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침체기 같아'...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가 바라본 대통령 선거

"어떻게 여성 후보가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어요. 지금은 침체기 같아."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이자 최초의 여성 외교관 홍숙자(92) 씨의 말이다.
홍씨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후보로 출마했다. 외교관 시절 겪었던 차별적 대우를 계기로 외교부를 나와 여성 운동에 매진했고, 그러다 대권에도 도전했다.
'정치기적은 여성 대통령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최초의 여성 후보가 등장한 지 어느덧 38년이 지났지만 올해 대선은 여성 후보가 한 명도 없이 치러지게 됐다.
홍씨는 자신이 활동하던 때에 비해 "오히려 지금이 침체기 같다"고 말한다.
"자기 힘으로 (여성) 대통령이 또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됐을까? 박근혜 씨는 아버지의 후광을 좀 보긴 했고, 이후에 자기 힘으로 여성 대통령이 또 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네."
'외교관도 이런데 다른 여자들은 어떨까?'
"위인전을 보다가 외교관이 되어야겠다 했지. 자기 나라 엘리트들만 모여 있는 직장이 얼마나 멋있어요."
홍씨는 초등학생 때 이미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던 그는 초등학교 6년 내내 개근을 하고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내가 좀 별난 애야. 맨날 100점을 맞아야 돼. 하나만 틀려도 나는 울었어, 분해서."
홍씨는 외교관이 되기 위해 6.25 전쟁 당시 부산 피난 중에도 "도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다니며 공부에 매진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친 후 미국 유학을 다녀온 홍씨는 1958년 외무부 장관 보좌관에 발탁되며 꿈에 그리던 외교관이 됐다.
유일한 여성 외교관이던 그는 그러나 임용 후 온갖 차별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외교관이라고 다들 잘났다고 뽐내는데 웬 여자가 배가 불러가지고 왔으니 얼마나 싫어했겠어, 그 사람들이." 홍씨는 임명 당시 자녀를 임신한 상태였다.
"기자들은 내가 타자 쳐주는 타자수인 줄 알아. '이거 타이핑 하나 해주세요' 그래. 어떤 사람은 내가 전화 받으면 '과장 바꿔' 이러고. 말도 못해."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의 총영사관을 거쳐 주유엔 한국대표부로 갔을 때, 홍씨가 느낀 차별적 대우는 극에 달했다.
"(상관이) 나한테 일을 안 줘. 그리고 어디 창고 같은 데 나를 앉혀놓더라고. 웬 여자애를 발령을 내버리니까 화가 났나 봐."
당시 정신적인 고통이 심했다는 홍씨는 "신경 안정제를 다량씩 먹으면서 겨우 버텼다"고 전했다.
홍씨는 4년간의 미국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1969년, 사표를 냈다.
"고위직인 나도 이런데 도대체 다른 여자들은 어떨까 싶더라고. 내가 겪은 10년 동안의 이 남녀 차별 경험을 무가치하게 보낼 수 없어서 여성 운동을 하기로 했지."
여성운동으로 세계를 누비다
"그때가 미국에서 여성운동을 엄청 할 때야."
홍씨는 당시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간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뉴욕에서 외교관 신분을 숨기고 여성운동 세미나 등에 참석했다.
홍씨는 이 시기를 "의식화 시기"로 기억했다. 자서전에서 홍씨는 "이 차별 대우와 모욕, 수모, 고통은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었다"는 점을 깨달았으며, "내게 잘못이 있다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여성 단체였던 여성단체협의회에 가입하며 홍씨는 본격적인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내가 간다고 하니까 얼마나 다들 좋아하던지. 그땐 회원들이 다들 영어를 몰라서 쩔쩔 매는데, 내가 영어 잘하지, 국제회의도 내 돈 다 내서 다니지, 얼마나 좋아."
홍씨가 활발히 활동하던 1970년대 서구를 중심으로 한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UN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당해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했다. 이듬해인 1976년부터 10년은 '여성을 위한 10개년'으로 선포했다.
이 시기 여성단체협의회의 중책으로 "10년간 50개 넘는 나라를 다녔다"는 홍씨는 "외국에서 온 수상, 총리 이런 사람들도 다 만나고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1986년 홍씨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여성단체협의회(ICW)의 회장이 됐다.
최초의 여성 대선후보
ICW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던 홍씨는 1987년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군소 정당이던 민주사회당의 대선후보로 출마해달라는 제의였다.
홍씨는 그 이전에도 몇 차례 국회의원 출마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대부분 남자 정치인들이 전국구(비례대표) 하나씩 주는 시혜 같은 거여서 싫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마음이 그렇게 내키더라. 여성도 후보가 될 수 있다, 여자도 청와대를 지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싶은 거 있지. 당선이 목표는 아닌 거야."
국제회의 차 방문한 프랑스 파리에서 고심하던 홍씨는 '정치 기적은 여성 대통령으로'라는 슬로건까지 정해 귀국했다.
"후보 등록하기 전에 박순천 여사를 찾아갔더니 이 험한 길을 왜 가려고 하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이게 내 소신이라 설명했지."
고 박순천 전 의원은 한국 여성 정치계의 선구자 같은 존재로, 민주당계 정당에서 5선 의원을 지내고 여성 최초로 당대표(민정당)를 역임한 인물이다.
박씨의 말대로 대선은 험난했다. 당시 후원을 약속했던 사업가가 잠적했고 선거운동 역시 제대로 되지 않았다. 홍씨는 후보 등록비를 포함해 모든 경비를 자비와 친인척들에게 빌린 돈으로 해결했다.
"리어카 끌고다니다가 그거 세워놓고 그 위에서 유세하고 그랬어."
군소정당의 여성 후보에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급기야 홍씨는 '집을 폭파하겠다, 납치하겠다'는 협박 전화까지 받았다. 호텔방에서 숨어지내던 홍씨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선거를 완주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선거를 11일 앞둔 12월 5일, 홍씨는 김영삼 당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빚더미에 앉았지, 연희동 집도 은행에 잡혀서 다 날려버렸지, 욕 먹을 거 다 먹었지, 그래도 후회가 안 돼."
홍씨는 이 말을 전하며 웃었다.
'이기고 싶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
홍씨는 90세가 넘은 현재에도 건강을 유지하며 독서와 종교활동 등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어떤 마음으로 쉽지 않은 도전을 이어왔냐는 질문에 홍씨는 "그런 건 없다"고 답했다. "내가 좀 별난 애잖아. 나는 계집애라고 생각 안 하고 그냥 이기고 싶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
"내가 파이어니어(선구자)로 너무 만족감을 느꼈어. 내가 다 처음이잖아. 그래서 맨날 신문을 도배를 하고, 후배들도 다 영향 받고 용기를 얻잖아. 그러다 박근혜도, 심상정도 나왔잖아."
홍씨 이후 제14대 대선에선 김옥선 전 국회의원이 출마해 여성 최초로 완주했고, 18대 대선에선 전체 7명의 후보 중 여성 후보가 4명 출마해 박근혜 후보가 여성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로도 여성 후보들의 출마는 꾸준했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선 2007년 이후 처음으로 선거벽보에 여성의 얼굴이 사라졌다. 이 상황에 대해 홍씨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근혜 씨는 아버지의 후광을 좀 보긴 했고, 이후에 자기 힘으로 여성 대통령이 또 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네."
홍씨는 여전히 유력 정당들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현실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침체기인 것 같아. 우리 때만 해도 '세계 여성의 해'다, '여성을 위한 10개년'이다 해서 막 세계적으로 올라가는 분위기가 있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별로 결핍을 못 느끼는 것 같아."
1987년 홍씨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당시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 276명 중 8명이었지만, 현 22대 국회에선 전체 300명 중 20%인 60명이 여성 의원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2024년 12월 기준 세계 평균은 27%, 아시아 평균은 22%다.
여성 정치 후배들을 위한 메시지를 묻는 질문에 홍씨는 말을 아끼면서도 응원을 전했다.
"나는 이미 지나간 세대 아니야. 지금 발랄하게 있는 애들이 잘할 거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