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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아시아 순방: 거래와 양보, 의미심장한 마지막 회담

1일 전
도널드 트럼프와 시진핑
Getty Images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의 주요 장면은 마지막 순간에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나왔다

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해외 순방은 미국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는 기회였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동아시아 5일 순방은 트럼프 개인의 영향력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 한계도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순방에서 말레이시아와 일본, 한국을 차례로 방문했다. 초반 나흘 동안은 종종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을 달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가 펜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의 경제가 흔들릴 수 있는 관세 조치가 부과될 수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요일에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만남이었다.

양국 정상은 세계 무대에서 대등한 입장으로 마주했다. 회담에는 경제적 이익과 국제적 위신, 국민의 복지 등 막대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도 '펜'을 휘두를 수 있지만, 그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글로벌 외교 행보 중 처음 사흘은 순조로웠다.

그가 방문한 곳마다 '상호주의적 관세 조치'라는 그림자 아래에서 전통적인 무역 협상과 아첨에 가까운 양보가 뒤섞여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말레이시아에서 핵심 광물 확보에 성공했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 협정 체결에서도 진전을 이뤘다. 또 태국과 캄보디아 간 긴장 완화를 위한 조약 체결을 주재했는데 이는 미국 대통령들이 즐겨 내세우는 이른바 '평화 협정'의 한 형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서 선물과 함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Reuters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서 선물과 함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용 헬기 '마린 원'이 도쿄타워를 지나갔다. 당시 도쿄타워는 미국 국기의 색인 빨강·흰색·파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꼭대기는 트럼프타워를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빛났다.

타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미국에 550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발표하고 미국 건국 250주년을 기념해 벚나무 250그루를 선물로 제안했다. 또한 암살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사용하던 골프클럽과 가방을 전달했다. 아베 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시절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이다.

타카이치 총리는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지하기도 했다.

한국 역시 이에 뒤지지 않으려 했다. 21발의 예포와 군악대의 '대통령 예우곡(Hail to the Chief)', 그리고 트럼프 집회 찬가로 알려진 빌리지 피플의 'YMCA' 연주로 트럼프 대통령을 맞이했다.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위한 '훈장 수여식'을 열고 대한민국 최고훈장과 신라 왕조의 금관 복제품을 전달했다. 오찬에서는 금박을 입힌 브라우니로 구성된 '피스메이커 디저트'를 내놨다. 또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6개국 정상과의 만찬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이 운영하는 와이너리의 와인을 대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의 기업인들과의 회담 중 제공된 저녁 식사 메뉴
Getty Images

한편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 남용을 비판하는 "왕은 없다(No Kings)" 시위가 열렸다. 하지만 동아시아 순방 기간 동안 그는 마치 왕족처럼 대접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의 왕들처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조공을 요구했다. 한국이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에 따라 일정 기간 매년 200억 달러를 미국에 현금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합의는 한국산 대미 수출품에 대한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마지막 날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이었다.

이 회담에서 세계 두 경제대국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권력의 역학은 트럼프 대통령이 앞서 다른 정상들과 나눈 만남과는 전혀 달랐다.

이날은 화려한 의전도, 군악대도, 성대한 만찬도 없었다. 대신 두 정상과 최측근 보좌관들이 부산 공항 활주로 옆 군용 건물 안에서 흰색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악수할 때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지은 것은 높은 이해관계가 걸린 회담의 중요성을 반영한 듯했다. 그는 전날 "좋은 회담이 될 것 같다"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지만, 막상 회담에서는 여유로운 기색이 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그들과 계속 대화를 이어왔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회담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개월간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산 미국 수출품에 대한 관세 인상을 위협해왔다. 이는 미국 재무부의 세수를 늘리는 동시에 중국이 시장을 개방하고 마약 펜타닐 제조에 쓰이는 화학물질의 수출을 통제하도록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중국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양보 대신 강경한 맞대응을 택했다.

관세로 중국 경제가 타격을 입었지만, 중국은 미국의 취약점을 정조준했다. 미국산 농산물 구매를 중단하고 세계 첨단 제조업이 의존하는 핵심 광물의 수출을 통제한 것이다.

시 주석과의 회담을 마친 뒤 트럼프 대통령의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회담이 "놀라웠다"며 "10점 만점에 12점"이라고 평가했다. 대통령 전용기가 난기류에 흔들리며 하늘로 오를 때도 그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의지의 대결'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양국이 겪은 경제적 고통은 목요일 회담과 긴장 완화 합의로 이어졌다.

미국은 대중국 관세를 인하했고 중국은 핵심 광물 통제를 완화하며 미국 농산물 수입 재개와 미국산 석유·가스 구매 확대를 약속했다.

완전히 획기적인 변화는 아니었지만 양국 모두 현 상황이 지속될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지난 목요일 중국 국가주석과 가진 회담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Reuters
미국 대통령은 지난 목요일 중국 국가주석과 가진 회담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앞으로 어떤 국제 질서가 지금의 미·중 대립을 대신할지는 불분명하다. 시진핑 주석은 양자회담에서 "중국과 미국이 항상 의견일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라며 "세계를 이끄는 두 경제대국 사이에 때로 마찰이 발생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수개월간의 긴장 이후 약간의 진전으로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마찰'이 계속될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중국은 전 세계적·지역적 차원에서 영향력 확대의 야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외에서 미국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려 시도하며 경제력을 무기로 동맹국과 적대국 모두에 압력을 가해왔다. 그 결과 오랜 기간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지원에 의존해온 일본과 한국 같은 동맹국들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크고 작은 형태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하는 과도한 양보로 이어진다. 선물이나 만찬 초대 같은 예우는 쉬운 일이지만 수십억 달러의 투자, 국방비 증액, 영구적 관세 인상 등은 국가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런 상황은 미국과의 관계 재평가를 촉발할 수 있고 나아가 중국과의 관계 재조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서 왕처럼 환대받았지만 그가 떠난 직후 시진핑 주석이 도착했다는 사실은 상징적으로 남았다. 한국은 중국 지도자에게도 미국과 대등한 외교적 예우를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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