넣은 경우도 있었다는 거예요. 끔찍하죠."
이는 국가가 해야 할 '성 인지 교육'의 자리를 '생존'을 위해 어머니에서 딸로 대물림되는 '은폐된 지식'이 대신 채워야 했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대화조차 일반적인 가족 내에서는 금기시됐다고 한다.
"엄마도 그런 거 몰라요.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하는 거예요. 부모하고는 이야기 못 하죠, 남사스러워서."
부부간 폭력, 그리고 이혼
탈북 여성들의 증언에서 성(性)은 종종 폭력과 분리되지 않았다.
"맞아도 말 못 해요. 난 이 가정의 아내이고 애들 엄마니까, 그냥 남편을 잘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의 외도조차 여성이 감내해야 할 몫으로 여겨졌다. 이는 이혼이 사회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 때는 이혼을 잘 안 해줬어요. 한 도시에서 이혼하는 사람이 10명 나올까 말까 했어요."
설령 이혼하더라도 비난은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었다.
"이혼하면 주변에서 다들 '여자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손가락질했으니까요. 저 여자가 이상해서, 오죽하면 이혼했겠냐, 이런 식으로요."
권금상 박사는 이를 가부장 질서가 여성에게 가하는 일종의 심리적 통제, 즉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석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북한 여성은 그 남성들의 울타리 안에 있으려는 경향이 크다고 했다. 폭력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6·25 전쟁과 고난의 행군 등을 거치며 남성 인구가 급감한 사회에서 여성 혼자 살아가는 일이 곧 생존의 위협으로 여겨졌던 역사가 있다"고 권 박사는 설명했다.
"이 부분은 욕망의 문제라기보다 생존 의식이라고 봅니다. 정말 욕망이 문제라면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으려 했겠죠. 하지만 대부분 그러지 않았어요. 딱 자기 옆에 있을 한 사람을 원하는 거예요."
한편 최설 연구원은 최근 이혼을 둘러싼 북한 당국의 단속이 훨씬 더 강화됐다고 소개했다. 지난 2024년부터 1) 사실혼 관계에 있거나 2) 혼인신고 없이 동거하거나 3) 이혼을 먼저 신청한 사람 등을 3개월간 노동단련대로 보낸다는 것.
그럼에도 이혼이 근절되지 않자 2025년 7월부터는 부부 양쪽이 이혼 도장을 찍는 순간 두 사람 모두를 노동단련대로 보내 3개월을 채우도록 했다고 한다. 최 연구원은 "이는 결국 이혼을 막겠다는 메시지"라며 "국가가 이혼을 '사회주의 대가정'의 균열로 여겨 여전히 통제하려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 북한은 여자라면 응당 수령과 가부장을 신으로 모시며 일생 순종해야 하는 사회
- 가부장제 뿌리가 깊은 사회에서 남편이 아내를, 남자가 여자를 폭행하는 모습은 나의 집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을 내세울 줄 알아야지, 그랬다면 아버지도 당원이 되어서 간부로 출세했을 것인데 아내를 잘못 만나 저렇게 사는 게 아니에요" 나 또한 틈만 생기면 어머니께 말 폭탄을 던졌다. 교육으로 세뇌된 여성관이었다.
-설송아 작가의 '여자는 죽지 않았다' 중에서 (작가는 평안남도 순천 출신이다)
통치 기술로서의 성
결국 이 모든 것을 개개인의 심리나 가정 내 역학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폭력을 견디고 이혼을 포기하며 몸을 남편에게 내어주는 선택의 밑바닥에는 훨씬 더 크고 오래된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왜 국가는 여성의 몸에 이토록 깊이 관여했을까?
권금상 박사는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남성의 몸이 효용적이기 때문에 남성이 원하는 대로 여성이 응해주는 것도 '혁명'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라가 북한"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이것이 국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노선이라기보다는 위로부터 묵인된 가부장적 문화가 당연시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통치의 논리를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성은 권력 통치의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짚었다. 실제 여성의 성은 북한의 국가 건설기 당시부터 철저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목표에만 결부돼 다뤄졌다는 것이다.
권 박사는 이어 1946년부터 발행된 북한 여성 잡지 '조선려성'을 언급하며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여성 성에 대한 것은 전부 임신과 관련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여성 욕망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는 것인데, "여성이 욕망을 욕망할 수 없게 만든 것"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아울러 생리를 '위생'이라 표현하면서 '지저분한 것'으로 여겨온 낙인의 역사를 꼬집기도 했다. 그는 다만 "여성의 성적 자율성 문제는 사실 북한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역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뒤늦게 이야기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조정아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논문 '북한 여성의 일상생활과 젠더정치'를 통해 "결국 이들에게 사랑이란 평등한 파트너와의 정서적, 신체적 교감이라기보다 국가와 가족을 위해 부여된 역할을 하는 것에 가까웠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들의 대중가요 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1991년 발표된 '여성은 꽃이라네'는 여성을 '생활의 꽃'이자 남편과 가정을 알뜰히 돌보는 존재로만 묘사하고 있다.
이후 장마당이 성행하고 여성들의 경제적 위상이 달라지면서 이러한 시각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2010년 발표된 가요 '우리 집사람'에서는 여성을 남편과 대등한 반려자인 '우리 집사람'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여성을 규정하는 국가 및 사회의 방식 자체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성형으로 찾게 된 자신감
전문가들은 북한 여성의 섹슈얼리티(성생활)가 하나의 통일된 경험이 아니라, 신분과 정착 이후의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같은 탈북 여성이라도 중국 접경 지역에 남은 이들과 한국 사회에 정착한 이들 간에 삶과 섹슈얼리티가 꽤나 다른 궤적을 그렸다는 것이다.
권금상 박사는 이러한 편차를 탈북 여성들의 출신 지역과도 연결 지어 설명했다.
"여기에 온 탈북민들의 지역 구성을 보면 북쪽인 함경도, 량강도 출신이 약 80%를 차지해요. 외진 곳이라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렵고 노동 중심의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 한국에 왔더니 집도 제공받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기니까 그 격차만큼 욕망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한국 정착 이후 나타난 변화 가운데 권 박사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이들의 성형수술과 옷차림이었다. 그 변화는 단순한 외모 관리가 아니라, 난생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한국에 온 탈북 여성들은 자신에 대한 욕망을 자기 몸으로, 성형을 통해 표출해요. 엄청나게 많이 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욕망들이 생애 처음 받아보는 정착금과 본인 명의의 집이라는 '풍요로운' 조건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라고 해석한다.
전주람 박사는 특히 "성형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이 제도적으로 잘 갖춰져 있고 주변 여성들이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탈북 여성들도 자연스레 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구가 발현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불어 "이러한 환경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이미지를 추구하는지에 대해 인식하고 탐색해 가는 과정이 시작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 만난 '자유'와 '내 몸'
한국에 온 탈북 여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자기 돌봄' 그리고 '연애 문화'였다.
"스킨, 로션에 무슨 앰플, 크림까지 몇 개씩 바르는 거예요. 북한에서는 그냥 물세수하고 '뺑끼칠' 하듯 하나만 하거든요. 각자 사이즈에 맞는 속옷을 골라 입는 것도 신기했어요."
"거긴 컵 없고 꽉 조여 매요. 옛날식 면이에요. 와이어 없이 꽉 조여 매요. 납작하게 만들어야 돼요. 볼륨 있으면 애 엄마 같다고 안 좋게 봐요."
"속옷은 무조건 흰색 아니면 연한 하늘색 입어요. 비치지 않는."
실제 북한에서는 '몸에 맞는 속옷' 개념 자체가 없다고 했다. 더 나아가 달라붙는 속옷은 당국에 의해 '황색 바람'으로 규정되어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고.
"한국에 와서 처음 혼자 카페에서 내가 원하는 커피를 골라서 마셨어요. 그리고 교보문고에 가서 맘껏 책을 보는데 '정말 자유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북한에서는 그럴 일이 없거든요."
탈북 여성들의 이러한 증언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이들이 '내 삶은 내가 정한다'는 감각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연애에서는 더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탈북 여성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 남자와 연애 한번 해보면 북한 남자와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요."
60대 A는 더 진솔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북한 남자와는 '봉사'를 하는 기분이었어요. 모든 걸 내가 다 해주는데 배려받는 건 하나도 없고. 한국 남자를 만나보니 그 차이가 너무 크더라고요. 말투부터 부드러워요. 관계할 때도 계속 '괜찮아?', '어땠어?' 하면서 제 감정을 살피는데 처음으로 사랑받는다 그런 걸 느꼈어요."
"북한 남자들은 여자가 당연히 모든 걸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지루하고 싫은 거예요. 나도 이제는 좀 대접 받고 사랑 받으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20대 B는 한국 남성과의 잠자리를 '섹스 매너'라는 말로 압축했다. 한국 남자들은 관계가 끝나고 "괜찮았어?"라고 물으며 기분과 몸 상태를 챙겼다고 했다.
40대 C는 "한국에 와서 북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 남자가 옛 사고방식 그대로라서 또 힘들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전주람 박사는 "성 심리학에 흥분기-고조기(전희)-절정기-해소기 등 4단계가 있다"며 "한국 남성과의 연애를 경험한 탈북 여성 대다수가 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들과의 연애 자체에 만족해하는 경향이 큰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여성들의 이러한 변화가 실제 한국에 함께 온 탈북 부부들의 이혼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설 연구원은 "탈북민 가족 중 상당수 부부가 이혼을 한다"며 "북한 여성들이 여기 와서 살면서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북한 남성들이 빨리 변해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나, 안 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문화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각각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성 역할 위계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북한이 가부장을 권력의 도구로 활용했다면, 한국은 양성 평등을 여성들의 목소리로 밑에서부터 만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탈북 여성들이 한국행 이후 국가정보원 조사 과정에서 만난 남성들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멋있어서 다들 짝사랑하고 난리였어요. 저도 처음 왔을 때 진짜 그랬다니까요. 양복 딱 입었는데 정말 멋있고 친절해서 바라만 봐도 좋았어요."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거짓이 아니구나. 한국 남자들 이렇게 멋있고 자상하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물론 사회에 나와보니 다 그렇진 않더라고요. (웃음)"
이 짧은 일화는 탈북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며 겪는 '존중', '배려'라는 감각이 얼마나 낯설고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는지를 보여준다.
탈북 여성 A는 "한국 남성과 연애를 찐하게 했다. 지금은 헤어졌지만, 나를 사랑해주고 배려해주던 자상한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다음 연애도 꼭 한국 남성과 하고 싶다. 언젠가 결혼도 하고 싶다"고 전했다.
몸을 되찾는 긴 여정
취재가 마무리될 즈음, 탈북 여성들에게 '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B는 "사람들의 관계"라고 답했다. 이어 "성에 눈을 뜨면서 원하는 것이 계속 늘어나는 느낌"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뭘 원하는지도 몰랐는데, 이제는 배려 있고 다양하게 해주는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 같아요."
A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한 송이의 꽃이라고 생각해요. 성관계를 하고 나면 대체로 즐겁고 행복하니까, 그런 꽃 같은 느낌인 것 같아요. 한국 와서 알았어요. 여자로서 행복한 기분을요."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을 처음 받은 순간 많은 탈북 여성들은 뒤늦게 자신의 몸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몸을 빼앗겼지만 한국에 온 뒤 '자유'와 '자기결정권'을 통해 비로소 그것을 되찾았다고 했다. 그것이 이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혁명이 아닐까.
탈북 여성 A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어요. 처음부터 마음껏 당당하게 연애하고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쓰면서 살고 싶어요. 그게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이젠 알아요."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랜 시간 빼앗겼던 몸과 욕망, 사랑을 되찾는 여정. 그리고 그 길의 한가운데서 그들은 비로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야 내 몸이, 진짜 내 것이 됐어요. 정말로 행복해요."
*일러스트: 안드로 사이니 (BBC 동아시아 비주얼 저널리즘 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