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트럭 운전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전쟁이 바꿔놓은 우크라 여성들의 직업
우크라이나인들의 삶은 전쟁으로 인해 여러모로 바뀌었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일’로 여겨지던 직업에 여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 또한 이러한 변화 중 하나다. 징집으로 인해 수많은 남성들이 전선으로 향하면서 여성들이 트럭 운전사, 공장 관리자, 경비원 등의 직업에 뛰어들고 있다.
릴리아 슐하는 우크라이나 최대 슈퍼마켓 체인 중 하나인 ‘실포’의 화물 트럭 운전사로 일한다. 몇 년간 꿈꿔오던 직업이었으나, 처음엔 자녀들이 너무 어렸고, 또 남편도 아내가 이러한 일을 하는 것에 반대했다.
현재는 이혼해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자녀들을 키우고 있다.
꿈을 이루다
러시아의 전면적인 침공이 시작되기 전 5년간 슐하는 창고 직원으로 일하는 한편 저녁엔 택시 운전사로 나서 부족한 수입을 메꿨다.
그러다 더 큰 차를 몰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들었고, 화물 트럭 운전을 배울 기회를 잡게 됐다.
지난해 화물차 트럭 운전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 슐하는 자신의 할머니 또한 이 직업을 꿈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너희 할머니의 꿈을 네가 실현하고 있구나’라고요.
슐하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자연을 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면서 “가끔씩 제가 이 거대한 트럭에서 나오는 모습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길에서 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슐하는 오늘날엔 화물 트럭 운전이 전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주차만 똑바로 하면 됩니다. 그럼 사람들이 화물을 알아서 내려주죠. 만약 고장이 나도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혹은 동료들이 주변에서 도와주러 오기도 하고요.”
최근엔 오스트리아까지 운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국제 중량 화물 차량(HGV) 운전사로서의 첫 경험이었다.
현재 ‘실포’의 유일한 여성 운전자는 전차 운전사 출신인 나탈리아와 슐하 뿐이지만, 리우보프 우크라이네츠 인사담당자는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침공한 지 2년 반이 지난 현재, 전통적으로 남성 노동자가 대다수였던 우크라이나의 여러 산업들은 인력난을 겪고 있다. 전쟁 초기엔 남성 수만 명이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며, 이후로도 징집을 통해 수만 명이 전쟁터로 향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징집 법을 제정해 징집 대상을 확대하고 현재 최전방에 배치된 병력을 교체하기로 했다.
법이 통과되기 전에도 우크라이나에선 남성들이 길을 걷다, 혹은 검문소에서 징집 서류를 건네받곤 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직원이 부족해질 위험에 처했다.
사기업에선 직원의 징병 면제를 신청할 수 있으나, 이 또한 법적으로 전체 남성 노동자의 최대 50%까지만 가능하다.
전통적으로 남성의 일로 여겨지던 분야에 많은 여성들이 뛰어들고 있는 이 현실이 마냥 기쁘진 않다. 여성들의 꿈과 직업적 야망이 실현되는 배경엔 참혹한 전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 역사상 여성들이 빈자리를 메우고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싸우던 미국, 영국 등에서도 여성들이 노동 인구로 투입되며 경제를 지탱했다.
책 ‘제2차 세계대전의 당시 여성 영웅들’의 저자 캐서린 J. 앳우드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따랐다. 필요한 게 무엇인지 살핀 뒤 그 일을 했다”고 묘사했다.
리더로 자리 잡기
화학을 전공한 나탈리아 스카이다노비치는 최근 ‘버드믹스’사에 기술자로 지원했다. 우크라이나 서부에 자리한 회반죽, 접착제, 충전제 생산 업체다.
그런데 회사 측은 스카이다노비치에게 ‘생산 책임자’라는 훨씬 더 높은 직책을 제안했다. 한 달 전 군대에 자원입대한 남성을 대체하는 자리였다.
스카이다노비치는 소규모 팀을 관리해 본 경험만 있었기에 이는 도전이었다.
“사실 생산라인의 남성 직원들은 저보다 훨씬 더 실무 지식이 풍부합니다. 그런데 제가 모르는 게 있어도 놀리지 않고 항상 도와줘 고맙게 생각합니다. 모든 걸 하나도 빠짐없이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시대의 잔재이기도 한, 여성의 특정 직업 금지 조항을 2017년 폐지했다. 그렇기에 스카이다노비치는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진 않다고 했다.
과거 여성들은 법적으로 중공업, 농업 광업 등 500여 개의 직업을 선택할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거나, 독성 물질을 다루는 분야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건설업, 운송업, 보안업 및 전기기사, 배관공 등 이러한 법적 금지 목록에 포함되진 않았으나, 전통적으로 ‘남성의’ 일로 여겨진 분야나 직업들도 있다.
'갈등 해결 능력'
한편 간호학을 전공한 발렌티나 타니치는 현재 유명 슈퍼마켓 체인 ‘ATB’의 한 지점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상점에서 계산원으로 일했다.
어릴 적부터 ‘탐정’ 놀이를 좋아했던 타니치는 계산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경비원들의 업무에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에 새 경비원을 뽑는다는 공고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타니치는 경비원 업무 중 여성이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했다. 무기도 필요 없고, 다른 이의 팔을 비틀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버튼을 누르면 지원팀이 도착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관찰력 및 사람들과의 소통 능력”이라는 설명이다.
“고객들의 성향은 다양하죠. 때로는 공격적인 고객도 있지만, 모든 상황을 갈등 없이 해결해야 합니다.”
여성이 모든 남성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에선 국내외적으로 수백만 명 규모의 실향민이 발생하며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고용 시장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도 최전방과 가까운 지역에선 점점 더 노동자를 구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고향이자 러시아의 포격이 잦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크리비리흐의 시멘트 공장에선 여성 화물 트럭 운전 훈련생들을 모집하려고 했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유명 구직 플랫폼인 ‘워크.ua’의 빅토리아 빌리야코바는 “피난민 규모가 늘어나면서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여겨지던 일자리에도 사람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훈련 및 승진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도 모든 공석을 메울 만큼 여성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용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기업들이 이제 인구 구성에서 노인 및 연금 수급자 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