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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어 대신 '이것' 끼고 칼군무 하는 아이돌...케이팝 풍경 바꿀 수 있을까

2024.06.03
빅오션 멤버들의 무대에 팬들은 소리로 환호성을 지르기 보단, 휴대폰의 빛으로 이들을 응원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지난 달 20일 한 케이팝 그룹의 음악방송 데뷔 무대. 팬들의 함성과 응원으로 가득해야 할 무대지만, 화려한 조명 속 완벽한 칼군무 앞에서도 객석은 조용했다.

하지만 이런 역대급 '조용한' 팬들 반응에 무대 주인공들은 오히려 감동하고 놀랐다고 했다. 데뷔 한 달여를 맞은 신인 아이돌, '빅 오션'의 이야기다.

현진, 지석, 찬연으로 구성된 빅오션 멤버들 모두 청각장애가 있다. 멤버들은 인공와우(인공 달팽이관)와 보청기로 소리를 듣고, 말하는 사람의 입술 모양을 읽는 독순법으로 대화한다.

이런 이들을 배려해 팬들은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던 것. 혹시나 무대에 선 빅오션 멤버들이 팬들 응원 소리에 덮여 반주를 놓칠지 우려해서다. 빅오션은 보청기 때문에 멜로디와 박자를 점검할 수 있는 인이어를 끼지 않은 채 무대를 한다.

"무대 도중에 원래 보통 호응을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관중들이 조용하셨어요. 저희가 소리를 듣고 박자를 맞추는 게 되게 어렵다 보니 폰을 들고 박자를 맞춰주시는 거였어요" (현진)

빅오션의 시작은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애인 배우·모델을 위한 기획사 파라스타엔터테이먼트는 케이팝 아이돌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로 한다. '언어의 장벽, 신체의 한계, 그 무엇도 방해되지 않는 음악'을 케이팝을 통해서 선보이는 것이 목표였다.

청각장애 인식개선을 돕는 유튜버 활동을 하던 현진을 시작으로, 장애인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 지석과 대학병원 청능사로 일하던 찬연이 오디션과 캐스팅 등을 통해 합류했다.

고되기로 유명한 아이돌 훈련 과정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이들에겐 몇 배나 고된 과정이었다. 원래 7명으로 시작했지만 총 1년 반의 연습생 기간이 끝나고 남은 건 세 사람이었다.

'진동'과 '빛'으로 완성한 칼군무

빅오션 멤버들은 여러 보조장치를 통해 트레이닝을 받았다. 진동으로 박자를 맞추는 팔찌는 그 중 하나다.
BBC
빅오션 멤버들은 여러 보조장치를 통해 트레이닝을 받았다. 진동으로 박자를 맞추는 팔찌는 그 중 하나다.

'칼군무와 노래와 랩'을 익히는 과정은 깊은 바닷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따라가는 것과 비슷했다. 춤을 출 때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다 보니 동선을 맞추는 데 애를 먹었다.

찬연은 "박자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듣는 정도가 다 다르다"라며 "나는 여기에서 반응하는데 어떤 친구는 여기에서 반응하고 또 어떤 친구는 여기에서 반응하고 하다 보니까 이 간극을 줄이는 게 힘이 들었다"라고 했다.

랩을 담당하는 지석은 "진동과 소리를 내는 메트로놈의 진동을 몸으로 완전히 외워 비트를 맞췄다"고 한다. 청각장애인은 무조건 말을 못 하거나 어눌하다는 편견을 받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빛으로 표시하는 메트로놈과 진동으로 박자를 알려주는 스마트워치 등을 활용해 그들만의 '칼군무'를 만들어 나갔다. 정확한 음정을 내기 어려운 부분은 멤버들의 목소리 데이터를 학습한 AI(인공지능) 기술의 도움을 빌렸지만, 세 명 모두 직접 노래를 한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빅오션의 데뷔곡 '빛'(H.O.T의 곡 리메이크)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이 곡엔 기존에 없던 언어도 들어갔다. 음성으로 된 노래에 수어를 중간중간 넣어 안무를 완성한 것. 빅오션만의 음악 장르인 셈이다.

정확한 음정을 내기 어려운 부분은 멤버들의 목소리 데이터를 학습한 AI(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했다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정확한 음정을 내기 어려운 부분은 멤버들의 목소리 데이터를 학습한 AI(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했다

데뷔까지는 편견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청각장애인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 ‘라이브는 가능한 거냐?’, ‘팬미팅 가려면 수어 해야 하느냐?', '감성팔이 아니냐'는 등 반응은 다양했다.

현진은 "소리가 안 들리는데 어떤 수로 아이돌을 하겠다는 건지 그러니까 좀 놀림감의 대상은 되지 않을지 그런 걱정이 많이 앞섰다"고 했다.

하지만 우려는 기우였다. 이들의 유튜브 채널은 데뷔 한 달도 되지 않아 10만 명을 넘어섰고 올린 쇼츠 영상 중에는 조회수 100만을 넘긴 것도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이 “장애의 낙인과 장벽을 깬 것에 경의를 표하고 데뷔를 축하한다”고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 글을 올릴 정도로 화제였다.

팬들은 빅오션을 통해 막연한 희망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희망을 봤다고 입을 모았다.

호주에서 온 팬 제이드는 "제가 청력을 잃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많이 좌절했지만, 빅오션의 데뷔 소식을 들으며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처음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 수어가 들어간 것을 보고 정말 기뻤어요. 수어는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이기에 아름답게 표현된 것을 보니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이들을 직접 응원하고 싶어 공개방송을 직접 찾았던 조영국 씨는 "청각장애인인데 실수 없이 완벽한 무대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며 "빅오션이라는 그룹명처럼 바다의 물결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 좋겠다"라고 했다.

'완벽주의' 케이팝 시장...판도 바뀔까?

빅오션은 노래에 한국 수어, 미국 수어, 국제 수화 등을 계속 섞는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BBC
빅오션은 노래에 한국 수어, 미국 수어, 국제 수화 등을 계속 섞는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들이 케이팝 시장에 자리매김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의 케이팝 시장은 외모와 춤 외에도 뛰어난 가창력과 라이브 실력 등 요즘 아이돌들은 두루두루 최고의 역량을 갖춘 '올라운더(All-rounder. 다재다능한 인재)'를 요구한다.

일 년에도 수백 개의 아이돌 그룹이 데뷔하지만, 살아남는 팀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장애를 지닌, 그것도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돌이 넘어야 할 산은 현실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케이팝 전문가들은 다양성 측면에서 이들의 등장을 반기면서도 뚜렷한 생존전략이 필요하다고 봤다.

박희아 대중문화평론가는 BBC 코리아에 "장애인 아티스트들이 등장해 케이팝 시장에 다양성을 부여하며 특별한 균열을 내고 있다는 것은 사회에 시사할 만한 일"라고 평했다.

그는 "사실 현실적으로 라이브 무대는 어렵고, 그래서 가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다"면서도 "현장에서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통해 해당 팀만의 컬러를 뚜렷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대중문화연구가인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양학부 교수 역시 "기존 케이팝의 딱딱하고 차가운 혹은 기계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평했다.

이 교수는 "그저 '청각장애인 그룹이 나왔어요'라는 일회성(관심)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음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케이팝에서 퍼포먼스도 그렇고 외모도 얘기하지만, 결국 노래가 안 좋으면 성공을 못 합니다. 어떤 음악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이 그룹이 케이팝의 다른 부분을 더해줄 수 있는 그룹이 될지 아닐지가 결정될 겁니다."

'다른 차원의 음악 전할게요'

빅오션 멤버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큰 위로로 다가가길 바라고 있다. 현진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한 음악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 없는 뭔가 다른 차원의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소리가 약하게 들리다 보니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알게 된 소리들도 있었었죠. 저만의 '세상의 소리관'이 있어요. 이 세상에 없는,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좀 많은 분들께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곡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을 기획하고 세상에 내놓은 차해리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들의 현실적 한계를 묻는 질문에 "(빅오션은) 비장애인들이나 보통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역경을 견디고 단단해져서 나왔다"고 답변했다.

"이런 친구들이 부르는 위로가 조금 더 단단하고 진정성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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