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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배우라 안 볼 거야'…필리핀 배우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기까지

1일 전
레아 살롱가
Getty Images
레아 살롱가는 고국 필리핀에서 마치 국보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1991년 당시 레아 살롱가(55)는 이미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주연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배우였으나, 여전히 다음 배역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살롱가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 소속사가 오디션에 내 이름을 올렸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아시아인이기에 (오디션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러한 배역을 맡는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BTS, 블랙핑크 같은 아티스트들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쇼군', '오징어 게임' 같은 드라마가 에미상을 휩쓸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이 주연을 맡은 뮤지컬까지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두는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살롱가의 경우 이후 세계적인 브로드웨이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고국인 필리핀에서는 마치 국보와 같은 존재로 큰 사랑을 받는 그는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와 '뮬란'의 주인공 등 디즈니에서 단 1명도 아니고 무려 공주 2명의 목소리를 맡으며 불멸의 배우로 남게 됐다.

하지만 살롱가가 초창기 배역을 찾기 어려웠던 것처럼, 이 자리까지 오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역할인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에포닌' 역은 오디션 자체를 건너뛸 수 있었기에 맡을 수 있었다.

살롱가는 "당시 '레 미제라블' 제작진이 '미스 사이공' 제작진과 같았다. 그래서 합류 제안을 받을 수 있었고 … 제작사에 '반드시 살롱가를 데려와야 해'라며 나를 지지해 준 분들이 계셨다는 점에 늘 감사한다"고 했다.

이 유명한 뮤지컬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최초의 아시아계 여배우인 살롱가는 이 캐스팅이 사실상 "실험"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내가 캐스팅됐을 때, '레 미제라블'은 이미 5년째 공연 중이었다"는 그는 "나는 1월에 합류했는데, 보통 비수기이다. 그래서 제작진도 위험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전체 배우 중 유색인종은 저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저는 '이건 일종의 전략인가?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건가? 한번 잘 될지 해보자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 보상은 엄청날 테죠."

1993년 뉴욕에서 '레 미제라블' 에포닌 역을 맡은 레아 살롱가
Michael Le Poer Trench
살롱가는 유명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최초의 아시아계 여배우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백인 배우가 맡았던 배역에 들어서는 일은 "매우 스트레스"였다.

"'미스 사이공' 때보다 '레 미제라블' 준비 당시 스트레스가 더 컸습니다 … (미스 사이공은) 아시아인 역할을 아시아인 배우가 맡은 것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의 경우, '이 공연에 아시아 여자 하나를 캐스팅해보겠다'는 식의 결정이었죠. 당시만 해도 이 작품에 (아시아인 배우가) 합류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동시에 살롱가는 이 일이 지닌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제가 해낸다면) 에포닌 역을 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인종적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생각은 현실이 됐다.

현재 싱가포르에서 공연 중인 '레 미제라블: 더 아레나 스펙타큘러 월드 투어'에서 살롱가는 에포닌 역을 맡은 젊은 배우 나타니아 옹과 함께 무대에 서고 있다. 살롱가가 다른 아시아 배우들에게 길을 열어준 바로 그 배역이다.

그는 "나는 (나타니아가) 에포닌을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 그리고 이 분장실에 앉아 공연을 준비하다보면, (그 실험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결과에 나도 기여했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어 웃으며 "이제는 다음 세대 배우들이 (박차고 나갈) 차례다 … 무릎에 힘이 넘치는 젊은 친구들"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웨스트 엔드에서 이 배역을 맡은 최초의 싱가포르인으로서 새 역사를 쓴 옹(28) 역시 살롱가 같은 배우들이 에포닌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옹은 자신이 "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몇 달이 지나서야 … 내가 해냈다. 무언가를 이루어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옹은 살롱가를 "모든 유색인종을 위한 선구자"라고 칭송하면서도, 의미 있는 대표성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때때로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다만 현재 이 투쟁은 그 영역에 들어서기 위한 싸움에서 순수한 재능만으로 인정받기 위한 싸움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옹은 "동아시아인으로서 배역에 지원할 때 '우리가 다양성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고용된 건지, 아니면 실제로 우리가 연기를 잘해서 선택된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레아 살롱가(오른쪽)와 나타니아 옹(왼쪽)
LES MISERABLES THE ARENA SPECTACULAR WORLD TOUR, SINGAPORE 2026
현재 싱가포르에서 공연 중인 '레 미제라블'에서 살롱가는 나타니아 옹(왼쪽)과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캐스팅 외에도 살롱가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아시아계 아티스트들은 서양의 이야기에 자신을 맞추는 대신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어 한국인이 공동 집필한 작품이자, 평단의 호평을 받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례를 언급했다. 해당 작품을 통해 한국인 최초의 토니상 수상자가 탄생했다

"그런 작품을 보고 … 수많은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 어떤 작품이나 사람이 정말 훌륭해서 무시할 수 없다면, 결국 주목받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살롱가는 이렇게 "본질적으로" 아시아적인 작품이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면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는 이 업계에 아시아계 롤모델이 많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수많은 (아시아인) 청년들이 무대에서 자신과 닮은 이를 볼 수 있다는 건 … 정말 놀라운 일"이라는 그는 "이 무대를 꿈꿨지만, 자신을 투영할 만한 롤모델이 없었던 아시아인 세대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제 제 아들은 이러한 롤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게 돼 저도 기쁩니다."

한편 살롱가는 자신도 "열렬한 팬"이라는 K팝 그룹 BTS와 같은 성공 사례 또한 아시아인들이 본받을 수 있는 롤모델이라고 했다. 그에게 글로벌 무대에서 이들이 이룬 경이로운 성공은 어딘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살롱가 또한 스타로 발돋움하던 시절, 세계 무대에서 모국을 대표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따랐던 막중한 부담감을 기억한다. "웨스트 엔드로 향하며 성공하지 못하면 7500만 명(필리핀 인구)을 실망시키게 될 거라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웠다. 버거운 책임감이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저는 BTS를 높이 평가합니다. 마치 온 아시아의 기대를 짊어진 느낌일 것"이라는 그는 최근 자신도 BTS 콘서트를 생중계로 보고자 보컬 준비 시간을 15분이나 미루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살롱가는 이러한 기세가 뮤지컬 무대를 넘어 미디어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필리핀 민속설화에 뿌리를 둔 내용으로, 현재 '드림웍스가 작업 중인 애니메이션 영화를 예로 들었다. "내 문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라니 … 내 생애에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과거 18세의 레아 살롱가가 이 모든 것을 본다면 무슨 반응일까.

그는 "무척 놀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 자신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크게 자극 받을 것"이라고 답했다.

"누군가 우리를 주변부로 밀어내려 해도, 결국 우리는 스스로 중심에 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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