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번에 처음 투표하게 됐어요'…감회 새롭다는 로켓 배송기사
"이번에 저 투표를 처음 하게 됐어요. 사전투표도 당연히 못했죠."
서울에서 로켓배송 택배 기사로 7년을 일해오면서, 단 한 번도 투표하지 못했다는 서순원(49) 씨의 말이다.
서 씨는 3일 제21대 대선 본투표 장에서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 기쁘다며 이같이 밝혔다.
"제가 오늘 신선식품 배송이 많아서요. 정말 서둘러야 합니다."
그는 BBC 코리아와 인터뷰 중에도 그는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한국의 '빠른 배송'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밤 12시까지만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 물건이 집 앞에 도착하는 나라. 연휴는 물론, 장마나 폭설 속에서도 배송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쿠팡은 연휴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고, 공식 공휴일인 투표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빠른 시스템 뒤에는 쉬지 못한 배송 기사들의 노동이 있었다.
그런 쿠팡이 이번 대통령 선거일 하루 동안 주간 로켓배송을 중단한다. 기사들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다.
쿠팡뿐 아니라 우체국택배, 한진택배, CJ대한통운, 롯데글로벌로지스, 로젠택배 등 주요 택배사들도 대선 당일 휴무를 결정했다.
무엇보다 쿠팡이 로켓배송을 멈춘 것은 2014년 서비스 시작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매해 8월 14일로 지정된 '택배 없는 날'에도 로켓배송은 늘 이어졌었다.
이번 조치로 제21대 대선은 택배 노동자들이 비교적 온전히 투표권을 행사한 첫 선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투표할 권리가 있어요'
배송 노동자들은 이번 결정을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라고 평가했다.
제주도에서 5년째 쿠팡에서 배송을 하고 있는 조신환 씨(47)도 "우리는 사전투표도 잘 못 해요. 일 끝나면 밤 8시가 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본투표 날에도 계속 일하니까 사실상 투표할 수가 없었죠"라고 말했다.
조 씨는 하청업체를 통해 쿠팡의 주간 로켓배송을 맡고 있다. 오전 9시에 일을 시작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빨리 끝나면 저녁 7시가 된다.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기사도 적지 않다. 식사 시간도 거르기 일쑤다. 그는 "빨리 끝내고 집에서 먹는 게 낫죠"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기자와 통화하는 내내 그는 배송 중이었다. 배송 단말기의 '삑삑'거리는 소리가 통화 중간중간을 채웠다. 그는 계단을 뛰어오르면서도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어렵게 시간을 내 인터뷰에 응했다.
지친 몸과 마음에도 '참정권'이라는 것은 그에게 참으로 소중했다.
"그래도 꼭 투표하고 싶어서, 예전엔 새벽에 억지로 일어나서 투표하고 바로 나왔어요. 그날은 잠을 4~5시간밖에 못 자는 거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움직인 거예요."
그런 그에게 이번 결정은 작은 변화였지만, 실질적이었다.
"이번에 그래도 이런 결정을 통해 부담이 좀 줄었어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당연히 투표할 권리가 있어요. 그걸 막아선 안 되죠. 누구든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권리잖아요."
그는 주변 동료들 중에도 그동안 총선이나 대선 등 중요한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던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배송 시간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다. 그는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생겨서 투표도 하고, 동료들이랑 끝나고 만나기로 했어요"라고 전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번 결정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주간 배송이 쉬는 만큼 '수입이 줄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당 조치는 '주간 기사'에게만 해당되고, 야간 기사들은 여전히 전날, 당일, 다음 날 모두 로켓배송을 이어간다.
서 씨는 "하루 쉬고 나면 다음 날 물량이 많이 몰리는데, 몇 배로 쌓일 가능성도 있어서요. 쉬긴 해도 일 자체는 줄지 않죠"라며 걱정을 내비쳤다.
쿠팡은 고객 불편을 줄이고, 대선 당일 야간 근무자와 다음 날 근무자에게 피해가 없도록 '필수 상품 사전 주문'을 요청하긴 했지만, 물량 집중 우려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그는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조 씨 역시 "중요한 권리를 위한 첫걸음"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이게 첫걸음이에요. 이번에 저희가 목소리를 내서 얻은 권리잖아요. 기사님들도 이런 권리와 자유를 당연하게 누렸으면 좋겠어요."
이번 쿠팡의 결정에 따라 전국적으로 약 2만 명의 배송 기사들이 이날 하루 주간 배송에서 제외될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쿠팡이 선거일 주간 배송 중단을 공식화하자,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택배노조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노조는 "특수고용 택배노동자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 역사적인 첫걸음"이라며 "이번 휴무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과로 문제 개선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택배노조 강민욱 쿠팡 본부 준비위원장도 "긍정적인 마중물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행보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투표일 전후로 택배노동자들의 과로가 전가되지 않도록, 그런 대책도 함께 잘 세워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