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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히로시마…'우린 아직도 그 날에 멈춰있다'

45분 전
증언하고 있는 이정순 할머니
BBC/김효정
이정순 할머니는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몸서리를 친다

"원자탄이라는 것은 너무나 겁나는 화약이라예."

이정순(88) 할머니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80년 전의 일이지만 할머니는 그날을 떠올리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전쟁 때라 은빛 비행기가 하늘에 빙빙 떠다니곤 했는데, 선생님이 '책상 밑으로 숨어라'고 했어요. 늘 그랬죠. 원자탄이 떨어진 건 학교에 가려던 아침이었어요. 아버지가 일 나가시려다가 갑자기 뛰어오셔서 '빨리 피난 가야 된다'고 하셨어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이야기를 시작한 할머니는 피폭자들의 몸이 흘러내려 "눈만 보였다"고 회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길가에 사람들이 죽어서 가득했다는데,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인지 울었던 기억이 대부분이에요. 그냥 울기만 했어요. 계속 울고 또 울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정순 할머니와 같은 5만 여 명의 한국인 피해자들도 있었다.

일본인 피폭 생존자들은 반핵 활동 공로로 202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한국인 피폭 생존자들은 국가의 책임도, 사회의 관심도 제대로 닿지 못한 채 잊혀 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피폭 생존자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 건 자녀들의 고통이다. 파킨슨병, 뇌성마비와 같은 질병과 장애를 안은 채 살아가는 피폭 2세·3세는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물러 있다.

80년이 지난 지금, 원폭의 상처는 2025년 오늘도 아물지 않았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

폭우가 겨우 잠잠해지고 길마다 웅덩이가 패인 산골짜기 깊숙한 곳. 낡은 팻말 하나에 '원폭피해자 복지회관'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건물 앞에 다다르자, 학교 운동장 절반쯤 되는 너른 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이름 모를 잡초와 풀로 가득 덮여 있었다.

취재진이 찾은 이곳은 원폭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기도 하는 경상남도 합천이다.

당시 피폭자 대부분은 경남 합천 출신으로, 강제징용이나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원폭 피해를 겪고 살아남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이 생겼다. 이정순 할머니도 이곳에 산다.

너른 부지와 달리 막상 복지회관 안은 썰렁했다. 원폭 피해자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몇몇 관계자들만이 조용히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여긴 1세대 피해자분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인데, 이제는 대부분 돌아가셔서 계신 분이 거의 없어요."

이 복지회관을 위탁 관리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의 진연동 팀장의 설명이다.

이 곳에서 만난 원폭 생존자 심진태(83)씨는 1세대 피해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그 긴 세월 동안 한국도, 일본도, 국제사회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에게는 무관심했다고 토로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잖아요. 원자폭탄을 투하한 나라도, 그걸 막지 못한 나라도. 미국은 사과한 적도 없고, 일본도 모른 척하잖아요. 한국 정부도 똑같아요. 다들 서로 책임 미루면서 피해자만 남았어요."

"결국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거죠."

심진태 씨
BBC/김효정
83세 생존자인 심진태 씨는 원폭 직후의 참상을 기억한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이기도 한 심진태 씨의 아버지는 일본의 강제 노동동원으로 군수업체에서 일했다.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오게 된 어머니도 탄알을 담는 나무 상자에 못을 박는 일을 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사회에서 '2등 국민' 취급을 받으며, 기피되는 어렵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야 했다. 일본인이 꺼리는 막노동이나 전쟁물자 생산, 폐허 속의 사후 정리 작업은 대부분 조선인의 몫이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투하된 핵폭탄 '리틀보이(Little Boy)'로 히로시마에서 약 7만 명이 즉사했다. 사흘 뒤 8월 9일 나가사키에는 원자폭탄 '팻맨(Fat Man)'이 떨어지며 참사는 더욱 확대됐다. 69만 명이 피폭됐고, 그중 23만 명이 사망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자료에 기반하면 전체 피폭자 사망률이 약 33.7%였던 데 비해, 한국인의 사망률은 무려 57.1%에 달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한국인 피폭자 약 7만 명 중 약 4만 명이 원폭 투하 당일부터 그해 말까지 숨졌다.

심 씨는 "원폭자 사체 정리를 해야 되잖아요. 처음엔 들것으로 옮기기도 했는데 너무 많아서 힘들고, 나중엔 쓰레받기에 사체를 담아 쓸어 모아 학교 마당 같은 데에 모아 놓고 불을 질러 태웠대요. 그 일을 조선인들이 많이 했어요. 전후 정리나 군수공장 일 같은 건 대부분 조선인들이 했죠"라고 증언했다.

경기복지재단이 발표한 '원폭피해자 실존생애사 연구'에 따르면, 일부 생존자들 또한 원자폭탄 투하 직후 히로시마에서 시신을 수습하거나 무너진 건물을 철거하는 등 사후 처리 작업에 직접 동원됐다고 증언했다.

폭발 한 시간 뒤, 히로시마에는 방사능에 오염된 '검은 비'도 내렸다. 일본인들은 친척이 있는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지만, 연고가 없던 조선인들은 그 자리에 남아 위험에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의료 접근성도 현격히 낮았다.

원폭 투하에 뒤이어 광복이 찾아왔다. 원폭 피해자 2만3000여 명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도 온전한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반일 감정을 받으며 소외된 삶을 살았다.

심 씨는 "합천은 원래 한센병 환자촌이 있었고, 그 이미지 때문에 원폭 피해자들도 '피부가 이상한 사람들'로 취급받았다"며 "그 소문 때문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의 일본 히로시마
Universal History Archive/Universal Images Group via Getty Images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의 일본 히로시마

이정순 할머니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특히 화상을 심하게 입고 돌아온 사람들이나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무시당했어요. 그건 제가 제 눈으로 봤어요. 우리 동네에도 등이 다 벗겨지고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분들은 혼인을 거절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어요."

자연히 생계는 어려워졌고, 고단한 삶은 끝없이 이어졌다.

어느 날부터인지 알 수 없는 병이 찾아왔다. 피부병, 심장질환, 신장 이상, 관절 괴사, 암, 정신적 후유증까지. 증상은 몸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원인은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다.

이정순 할머니는 "피부암이 생겼어요. 한 20~30년 전부터요. 또 파킨슨병도 있고요. 40대부터 증상이 시작됐어요"라고 했다. 이어 "심장이 제일 아파요. 병원에 가면 협심증이라 그러는데 전신을 쪼듯이 아파요. 어떤 땐 30분, 어떤 땐 1시간도 지속돼요. 머리도 띵하고 눌리는 듯하고"라고 말했다.

자녀에게까지 이어진 현재진행형 고통

하지만 피폭자들을 더욱 괴롭게 하는 건 자녀들 역시 다양한 질병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이정순 할머니의 아들 이호창 씨(52)의 배에는 1~2cm 크기의 구멍이 나 있다. 2023년 7월부터 그는 매일 그 구멍을 통해 복막투석을 받고 있다.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그는 신장 이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씨는 한국 원폭 피해자의 자녀, 즉 2세 피해자다. 그의 누나들 또한 각종 신장 질환과 암으로 투병 중이다.

이 씨의 증상은 2000년부터 시작됐다. 다리가 붓고, 통증과 열감이 반복되었지만 '좀 쉬면 괜찮겠지' 하고 넘겼다.

그러다 결국 3년 전 신부전증 진단을 받았고, 현재 치료 중이다. 일도 지난해에 그만둬야 했다.

매달 투석과 관련돼 드는 비용은 약, 검사, 교통비 등 통상 100~200만원 정도다. 다행히 장애 등급을 받아 일부 지원을 받고 있지만, '원폭 피해'와 관련된 안내나 지원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이호창 씨는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이게 피폭 영향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누가 증명해줄 수 있겠냐"고 토로했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렵고, 유전자 검사도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들어요. 정부나 병원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눈물을 흘리는 피폭자 2세대 한정순 씨
BBC/김효정
온 가족이 이유를 모른 채 병마와 싸웠다며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피폭자 2세대 한정순 씨. 그는 한국원폭피해자2세환우회 합천평화의집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2세대 피해자인 한정순 씨는 피폭자이지만 큰 질환 없이 살았던 어머니와 달리, 30대 초반부터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을 심하게 앓았다.

걷는 것은 불가능했고, 손으로 몸을 끌어 움직여야 했다. 당시 수술을 알아봤지만 91년도 기준으로 수술비 1000만원이 필요했다. 당시 임금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약 67만원 수준이었다. 그 어떤 지원이 없는 가운데 수술비는 너무 큰 부담이었고, 수술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첫째 아들은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났다.

한 씨는 말했다. "아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혼자 걸어본 적이 없어요. 제 몸도 그런 가운데 아팠는데 시댁에선 모진 말을 했어요. '병신 자식 낳고 지까지 병신이면 우리 집 망치러 들어왔냐'하고요."

"그때를 생각하면 진짜 지옥이 따로 없었어요."

한 씨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또 계속 흘렀다.

이후 2000년대 전라도 여수의 한 병원에서 한 씨의 사연을 듣고 200만원에 수술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지금은 걸을 수 있게 됐지만 자기 발로 걷지 못하는 아들만 생각하면 늘 마음 속에 돌이 박힌 듯하다.

현재 아들은 장애인 활동지원사와 한 씨가 번갈아 가며 돌보고 있다. 한국에서 중증장애인의 월평균 간병비는 142만~198만 원 수준이다.

한 씨는 현재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으로 일부 비용 지원을 받고 있지만, '원폭 피해'와 관련된 직접적인 지원은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한 씨는 조심스럽게 바람을 전했다.

"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이가 돌봄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해요. 원폭피해자복지관 시설에 입소할 수 있게 해주는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마지막 소원이에요."

한정순 씨와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
한정순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 있는 피폭자 2세 한정순 씨의 큰 아들은 뇌성마미를 앓고 있다

'과학적 근거'를 둘러싼 논란

한국 정부는 그동안 자국민 피해자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중앙 정부 차원'의 피해자 실태조사조차도 뒤늦게 시작됐다. 보건복지부가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사 보도자료를 처음 발표한 것은 70년도 지난 2019년이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너무 늦었다"는 비판을 제기해왔다. 이 내용은 대부분 설문조사에 기반한 것이다.

복지부는 BBC 코리아의 관련 질의에 "그전까지는 관련 법적 근거가 없어 예산도 확보할 수 없었고, 공식적인 조사를 추진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앞선 연구에서 2세 피해자들이 일반인보다 질병에 취약하다는 결과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3년 경상남도 조사에서는 피폭 2세 244명 중 13.9%가 선천성 기형이나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었고, 장애인 등록률은 전국 성인 평균(5.0%)보다 두 배 가까운 9.1%에 달했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서는 피폭 2세 4080명 중 7.3%가 이미 사망했으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52.2%)이 열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는 우울증, 심혈관 질환, 빈혈 등 다양한 질환의 발병률이 일반 국민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 내에는 이들을 전문적으로 진료할 수 있는 의료 인력조차 충분하지 않다.

나가사키 방사선영향연구소에서 원폭 피해자 건강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마이즈미 미사 부부장은 대한적십자사의 요청으로 한국에 파견돼 건강 상담을 진행해왔다. 그는 "한국의 피해자 분들도 일본의 피해자처럼 다양한 신체적 질환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계신 것 같다"며 "하지만 한국에는 원폭 질환에 대해 알고 있는 의사가 없어 불안감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에서 온 의료진에게 건강 상태를 상세히 물어볼 수 있어 좋았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다"며, "진료비나 수당 지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언제든 (피해자 전반적으로) 전문적인 건강 상담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원폭 피해자 건강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일본 의료진
대한적십자사
원폭 피해자 건강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일본 의료진

여러 현실을 반영해, 지난해 9월 신성범(국민의힘), 이용선(더불어민주당), 차규근(조국혁신당) 의원은 '피해자 범위'를 2·3세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하지만 실태조사 및 의료지원 확대 내용을 담은 이 개정안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신성범 의원 측은 BBC 코리아의 질의에 "과학적 근거 부족과 재정 부담, 사회적 관심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입법 우선순위에서 밀렸다"고 답했다.

이어 "2·3세 질환과 피폭 간 인과관계가 완전히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국내외 연구에서 확률적·역학적 상관관계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며 "정책은 과학보다 먼저 고통받는 국민에게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천평화의집 이남재 원장 역시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와 달리 대를 이어 유전체 변형을 통해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며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의학적·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현실이 매우 냉혹하다"고 했다.

정부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2019년 실태조사 이후, 보건복지부는 한양대학교에 의뢰해 2020년 5월부터 원폭피해자 추가조사 및 코호트 대상자들에 대한 추적조사를 벌였다. 피폭자들의 혈액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질병의 다양성을 연구하고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파악하겠다는 취지였다.

원래 조사 결과는 지난해 말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BBC 확인 결과 이 내용은 '미발표'로 결정됐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피해자나 합천 지역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피해자들은 그 결과가 설령 공개된다 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진태 씨는 "장애가 있거나 아픈 사람을 찾아간 게 아니라, 검사받으러 걸어 올 수 있는 사람만 조사했다"며 "진짜 아픈사람은 집에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2세, 3세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조사하고, 증언도 남겨야죠. 그런데 지금까지도 제대로 하지 않아요"라고 덧붙였다.

피해자 2세 한정순 씨 역시 "설문지가 의학용어로만 되어 있어서 어르신들은 내용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내가 아픈 게 증거고, 우리 아들이 장애인으로 태어난 게 증거예요. 대를 이어 아픈 게 눈에 보이는 증거인데도 인정 안 해줘요. 결국 우리는 그냥 아파 죽어도 인정 못 받는 거죠"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측은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유전체 분석 연구를 통해 2·3세 피해자에 대한 기초자료를 수집했으며, 통계적 검정력 확인이 필요하다는 연구 제언에 따라 2025년부터 2029년까지 후속 조사를 진행 중"이라며, "연구 결과의 유의미성이 확인되면 피해자 범위 확대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BBC는 외교부에도 관련 질의를 했고 "우리 정부는 원폭피해지원특별법 등을 통해 한국 내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의료 지원을 제공하고 있으며, 관련 세부 사항은 보건복지부가 담당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대한적십자사 원폭피해자사할린동포지원본부 허정구 본부장은 현재의 지원 체계를 손보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지원 건물도 많이 노후화됐고, 기부금이나 요청도 받긴 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1세대 피해자분들이 너무 고령이시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으셨어요. 그런데도 일본과 한국 양국 정부는 여전히 1세대만을 지원 대상으로 보고 있어요. 이제는 사업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논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피폭자들의 당시 피해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심진태 씨
BBC/김효정
심진태 씨가 합천원폭자료관에 전시된 피폭자들의 당시 피해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80주년 맞은 일본의 '변화 없는' 시선

한국 원폭 피해자는 일본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제도적·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해왔다.

'원폭 피해 한국 여성들'의 저자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이나 원폭 피해자 묘지에도 한국인은 묻히지 못했고, 구석진 곳에 따로 안치됐다"며, "일본뿐 아니라 국제사회도 이들에게 오랫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40년 넘게 한국인 피해자를 지원해온 일본 시민운동가 이치바 준코 씨 역시 "일본에서는 원폭 교육을 많이 받지만, 한국인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없어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은 1957년부터 자국민 피폭자에게 의료비와 수당을 지원해왔지만,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피해자들은 국적과 거주지를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2002년, 한 한국인 피해자의 소송에서 일본 법원이 원고의 손을 들어주며 제도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듬해부터는 재외 피폭자에 대해서도 의료비 지원이 가능해졌지만, 그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피폭자건강수첩'을 보유해야 했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직접 일본을 방문해 수첩을 신청해야 하는 현실은 또 다른 장벽으로 작용했다.

이치바 씨에 따르면 "당시 피해자협회 회원 2500명 가운데 실제로 수첩을 발급받은 사람은 500명 정도였고, 이 중 생존자는 30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부터는 재외공관에서도 수첩 신청이 가능해졌지만, 이런 변화는 정부나 외교 협상이 아니라 피해자 개인들의 오랜 법적 투쟁의 결과였다.

한일 정부 간 공식 논의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서조차 거론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실질적인 외교적 대응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2, 3세대를 위한 지원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자국 내 피폭 2세·3세에 대해서조차 방사능 피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일본 내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후손에게도 건강 관련 지원을 해주는 곳도 있지만 전체 지역에 적용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이 같은 입장은 해외 거주 피해자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인 2세·3세 피해자들은 일본과 한국 양국 모두의 제도 밖에 머물러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은 시민들
Anadolu/ Getty Images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이나 원폭 피해자 묘지에도 한국인은 묻히지 못했고, 구석진 곳에 따로 안치됐다"고 말했다

이치바 씨는 이와 관련해 "한국인 피해자들이 오랜 기간 차별을 받아온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반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지난달 12일, 요코타 에이코 히로시마현 부지사 등 일본 지방정부 관계자들이 경남 합천을 방문해 원폭 자료관을 둘러보고, 1100여 명의 희생자 위패가 안치된 위령각에서 헌화했다. 요코타 부지사는 "핵 폐기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나 히로시마 시장 출신 인사들이 합천을 찾은 적은 있었지만, 현직 관료의 참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정 부분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방문 당시에도 식민지배나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이나 사과는 없었다.

이치바 씨는 이러한 행보에 대해 "전쟁 책임과 핵 피해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일본 사회의 인식에 한계를 지적했다.

"사죄도 없었고요. 전쟁과 핵은 분리해서 볼 수 없습니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인데, 일본 사회는 그걸 분리하려고 하고 있어요. 저는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잊혀진 기억의 공간

원폭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있는 전각
BBC/김효정
원폭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있는 전각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 부지 한켠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1160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피해자들을 기리는 이 공간은,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있다.

기자가 찾은 그날 역시 이 곳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패를 덮는 문이 자물쇠로 닫혀 있을 정도였다. '끼이익'하고 문을 여는 소리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여전히 지구 한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핵시설 공격'이라는 뉴스 한 줄에도 무덤덤한 사람들이 많다. 원폭 피해자들은 그런 무관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심진태 씨는 역사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무관심은 차별과 고통이라는 또 다른 시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은 건 몸이 기억해요. 이걸 잊으면 다음 세대에도 똑같이 반복돼요. 나중엔 물어볼 사람도, 기억해줄 사람도 없어져요...그냥, 없던 일이 돼버리는 거예요."

대표 이미지 디자인: 안드로 사이니 (BBC 동아시아 비주얼 저널리즘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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